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노키옥 Dec 14. 2021

15. 시행착오

이혼하지 않고 부부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을 해 보겠다 다짐했던 순간, 우리 부부는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둘만의 노력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나는 마음에 평온을 얻은 것 같이 괜찮다가도 고장 난 기관차처럼 폭주하기를 반복하였다. 나 스스로도 어떠한 순간이 나를 화나게 하는지 알 수 없던 때였다. 그래서 남편이 찾은 것은 유명하다는 부부상담소였다. 거액을 주고 시간 예약을 잡고 아이들을 엄마에게 맡기고 우리 부부는 그곳을 찾아갔다.


문을 들어서자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학원처럼 문이 닫힌 방들이 여러 있었다. 직원이 몇 가지 간단한 설문지를 주어 작성하였다. 그리고 조금 기다리니 직원이 여러 개의 방 중 한 곳으로 우리 부부를 안내하였다. 정장 차림에 밝게 염색한 단발머리를 한 여성이 웃으며 우릴 맞이해주었다. 상담사는 설문지를 토대로 우리 부부 이야기를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과정들과 조금은 낯부끄러운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예를 들면 부부관계 횟수라던가...

그리곤 남편을 먼저 내 보내고 나를 상담하였다. 그리고 매주 한 번씩 상담을 하면서 나에게 어떤 미션 같은 것을 내려준다고 하였다. 처음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자신을 믿고 따라오라고 했다.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하면 부부관계는 절로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 십분 남짓 나의 상담이 끝나고 이번에는 남편이 상담사와 개별 면담을 시작했다. 그렇게 오십여분이 흐르고 마지막으로 우리 둘에게 지금 상담을 마치고 나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미션을 알려주었다.


한 시간에 육십만 원의 상담사가 내려준 첫 미션은 지금 이곳을 나서자마자 남편이 아내에게 가장 야한 속옷을 사주라는 것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남편은 이 미션에 진심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된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하지만 남편은 상담으로 지친 나를 이끌고 근처 속옷 매장을 검색하여 그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상담소가 있던 곳은 서울 가장 번화가에 위치한 곳이어서 다행히도 주변에 2층짜리 건물의 큰 속옷 가게가 있었다. 남편 머릿속엔 이미 야한 속옷을 입은 내 모습이 상상되고 있었는지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것저것을 내게 들여보이며 뭘 입고 싶으냐 물었다. 나는 그냥 아무거나 사고 가자고 했다. 그렇게 속옷 한 벌을 사고선 남편은 근처 맛집을 검색하여 이쁘고 맛있는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사실 나는 상담사와의 시간보다, 야한 속옷을 고르던 시간보다 식당에서의 식사 시간이 더 좋았다. 그날이 평일 낮이었는데도 식당에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테이블 위에는 작고 예쁜 생화가 다 놓여 있었고, 식탁보와 그릇, 잔까지도 너무 예뻤다. 예쁜 그릇에 담긴 음식 또한 너무 맛있었다. 입맛을 잃었던 난 처음으로 반 정도 되는 양을 다 먹었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서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음식을 다 먹고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 위에 과일과 꿀이 올려져 있었고 달달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를 보며 남편은 어쩌면 이 상담을 계속해야겠다 생각한지도 모르겠다.


한주가 지나고 우린 두 번째 상담을 갔다. 이번엔 날 먼저 상담실로 데려갔다. 지난번 내 준 미션을 잘 수행했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 여부를 물었다. 첫 번째 상담이 우리 부부 사이의 있었던 일들을 파악하는 정도였다면 두 번째 상담은 그나마 조언 아닌 조언을 해주었다. 배우자의 외도를 겪고 상처 입은 아내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선 글에서 나도 말했듯이 당연한 결과였다. 상담 공부를 하지 않은 나조차도 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런 아내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난 알 수 없었다. 그 당시 난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어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담사의 대답은 성형이었다. 아내들이 자신의 모습을 한 껏 꾸미려, 여자로서 떨어진 자존심을 세우려 성형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곧 후회로 다가오고 혹여나 수술이 잘못되거나 자신이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한다면 더 큰 불행을 초래할 것이라 말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주의해야 할 사항은 성형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비용으로 꾸준히 상담을 받게 되면 자존감은 저절로 회복이 된다 말하며 웃는데... 다른 것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웃을 때 하얀 이에 붙은 빨란 립스틱 자국은 참 잊히지 않는다.


두 번째 상담이라 조금 저렴해진 한 시간 상담료 사십오 만원의 상담사가 내려준 두 번째 미션은 매일 밤 속옷도 걸치지 않은 채 나체로 잠들라는 것이었다.


