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외롭다>, 김승희 - 텍스트 분석
비보가 계속 들려온다. 인간의 죽음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보통 이건만, 요즈음 들려오는 비보는 놀랍지 않다. “왜 그랬대?”라고 묻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가슴 한 구석이 하루 내내 저린다. 김승희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수도꼭지를 들고 다닌다고 물이 나오는 게 아니듯 희망을 희망하는 게 너무 외로웠다’고 적었다. 희망을 잃어가는 상황을 ‘희망의 빈혈’이라고도 이야기했다. 희망은 혈액과 같아서 사람을 살게 하고 부족하면 죽게 하는 것임을 말한다. 시집은 모든 시에서 내내 이 점을 강조하며 이야기한다. 반드시 필요한 그 희망을 얻기가 왜, 어떻게,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희망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허문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이 점이 이 시집을 선택한 이유이다. 취업을 앞두고 있어 “자신감을 가져라. 희망을 가져라.” 라는 수많은 조언들이 내게 쏟아지는 와중에, 이 시집은 희망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를 조명했기에. 그리고 결국은 모두 희망을 가진다는 뻔한 결말이 아닐 수 있음을 이야기하기에.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것은 자의가 아니었으며 우리 사회는 명백히 그 사람들에 책임이 있다는 것. 그 점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해주는 시인과 화자의 태도에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희망차게 살아라,라고 이야기하는 뜨거운 글들이 만든 아지랑이에 어지러웠던 사람이라면 김승희 시인의 차가운 위로에 잠시 쉬어갈 수 있을 것이다.
1부 中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꽃들이 반짝반짝했는데
그 자리에 가을이 앉아 있다
꽃이 피어 있을 땐 보지 못했던
검붉은 씨가 눈망울처럼 맺혀 있다
희망이라고……
희망은 직진하진 않지만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이 시는 희망을 수확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반짝반짝한 꽃을 피우는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맞이하자 화자는 검붉은 씨를 발견한다. 마침내 수확한 씨앗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있다. 씨앗의 검붉은 색은 씨앗을 얻어내기까지 흘린 피와 겪어온 어둠을 고스란히 담은 모양새이지만, 신의 물방울이 담겨 눈망울처럼 반짝이기도 하다. 눈망울과 물방울이라는 시어에서 드러나는 생명력은 희망이 우리 삶을 유지하도록 하는 생명력임을 잘 드러낸다. 또한 씨앗은 또다시 심어지고 길러져 꽃을 피울 수 있는 존재이다. 꽃이 피면 씨앗이 생기는 직선의 과정이 아닌 씨앗-꽃-씨앗을 반복하는 순환의 과정이다. 이를 통해 지금의 희망 역시 또 다른 희망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며 지금의 희망이 또 다른 개화의 과정을 지나 탄생할 것임을 예고한다. 이 시는 시집의 첫 시로 시인이 생각하는 희망의 근본에 대해 잘 드러낸다. 이후 시집은 검붉은 씨앗을 얻어내기 전 개화의 시기를 다루고, 미처 씨앗을 얻기 전에 스러진 생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2부 中 서울의 우울 4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없으면 자살로 본다,
법의 말씀이다
어느 자살도 깊이 들여다보면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너무 많다
심지어는 내가 죽인 사람도
아주 많을 것이다,
자기 손으로 밧줄을 목에 걸었다 할지라도
모든 죽음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안다
자살도 타살도
금환일식이다
법과 화자는 서로 다른 깊이로 자살과 타살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두 주체의 우위는 분명히 정해져 있다. 화자는 법의 ‘말씀’이라는 표현으로 화자보다 법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곧 사람보다 법이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법의 말씀에 비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타살의 증거가 드러나는 자살도, 심지어 내가 죽인 사람도 너무 ‘많다.’ 법의 말씀과 ‘많다’를 행갈이 하면서 두 입장이 더욱 대조된다. 자살을 가장한 타살과 그 피해자가 너무 많지만, 법의 말씀은 준엄하다. 이를 통해 화자는 말과 글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맞아 죽은 사람들은 법에 의해 자살로 결론지어지는 우리 사회, 서울을 비판한다. 또한 화자는 모든 죽음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결국은 법이 사실을 가릴 수 없음을 시사한다. 자살도 타살도 금환일식, 즉 달이 미처 태양을 다 가리지 못한 상태이다. 달이 태양을 가릴 지라도 남아있는 금환처럼, 법이 죽음을 가해한 사람을 완전히 가릴 수 없을 것임을 드러낸다. 얼핏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죽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얇은 금환이 남아 있다. 어두운 달그림자와 밝은 태양빛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 사회(법의 말씀)와 죽음의 진실을 표현함으로써 청자는 빛나야 하는 것이 어느 쪽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2부 中 서울의 우울 17
돌아와 옥중일기 같은 밤의 일기를 쓴다,
“내일의 빵으로 나는 살 수가 없다”는
랭스톤 휴즈의 말도 쓴다,
언제 오늘의 빵만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었던가,
언제나 내일의 빵이었다고 쓴다,
고치는 것보다 허물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오늘에
내일의 빵이 모든 희망의 할머니였다고 쓴다,
서울이여, 서울에서,
희망도 스펙이라고 쓴다, 지우고
희망은 오늘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외설이 되었다고 쓴다
서울의 우울은 이 시집의 연작시 중 하나로, 서울의 우울 17은 그중 마지막 시이다. 이 시에서는 이전 시들에서 세상을 향했던 화자의 시선이 내면으로 돌아온다. 앞선 시들에서 화자는 한강, 사법고시, 병원 등 우리 사회와 사람들을 나타내는 시어들과 데드 마스크, 어둠의 수족관 등의 절망적인 심상을 드러내는 시어들을 연결시키며 냉소적인 시선으로 서울의 절망에 대해 말했다. 그 후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온 화자는 자신의 일기를 옥중일기와 같다고 이야기하며 감옥에 갇힌 삶, 즉 희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화자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본인이 갖고 있는 희망의 허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에서 희망은 ‘내일’의 빵으로 표현되는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내일의 빵은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다. 화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내일의 빵을 스펙이라고 쓸 수 없어 지운다. 또한 ‘오늘’은 차마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없기에 입에 담기도 어려운 외설이라고 이야기한다. 희망은 언제나 내일의 것이기에 만져보지 못하고 오늘을 살아가면서 오늘을 살아내기 어렵고 허물어버리고 싶다고도 이야기하지만, 화자는 일기에 그 사실을 적을 뿐이다. 화자가 일기를 적는 시간은 내일로 가기 직전인 ‘오늘 밤’이다. 내일이면 빵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화자는 오늘을 허물고 싶은 마음을 일기에 적으며 감옥에서 나올 내일을 기다리며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의 우울 17의 화자의 삶의 태도가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삶의 태도와 닮아 마지막 시로 골랐다. 만져지지 않는 내일의 희망을 어쩌면 만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오늘의 절망은 글로 적어 견뎌내고 있다. 시인의 표현을 빌려 희망이 혈액과 같다면,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빈혈로 아주 고생하고 있다. 각자의 꽃을 피우며 핏빛 씨앗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외롭게 기다리는 동안, 나를 포함한 많은 생명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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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