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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밭농부 Dec 09. 2021

수확 후 찾아온 공허함

 삶을 뒤바꿔버린 용기 있는 도전

 한 달 동안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드디어 수확이 끝났다.  

 

 품절 소식에 고객님의 방문도 뜸해졌고 아르바이트생들은 다른 일을 찾아나갔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일가친척들로 붐비던 농장이  한산해지고, 열매와 잎들로 무성하던 나무마저 앙상해져 있었다.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을때 쯤 왠지 모를 쓸쓸함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첫 수확을 할 때만 해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햇볕이 따갑더니 수확이 한창이던 어느 날 난대 없이 서리가 내렸더랬다. 우리 농장은 하우스 재배라 서리를 맞지 않았지만 노지 농사를 짓고 있던 농작물들이 피해를 봤다는 소식들이 간간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날이 많이 쌀쌀해졌다. 날씨 탓인가? 내가 이렇게 쓸쓸한 게?


 우린 그렇게 성황리에 온라인 완판 신화를 첫해부터 이루었다. 한창 수확일 때는 너무 힘들어서 빨리 한 달이 지나가기를 바랬었는데, 막상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왠지 모를 공허함이 찾아온 것이다.

 다 땄고  다 팔았는데, 내 마음은 왜 이럴까.


  수확에 정신없이 바쁠 때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독서였다.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수확이 끝나자마자 나는 마음먹었던 대로 책을 왕창 주문해 쌓아 놓고 읽기 시작했다. 책이 너무 읽고 싶어서 한 권을 잡고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여러 권의 책을 여기저기에 두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댔다. 그렇게 나는 혼자 동굴 속으로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1년 동안 다른 곳은 보지도 않고 단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다. 나에게 주어진 사과대추 완판! 농장 브랜딩과 홍보 하나만을 위해 뛰었다. 이제 시작이지만 첫해부터 성적이 아주 좋았다. 가을장마로 수확량이 예년 같지 않았다지만 첫해부터 온라인 완판을 해냈다는 소식에 주변에서 많이 놀라워 하가도 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지만 나에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나는 꼬박 1년을, 잠도 못 자가며 새벽까지 노력해 온 일이었으니까.


 수확 후 찾아온 우울함이 낯설었지만 내 기분에 그대로 빨려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나에겐 우울해야 할 이유가 딱히 없었 행복을 마음껏 느끼고 싶었다.

  책에 빠져들었고, 수시로 멍해졌다. 머릿속 세포들이 잃었던 제자릴 찾아 헤매는 듯 시끄러웠다.


  지나온 어린 시절 생각부터 학창 시절, 그리고 농장 브랜딩에 힘써온 1년 전의 기억까지 모두 끄집어내 나의 시끄러운 머릿속을 다시 정리했다.


  나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왔는데 골인을 하자마자 멈추지도 못하고 계속 달리고만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분명한 건 이제 가고자 하는 방향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그때서야 공허함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며 달려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완판이 아닌 그 뒤에 있을 더 큰 목표를 향해 뛰어야 했다. 멈추지 못하고 행선지를 잃어버린 나는 제자리에서 맴돌고만 있었다. 멈추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쩌면 달릴 때의 쾌감을 더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멈추고 난 후 무언가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시끄러운 머릿속에 저항하며 내달리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한 달여의 동굴생활 끝에 아니 아직 끝난 건 아니기에 끝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한 달여의 동굴생활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잠시 쉴 수 있었고, 내가 잠시 멈추어도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며 다시 방향을 잡고 일어서 걸을 용기를 다시 얻을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동굴 속에서 지내며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하나 얻을 수 있었는데 '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목표를 향해 노력할 땐 놀랄만한 일들이 일어나더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엔 놀랍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다시 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매 순간의 행동이 거창할 필요도 없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정말 새삼스럽게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책을 읽으면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는 느낌이 든다.  모래가 가라앉고 있던 흙탕물을 다시 누군가가 휘젓는 느낌이 드는데 겨우 내려앉던 모래알이 다시 휘몰아친다. 하지만 그렇게 한바탕 휘몰아치던 머릿속은 내가 읽은 책들 덕분에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 전보다 더 영리해진 느낌으로...


" 수정아, 지난 1년 동안 엄청 많이 성장한 거 알고 있어? "


사과대추가 한창 수확 중이던 10월의 어느 날, 그날도 정신없이 바쁘던 때였다. 옆에서 함께 선별작업을 하던 신랑이 내게 말했다.

" 수정이는 알지 모르겠는데  그동안 참 많이 성장했어 "


" 그래 맞아 ! 나 많이 성장했지."


 내가 무언가 대단해진 건 아니지만  나는 분명 성장했다.

1년 전의 나와는 사뭇 다르게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귀농이란 건 인생을 통째로 뒤바꿔버리는 엄청난 결심과 도전이다.


그래 ! 우리 둘 다 그걸 해냈잖아.


피곤한 작업 중에도 머리가 맑아지는 순간이다.

"완판이 별거야? 그게 아니라 우린 그보다 더 대단한 '도전'을 해낸 사람들이라고."


 첫발을 내딛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내가 해낸 건 단순한 완판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세아 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나를 깨고 나오는 게 무척 힘이들었다.  그사이 나는 이미 많이 자라 있었다.


고객님들과 이웃님의 칭찬만큼 나는 나 스스로를 더 칭찬해주기로 했다.



  내 머릿속을 방황하던 모래들은 이전과 비슷하기도 하고, 사뭇 다르기도 한 새로운 꿈의 모양으로 모래성을 다시 지었다.


  평생 회사원으로 화이트 칼라로 살아온 신랑이 요즘엔 농장에서 울타리 말뚝을 박는다.

신랑이라고 마냥 후련하기만 할까,


나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신랑에게 문자로 보내본다.


" 하루 종일 회사일만 생각하던 사람이  스스로의  성장에 오롯이 몰입했을 때 무얼 해낼 수 있는지 이제 보여줄 때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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