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선택의 연속이라 했던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죽을 만큼 힘들었고 나쁜 선택도 여러 번, 결국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며 상간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진행했다. 그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나는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던 그날, 나는 이혼을 선택했다.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여자 문제는 못 참는다던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이혼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호기롭게 외치던 그때와 달리 몇 달의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선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아직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자녀들이 있었다. 첫째는 아직 유치원도 아닌 어린이집을 다니는 다섯 살이었고, 둘째는 이제 막 돌을 지난 시점이었다. 어릴 적 자식 때문에 산다던 부모님의 말씀이 너무도 듣기 싫었는데 이제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새벽마다 들려오는 고성 소리에 할머니에게 안겨 그 자그마한 몸을 부르르 떨며 불안해하던 다섯 살짜리 첫째는 이제 열 살이 되었다. 지금은 우리 부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중재를 하거나, 밖으로 가족 외출을 할 때면 사이좋아 보이도록 손을 잡으라고 시킨다거나 심지어 뽀뽀도 해보라고까지 한다. 돌을 갓 지나 걸음걸이가 엉성했던 둘째도 7살이 되어 얼마 안 있으면 학교를 갈 준비를 한다.
이 두 녀석만 생각하면 그때 이혼에서 함께 노력하기로 선택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늘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 일요일 낮.) 옆에서 아빠와 꺄르륵 거리며 웃고 있는 두 녀석을 보니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실로 들어오는 햇볕처럼 따스하고 편안하다. 그때는 정말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남편에 의해 죽었고 몸과 마음은 다시는 녹지 않을 것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혼을 하겠다고 먹은 마음이 흔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에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 이혼을 하자고 엄포를 놓았다. 합의 이혼서를 작성하여 그에게 내밀기도 여러 번. 그때마다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때 그는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늘 나를 위해 한번만 더 노력해보자 했다. 그때는 그게 의아했지만 지금은 참 고마운 말이다.
이혼을 하든, 우리 부부와 같이 함께 노력해보기로 선택을 하든 그 어떤 선택이든 나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되도록이면 아주 천천히 결정을 내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배우자의 외도를 안 순간 우리의 감정은 깊은 소용돌이 속에 빠져 이성적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즉흥적이고 순간의 감정으로 내린 선택은 운이 좋아 옳을 수도 있지만, 큰 후회를 가져다 주기 마련이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시간을 주었다. 처음 내가 이혼하자고 했을 때는 지금은 너무 감정이 격해있으니 좀 더 시간을 달라고 했다. 자신에게 충분한 화풀이를 하라며 분이 풀릴 때까지 밤낮으로 나의 폭언과 폭력을 다 감내하였다. 그렇게 나의 분한 감정을 다 토해내고 나서도 이혼을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래 주겠노라 약속을 했다.
그리고 내가 두 번째 이혼자고 했을 땐, 우선 입원 치료부터 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는다며 나를 달래었다. 내가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아이들을 보육할 사람이 필요했으니 그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입원을 하는 동안 남편과 어린 자녀들과 떨어져 나만의 시간을 갖다 보니 나의 화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앞에 글에도 썼듯이 남편이 보고 싶어 지는 순간이 있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과 매일 상담을 하면서 나와 우리 부부에게 직면한 문제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고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란 원망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구나’로 바뀌면서 격했던 감정들이 조금은 옅어져 갔다.
상간녀 소송을 진행하면서 증거자료를 보게 되면서 그간 잘 참아왔던 감정이 또 폭발하던 때에 나는 세 번째 이혼을 요구했다. 처음 판도라의 상자를 연 그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때도 남편은 우선 소송이든 뭐든 상간녀를 찾아가 폭로를 하든 말든, 모든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고 했다. 소송이 모두 끝난 다음에 이혼하자고 하면 이번에는 반드시 해주겠노라고 말이다. 살이 급격하게 빠지면서 체력도 바닥이 나 있었고, 소송을 진행하면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여전히 난 아이들을 돌봐줄 여력까지는 없었고,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
500만 원 도 힘들 거라던 변호사들의 말과 달리 1,500만 원의 위자료를 받고 소송이 끝난 후, 나는 예정대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도 이젠 더 이상의 핑계는 없었는지 순순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내심 이번에는 진짜 이혼하는 것인지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남편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집 문제와 아이들의 양육에 대해 진지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남편과의 합의 이혼을 위한 대화를 하면서 나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직은 어리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에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또한 남편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대학 병원에서 퇴원은 했지만 나의 몸 상태는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여전히 약의 도움이 없인 단 한숨도 잘 수 없었고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경제적 상황이었다. 우리에게 아파트 한 채가 있었지만, 아직 갚아야 할 대출금이 많았다. 이번 일로 남편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입원 치료를 받기 전 나는 수없이 응급실을 들락날락거렸으니 말이다. 나 또한 회사를 제대로 나가기가 만무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혼 후 많은 여성들이 극빈층이 된다는 어느 변호사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특히나 남편이 외도를 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혼 후 양육비나 생활비를 제대로 줄리가 만무했다. 제대로 준다고 해도 가계가 둘로 나눠지면 지금의 수입보다는 적은 금액을 줄 수밖에 없다. 버는 돈보다 갚아야 할 돈이 많은 우리에겐 이혼은 너무도 어려운 현실이었다.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쭉 일을 해 온 나도 이런 경제적인 문제에 맞부딪히는데 경력 단절된 전업주부들은 어떠할까. 금수저 집안의 2대, 3대라면 모를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나에게 제시한 것은 집 대출금을 다 갚을 때까지만이라도 이혼을 미루자는 것이었다. 이제는 남편이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다 핑계임을 알았지만 나 또한 알면서 모르는 척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홀로 어린 두 자녀를 키워야 하나는 두려움은 너무도 컸다. 더욱이나 온전하지 못한 정신 건강과 몸으로 말이다.
