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앤지 Sep 09. 2024

어딘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야 할  그 사람.


초, 중학교 동창인 친한 친구 하나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졸업앨범을 찾아보더니 뜬금없이 졸업사진을 그룹챗에 보내기 시작했다.

만날 때마다 늘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쩜 너는 어렸을 때 그대로” 라며 우리끼리만 참 좋아하던 내 기억 속 친구가 이제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졸업앨범 속에서 파헤쳐져 나오니,


어머 얘들아, 우리 정말 용 됐다 야


일천구백구십구 년에서  21세기로 끌려 올라온 ‘아기아기’한 친구의 모습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같은 동창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끌어 올려진 그 옆에 다른 동문들까지 보게 되니 나이 마흔의 학창 시절의 추억을 고이고이 접어 놓은 어른의 눈으로 우리의 풋풋한 모습이 보이게 되었다.


내가 처음 전학 갔을 때  반장이라고 소개되었던 친구,  워낙 야무지고 똘똘해서 선생님들이 예뻐하는 게 티가 났고 동급생들 사이에서도 모범적인 친구였다. 그 당시에는 실시간 그 친구의 언행들을 가까이에서 접하다 보니 객관적인 느낌이 들기 어려웠는데 이번에 보니 단번에 보였다.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보이는 그녀의 똘망 똘망함이, 또래들에 비해 반짝이는 그 아이의 눈빛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찌 되었든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의 시선이어서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겠지만, 나의 지인이 아닌, 억지로 끌어올린 기억에서도 이제는 가물가물한 다른 학우들 중에서도 총명하고 빛나는 아이들의 눈빛은 분명 눈에 띄었다.


그 신기한 감상에 젖어 있다 문득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알 것 같은 참 괜찮았던,  다시 연을 이어갈 길이 없어 더없이 안타까운 친구들이  생각났다.




이해나

상계동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냈다. 성당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첫 영성체 교육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고 신청자들을 받아 평일 미사와 교리에 참석하고 기도문을 외우는 등의 수업을 받게 된다.

집에서 성당까지의 거리는 20~30분 정도로 기억하는데 그때 같이 교리를 받는 친구들 중 집 방향이 비슷한 친구들과 같이 다녔었다.  


나의 초등학교 기억은 4학년 이후 그러니까 전학을 가고 난 후로 다소 편향된 편이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 저학년 때는 친구 사귀는 방법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나의 성향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 여서 친구 다운 친구가 생기기 전이어서 그러지 않을까 싶다.  그 와중에 성당 교리를 위해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 굉장히 활발하고 인기가 많은 편이어서 그때 그 친구들을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 뒤에 슬쩍 합류했던 얌전하고 꽤 어른스러웠던 해나 있었다. 또래에 비해 체격이 좋고 까만 편이었던 해나는 발랄하게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나타내는 무리의 다른 애들과 달리 유난스럽지도 호들갑스럽지도 않게 그러나 한편에서 조용히 우리와 어울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인 나의 눈에 그런 해나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나는 그렇게 깨발랄들 속에서 같은 성향으로 존재감을 나타낼 정도의 적극적인 기질이 아님에도 그 아이들의 장단을 맞춰 주느라 어쩌면 나와 더 성향이 맞을 수 있었던 해나를 모른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해나는 내가 저 아이들보다 본인과 더 잘 맞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껴서 내 옆에 있어주었는데 나는 애써 밀어내며 상처를 주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활발하고 기 센 아이들 틈에서 동요되지 않고 자신의 성격을 지키면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해나,  항상 웨이브 진 머리를 풀고 양 옆을 귀엽게 묶은, 까맣고 동그란 반짝이는 눈빛이 선명하다.



공기미

내가 가양동에 있는 학교로 전학 갔던 당시, 가양동은 신도시 개발 계획이 한창이어서 우리가 이사하는 아파트는 물론 주위의 대단지 아파트들이 분양을 마치고 입주를 시작하면서 전학생이 각 반에 배정되어 첫인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새 전학생이 들어올 만큼 전학생이 기존학생들의 수를 넘어서던 시기였다.


그 혼돈의 틈에 고작 초등학교 3학년뿐이 안되던 아이들은 전학생은 전학생 대로 기존 학생들을 그들대로 참 혼란의 시간을 보냈었다.

그 와중에 안 그래도 내성적인 성격( 지금 생각해 보면)인 기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들이닥치는 전학생들에게 마음의 문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전학생들에게는 관심조차 없이 기존의 친구들하고만 얘기를 나눴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런데 유난히 하얗고 키가 크고 그리고 이름이 특이했던 기미는 멋모르는 전학생이 보기에도 눈이 띄는 아이였다.  내성적인 아이지만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었고 한 번씩 웃을 때면 작은 아가씨들의 첫째 언니 ‘메그’ 같은 온화하고 참한 이미지가 느껴졌었다.


전학생 입장으로 생존을 하기 위해 친구를 만들어어야 했고 나는 기미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인사도 할 의지가 없는 그녀에게 철판 깔고 다가가서 ‘친구 하자’고 친한 척할 만큼의 용기는 타고나질 못했기에 호의적인 친구들과 관계를 진전시킬 때 즈음 운동회 시즌이 되었다.


몇 번의 체육시간을 통해 나의 운동신경을 검증받았고 기미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체육인 꿈나무였다.

그래서 운동회의 꽃인 이어 달리기의 반 대표로 선발된 나와 기미 그리고 몇몇의 친구들은 학교 끝나고 나름 특훈을  했다. 선생님의 지도하에 한 것 같지는 않고 우리끼리 우승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차서 동네를 이어 달리면서 ‘훈련을 가장한 놀기’를 했던 것 같다.


친해지고 싶으면 함께 운동을 하세요~


우승을 꿈꾸는 초등학생 8명이 모여서 그 어떤 사적인 대화도 없이 냅다 달리기만 하는데 친해질 기회가 어떻게 있었는지 나도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가 연습을 하는 동선을 짜서 알려주는 부반장 남자아이에게서 리더십을 느끼기도 했고,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쉴 틈 없이 온 동네를 달려대는 우리들이 궁금한 동네어른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한 또 다른 멀끔한 전학생에게서  듬직함을 느끼기도 하고, 가진 동전을 탈탈 털어 같이 음료수를 사 먹으며 협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이유는 기억에 없는데 다른 애들이 음료수를 나눠 먹는 동안 뒤늦게 온 나에게 남은 음료수를 건네준 기미에게서 우리 관계의 시작을 느꼈다.  

아마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준비운동을 할 때나 체육시간에 밖으로 나갈 때 기미는 나를 챙기기 시작했고, 운동장에 서 있을 때 뒤에서 나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을 정도로 우리는 가까워졌다.


그랬지만 등하교가 친구를 사귀는 중요한 시간이었던 당시에 집 방향이 다른 우리는 학교에서 있는 시간 이외에는  교류를 할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기미는 소리소문 없이 전학을 갔다.


딱히 대단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은 교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싫어한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 것을 보니, 어렵사리 마음의 문을 열어준 기미의 진중함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작은 손짓으로 작은 몸짓으로 챙겨주던 그녀의 따뜻함을 그냥저냥 보내버린 것이 참 많이 아쉽다.




 그들의 기억에서의 나도 한 번쯤은 다시 보고 싶은 귀여운 친구였기를…

아무 교류 없이 지나 온 수십 년의 세월에 이제는 서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행색이어도  그 어디에선가 무엇을 하든 너의 모습으로 행복하길…

매거진의 이전글 왜 한국을 가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