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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트레커 Jan 10. 2024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자취 서린...여수 장도와 묘도

- 영화 '노량'에서의 실감 났던 그 전투 현장을 가다


명량, 한산에 이어 기다렸던 김한민 감독의 영화 노량을 지난 연말에 보았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의 풍랑 속에 어머니와 셋째 아들 면을 잃고, 마지막 전쟁에 임하는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영화 노량의 전반부는 순천왜교성(順天倭橋城)에 고립된 왜군과, 그 앞 장도와 묘도에 진을 친 조명연합수군이 이들의 숨통을 조이는 전투 현장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이번 섬 여행지는 영화 노량의 무대이자,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자취가 서린 여수 장도와 묘도이다.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의 최대 격전지, 왜교성(倭橋城) 전투


순청왜교성(順天倭橋城)은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 1번지에 위치한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로, 전라도 지방에 남아 있는 유일한 왜성이다. 1597년 9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복원된 순천왜교성의 성곽 모습

1597년(정유년) 9월, 왜군은 경기도 부근 전투에서 패한 뒤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면서 각 지역의 요충지를 찾아 성을 쌓기 시작했다. 순천 신성포에 축조된 왜교성은 그중 하나로,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순천왜교성의 망루인 천수기단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간에 걸쳐 이곳 일대에서 벌어진 싸움이 왜교성(倭橋城) 전투이다. 조명연합군과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사이에 벌어진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쟁이기도 했다. 당시의 모습이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 잘 묘사되어 있다.


정왜기공도권은 명나라의 한 종군 화가가 자신이 직접 본 전쟁 장면을 두루마리에 묘사한 그림이다. 화가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명나라 지원군의 육군장수 유정의 부하로 추정되고 있다.

정왜기공도권에 묘사된 '순천왜교성'

정왜기공도권에 의하면, 순천왜교성의 성곽 구조는 본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성에는 별도의 내성이 있다. 내성과 본성의 성벽은 각각 2겹으로 축조되어 있고, 외성은 1겹으로 축조되어 있다. 현재 성곽 내에는 망루인 천수기단(天守基壇)과 출입문인 문지(門址), 해자 등의 주요 건물지가 남아 있어, 성곽 축조 당시의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여수 장도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수군


난중일기에 의하면 완도 고금도를 출발한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은 7월 24일 절이도(고흥 거금도) 해전에서 왜군을 상대로 승리한 후, 9월 15일 나로도를 거쳐 18일 여수 돌산 방답진에 도착한다. 그리고 20일 묘도로 진출해 조명연합수군과 합세, 왜교성의 유키나가와 그 잔당들을 상대로 토벌 작전을 펼친다.

율촌 장도파크골프장에서 전망대 오르는 길

육지에서 왜교성을 협공하기로 한 명나라 장수 유정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되어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상황에서도 조명연합수군은 왜교성 인근 장도까지 진출해 왜군의 숨통을 끊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장도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30여척의 왜선을 격침하고 11척을 나포했으며, 다수의 왜군을 사상하는 등의 전과를 올린다.

장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묘도(좌측 가운데)와 멀리 남해 망운산 줄기

순천왜교성 터에서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장도(율촌장도공원)까지의 거리가 3.0km 남짓이다. 여수시 율촌면 율촌산업단지 내에 있는 장도는 지금은 섬이 아니다. 섬의 절반가량을 절개한 후 바다를 메워 율촌산단을 조성했다. 그리고 일부는 율촌장도공원으로 조성되어 파크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파크골프장 뒤로 솟아있는 봉우리를 통해 옛 장도의 모습을 그려볼 뿐이다.

장도공원 옆 송도선착장에서 바라본 송도와 멀리 묘도(가운데)

파크골프장에 주차하면 섬의 최고봉인 장도 전망대로 가는 길이 나온다. 파크골프장 옆 시멘트 임도의 끝에 산으로 오르는 데크 계단이 있다. 장도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율촌산단의 건물들과 소나무들 사이로 손에 잡힐 듯 순천왜교성이 보인다. 장도에서 왜교성을 향해 질러댔을 조명연합군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장도 공원에는 적진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조명연합수군의 뜨거운 결의를 기억하고 있는, 여수 묘도


율촌에서 묘도를 가려면 총연장 2260m의 이순신대교나 묘도대교를 건너야 한다. 이순신대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주탑(270m)에 세계 최고의 초강도 케이블을 끌어당겨 교량을 유지하고 있다. 이 교량은 국내 기술진이 순수 국산 자재와 장비, 기술로 시공한 국내 최고, 세계 4위의 현수교이다.