이런 대화들이 오가면서 시간도 함께 흘러갔다. 나는 여전히 일주일 간격으로 병원을 가서 상담치료를 받아야 했고, 그때마다 남편은 동행해 주었다. 상담 치료가 끝나면 몸의 기력 회복을 위해 좋다던 한의원도 데려가고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치료를 핑계 삼아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 걷기도 하였다. 스무 살 어린 시절 그와 첫 연애를 한 이후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도 결혼 후 처음이었다. 얼굴만 보면 늘 싸울 것만 같았던 우리는 이제 마주 보고 제법 웃음을 짓기도 했다.
다시 남편과의 평온하고 따스한 관계가 지속될 때마다 가슴 한편은 못 견디게 아파왔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지금 난 얼마나 행복할까’하면서 애써 상처를 끄집어내서 곱씹고 또 곱씹었다.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도 자주 가게 되었다. 그때마다 밖에서 마주치는 많은 연인들, 부부, 가족들을 보면서 또 아파했다. 저들의 행복이 나에게는 너무 먼 남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정말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내들을 볼 때면 ‘저 남편도 사실은 다 바람을 피우고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바라고 또 바라였다. 얼마나 못된 마음인가.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갈 때 즈음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일은 지울 수도 바꿀 수도 없지만 현재는, 그리고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다. 그 누구의 영향도 입김도 아닌 내 선택으로 말이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기분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회식한다던 남편이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을 때나, 미운 행동을 했을 때, 다른 이유로 부부싸움을 했을 때 과거의 절망적인 기분들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때면 행복은 개뿔, 한번 깨어진 유리그릇은 붙일 수 없다며 집을 뛰쳐나오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홀로 눈물을 삭히며 이번엔 반드시 이혼하겠다 다짐하던 나였다.
불륜을 들켰던 수년 전처럼 남편이 늘 죄인처럼 먼저 사과하고 다가오는 일도 없었다. 나는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아직 용서를 하지 못했는데 남편은 이미 용서받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기분이 나쁠 때면 그마저도 꼴 보기가 싫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순간의 감정이다. 나는 오늘을 행복하게 살기로 선택했고 행복한 오늘이 모이면 나의 과거도 현재도 다가올 미래도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매 순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선택은 남편, 아이들이 우선이 아닌 나를 중심으로 하였다.
내가 선택은 내가 중심이 되었다. 내가 기분 좋은 것. 내가 먹고 싶은 것. 내가 갖고 싶은 것. 내가 사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입고 싶은 것. 내가 배우고 싶은 것.
그랬더니 놀랍게도 위기가 올 때마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선택하니 한결 쉬워졌다. 나는 나를 위한 인생을 살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몰라보게 달라졌다. 세상이 버거운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 것이 아니라 조금씩 설레고 즐겁기 시작했다. 내 모든 신경과 관심을 남편과 아이들이 아닌 나에게 집중함으로써 쓸데없는 감정이나 잡생각들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배우자의 외도는 내가 선택해서 온 결과가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의 내 감정을 떠올려보라. 충분히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지옥 속에 남기를 선택한 것은 아닌지. 자신을 아껴야 한다. 누구보다 사랑하고 연민을 느끼고 보살펴야 한다.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빨리 그 안에서 나올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타인에 의해서지만 그 속에 머물기를 선택한 건 나 자신이다.
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현재 나의 기분에 충실하고 즐기려 하니 자존감도 같이 높아졌다. 나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이 모든 것을 다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이 것은 그 누군가가 나에게 주고 베풀어서 생기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오롯이 내 자신이 나에게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위한 삶을 살다 보니 아이들도 남편에 대한 것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나의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고 회복돼 갈수록 아이들을 온전히 돌볼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또 다른 기쁨이 생겨났다.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존감이 높아지니 남편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지 않아도 날 버릴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남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나는 충분히 매력 있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