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에 관한 명상>, 양선희 - 텍스트 분석
*양선희 시인의 <억압에 관한 명상>을 먼저 감상하신 후 읽어주세요.
양선희 시인의 <억압에 관한 명상>을 읽으면서 취업사진을 찍고 돌아온 날을 떠올렸다. 넉넉한 티셔츠에 민낯으로 생활하다 사회에 딱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하니 자석에 붙는 철가루마냥 코르셋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붙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여성 인권을 외쳐온 5년을 한 순간 짓물러버린 것만 같아 좌절감을 느꼈다. 약 30년 전에 발표된 이 시가 2020년을 살아가는 20대의 현실과 다르지 않음에 탄식이 나왔다. 따라서 본 분석을 통해 여성의 코르셋이 사회적 억압 그 자체로서 어떻게 작용해왔는지 살펴보고, 현대 사회의 탈코르셋 논의의 필요성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원피스, 슬립, 스타킹, 거들, 브래지어, 팬티, 화장한 얼굴까지, 여성이 문 밖을 나설 때 챙기는 족쇄의 수는 한 손에 꼽을 수 없다. 시인은 코르셋을 한 행에 하나씩 나열하여 제시함으로써 여성이 구겨 넣는 코르셋의 절차가 전혀 간단하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코르셋을 하나씩 벗어낸 화자는 얼굴에 붙어있는 화장을 지워내고 체액을 럭스로 씻어 흘려보낸다. 이때 시인은 ‘삶의 체액’을 씻어낸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여성에게 코르셋은 ‘삶’의 일부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코르셋을 전부 들어낸 후에도 화자의 전신에는 코르셋의 흔적이 남아있다. 일제히 부풀어 오른 빨간 살들은 피가 난 상처와 같은 색채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코르셋이 남긴 붉은 살은 여성의 삶에 사회의 억압이 남긴 상처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코르셋은 어떤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생각해 본다. 다리를 드러낼 수 있는 기장에 몸을 얇게 감싸는 원피스, 가슴과 유두의 존재감을 누르기 위해 덧대는 브래지어, 몸의 굴곡을 바투 잡는 거들과 스타킹은 모두 여성의 몸을 사회가 그리는 설계도에 맞출 수 있도록 짓누른다. 마치 구두에 발을 맞추는 전족처럼 정해진 틀을 온몸에 뒤집어쓴 듯한 모양새이다. 일각의 사람들은 ‘본인이 화장한 얼굴에 만족하고 원피스나 치마를 차려입은 맵시를 좋아한다면 이것이 과연 족쇄라 할 수 있나’라며 여성의 코르셋을 억압의 산물로 일반화하지 않을 것을 주장한다. 이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치마와 화장한 얼굴, 브래지어와 같은 딱 붙는 속옷은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무엇인가? 여성이 선호하기 때문에 스스로 이것들을 선택했다면, 선호하지 않는 여성은 이것들을 선택하지 않고 생활하는 데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파란색 옷을 좋아하지 않아 파란색 옷을 입지 않는 사람을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듯이 말이다. 또한 이것들이 여성에 대한 억압물이 아니라면, 남성이 화장한 얼굴과 치마를 선호하여 선택하고 외출했을 때 역시 어떠한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사회가 지금 이 억압물의 선택 가능 유무를 따질 수 있을 만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 이 시가 쓰인 1991년으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지금 2020년까지 한국 사회의 여성들에게 코르셋이 삶의 일부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최근에 들어 탈코르셋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실생활에서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장 코르셋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지기 어려운 여성 방송인들 중에서도 미약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특히 故 설리 씨가 ‘악플의 밤’ 프로그램의 첫 방송에서 한 발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브래지어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브래지어가 어울리는 옷이라고 생각하는 옷에 브래지어를 입고 있다. 그렇지 않은 옷에 브래지어를 입을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도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있다. 이 옷은 브래지어가 필요 없는 옷이다.”
대중이 선호하는 외모를 유지해야 하는 아이돌이라는 직업에 종사하던 설리 씨가 대중이 가장 많이 보는 TV 방송에서 옳지 않은 정설에 대해 논했다. 때문에 그녀의 발언은 한국의 탈코르셋 인식에 강렬하고 중요한 획으로 남았다. 그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차분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대중들에게 코르셋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성들은 그녀의 SNS에 ‘자유로운 여성’으로 살아주어 고맙다고 전했다. 여성들이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명상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그녀가 사회의 중심으로 끌어냈다. 온몸에 같은 상처를 가진 여성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이를 없앨 수 있다는 가능성에 눈을 떴다. 이처럼 여성의 목소리는 또 다른 여성의 용기가 되어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실천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SNS라는 창구를 통해 서로의 말을 더 잘 들을 수 있는 지금, 여성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성의 말과 글이 더 많이 양산되어야 한다. 양선희 시인이 30년 전에 쓴 이 시의 유통기한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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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전에 작성한 이 투박한 글을 지금 꺼내 올리는 데에 이유가 있다면 두 가지가 있겠다. 하나는 최근 여자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비정상적인 행태들을 보고만 있자니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내겐 새로운 글을 쓸 만한 여력이 여러모로 없기에 노트북을 이 잡듯 뒤졌고, 그나마 이 글이 가장 봐줄만했다. 이 글을 올리는 두 번째 이유이다.
*2020년 11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