세계 4위의 현수교, 이순신대교

또한 세계 최고의 내풍 안전성(초속 90m)을 확보하고 있다. 이순신대교처럼 정유재란 당시 묘도에 주둔한 조선 수군은 진린 장군의 명나라 수군과 연합하여,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노량해전이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묘도 이순신대교 홍보관 아래에는 조명기념원(朝明紀念圓)이 자리 잡고 있다. 묘도는 임진왜란 막바지인 1598년 9월 하순부터 11월 19일 노량해전이 벌어지기까지 약 2개월간에 걸친 조명연합수군이 진을 쳤던 곳이다.

조명기념원의 동상. 앞줄은 진린 장군(왼쪽)과  이순신 장군, 뒷줄은 등자룡 장군(왼쪽)과 송희립 장군이다

조명기념원은 당시 묘도에 주둔했던 조명연합군의 뜨거운 결의를 기억하기 위해 2023년 여수시가 조성했다. 영화 노량의 영향 때문인지 몇몇 관람객들이 이순신과 진린, 송희립과, 등자룡의 동상을 찾아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병풍처럼 둘러친 콘크리트 외벽에는 정왜기공도권 등을 바탕으로 정유재란, 노량해전, 순천왜교성 등과 관련된 역사가 그림과 글로 새겨져 있어, 한 편의 기록영화를 보는 듯하다.


묘도 봉화산 봉수대는 조명연합수군의 ’레이더 기지‘


기념원에서 광양포 가는 길로 올라오면 좌측으로 봉화산 전망대 오르는 길이 나온다. 전망대까지는 850m 비탈길로, 승용차 두 대는 비켜 갈 수 있다. 조금 오르면 차를 5대 주차할 수 있는 주차공간이 나온다.

묘도 봉수대. 광양만 중심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봉화산 봉수대는 남으로 돌산의 방답진 봉수, 북으로는 순천의 성황산 봉수, 동으로는 광양의 건대산 봉수, 남해의 소흘산(설흘산) 봉수와 서로 상응하던 봉수이다. 지정학적으로 광양만 중심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묘도에서 명나라 진린 장군이 진을 쳤던 곳으로, 지명 이름이 현재도 도독마을이다

조명연합군은 이곳에서 서쪽의 순천왜교성을 바라보며 왜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했다. 조선 수군은 묘도 서쪽 광양포에 주둔하면서 현재 묘도대교 아래로 빠져나가려는 적들을 감시하고, 명나라 수군은 묘도 북쪽(현 도독마을)에 진을 치고 이순신대교 밑으로 빠져나가려는 왜군의 퇴로를 차단했을 것이다. 묘도는 정유재란 때는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과 충무공 이순신의 순국을 지켜본 살아있는 역사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묘도 서쪽 광양포 너머로 멀리 여수반도가 보인다. 순천왜교성은 광양 컨테이너부두 좌측 끝 지점에 위치해 있다

7년 전쟁의 종결 '노량해전'...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순천왜교성에서 조명연합수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한 유키나가 부대는 사천과 남해 등지에서 일본으로 철군을 준비 중인 왜군에게 가까스로 원병을 요청한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사천, 남해의 왜군들과 합세하여 유키나가 군을 구원하기로 마음먹고 11월 18일 밤 노량해협을 통과하기로 한다. 왜교성에서 오는 왜군과 자신들이 협공하면 조명연합군을 위기에 빠뜨릴 것으로 판단했다.

노량해전 당시 전투 지형도

이런 정보를 얻은 조명연합군은 18일 자정 노량해협 좌단의 하동 대도 인근에 명수군 400여척을, 남서쪽에 조선수군 60~80여척을 포진시키고 일본 군선을 기다린다. 19일 새벽 2시경 왜군 병선 300~500척이 노량에 진입하면서 즉각 교전이 벌어진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쟁, 노량해전이다. 밤새 이어진 교전과 육박전 끝에 일본 군선 200여척이 불에 탔거나 격침되었고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사진 위) 하동 대도에서 바라본 관음포. 좌측 끝에 노량대교가 보인다. (사진 아래) 남해 관음포의 장군 유언을 새긴 비문

승리의 막바지, 관음포에 큰 별이 떨어졌다. 이순신 장군이 적탄을 맞고 숨진 것이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유언은 오늘에도 후손들의 가슴을 묵직하게 파고든다. 이 해전에서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 10여명의 우리 수군 지휘부 장수들이 전사했다. 명나라 수군의 부총병 등자룡(登子龍)도 숨졌다.

관음포 인근 남해 충렬사의 이순신 장군 가묘. 장군의 유해는 관음포에서 잠시 초빈(草殯)되었다가 완도 고금도(묘당도)로 옮겨져 83일 후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운구됐다

요시히로는 군선 50척으로 퇴각했고, 유키나가는 밤새 이어진 양군의 교전을 틈타 묘도의 서쪽 관문을 통과해 남해 평산보를 거쳐 일본으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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