유명하다는 곳이니까, 당분간은 열심히 하자고 나를 설득하는 남편. 그날 밤 남편은 아이들을 장모님께 맡기고 오랜만에 둘이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물론 상담사가 내려준 미션대로 말이다. 야한 속옷보다는 미션이 나았다 느껴졌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포근한 이불 사이로 들어가 자는 것은 생각보다 편안하였다. 하지만 딱 일주일 만이었다. 다음 상담하러 가면 또 다른 미션을 줄 테니까.


우리는 그렇게 한 주를 또 보내고 세 번째 상담을 갔다. 그것이 그곳에서의 마지막 상담이었다. 그날은 모든 미션에 열정적인 남편과는 달리 시큰둥한 날 호되게 몰아세우며 상담사는 큰 소리를 냈다. 내가 거금을 주고 왜 이런 사람에게 이런 대우까지 받고 있어야 하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상담사는 이곳의 원장과 자신이 세운 플랜이 꾀나 그럴듯해 보이게 설명을 하며 다시금 나를 설득했다. 다른 부부 이야기를 하며 적극적인 태도일 때 효과가 좋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아주 크나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남편의 외도로 어려움을 겪고 부부관계 회복을 위한 이 플랜을 세운 원장이 사실은 이혼했다는 것이다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이 상담소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아니, 처음부터 신뢰 따위는 없었을 테지만.


나의 상담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신랑이 들어갔을 때, 첫날 설문지를 건네주던 직원이 나에게 차를 건네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상담실 안에서 큰 소리가 났기 때문에 나의 표정을 보며 눈치를 살피느라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직원에게 이곳 여자 원장님이 이혼했다는 게 맞냐 물었고, 그 직원도 그 사실에 당황했는지 이혼을 했다 말했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 때문이 아닌 일 때문에 이혼을 했다 핑계를 댔다. 남편의 외도를 겪고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내고 많은 부부들을 위해 상담을 시작했다는 그 유명하신 원장은 내가 세 번의 거금을 내며 상담을 가는 동안 단 한 번도 볼 수가 없었고, 그녀에게 모든 걸 전수받은 붉은 립스틱의 수제자 상담사는 자신의 감정도 잘 컨트롤하지 못하는 초보자였다.


그렇게 세 번째 상담도 사십오 만원을 내고 세 번째 미션, 나에게는 마지막 미션이 내려졌다. 그것은 집에서도 편안한 옷이나 편안한 차림 말고 불편할 정도로 딱 붙거나 외출복을 입고 풀 메이크업 상태로 집에서 일주일간 생활하라는 것이었다.


남편에게는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안에서 나에게 큰소리치던 상담사 소리를 밖에서 들었던 터라 그도 더 이상 나에게 상담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곳에서 우린 거금 백오십만 원을 삼주만에 쓰고 별 이득 없이 나오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돈으로 좋은 음식을 먹고, 예쁜 옷을 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 사이가 별로 나아지지 않자, 남편은 또 폭풍 검색을 해서 두 번째로 유명하다는 상담소를 찾았다. 그곳은 남자 원장이 직접 상담을 진행한다며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더 시도해보자고 했다. 싫다고는 했지만, 어느 날인가 그는 나에게 둘이 데이트를 가자며 그 상담소로 나를 데려갔다. 처음 갔던 곳과는 달리 그곳은 남자 원장님이 우리를 직접 맞이해주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매뉴얼대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 남편은 사실 우리가 이곳 말고 유명한 쌍두마차로 불리는 곳에 갔다가 큰 실망만 하고 왔다고 했다. 몇 번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역시 경쟁업체라서 그런가 남자 원장님은 그곳이 어딘지 바로 말해주었다. 그리고 남편의 외도로 본인은 이혼했다는 원장의 이야기까지 알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의 이야기, 아니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기보단 자신이 하고픈 말이 많은 것 같았다. 결국엔 자신의 자랑을 쭉 늘어놓더니만 상담료에 대한 설명을 했다. 완불을 해야 상담을 시작할 수 있으며, 자신은 아주 바쁜 사람이라고 했다. 유명한 그룹의 사모님, 연예인 등 알만한 사람은 다 자신이 상담을 해주었다고 했다. 상담을 받자는 남편을 뒤로한 채 난 그대로 그곳을 나와버렸다. 허겁지겁 뒤따라 나온 남편을 향해 난 말했다.


“됐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내 말에 남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신나게 근처 맛집과 예쁜 카페를 검색했다. 그리고 지난번보다 더 좋은 곳으로 날 데려가 주었다.


물론 모든 상담소가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방송 몇 번으로 유명세를 탄 곳은 아닌가 겉치레만 좋은 빈 수레는 아닌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상담비용은 생각보다 싸지 않다. 비싼 값을 치를 만한 가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고작 두 군데를 갔다 오고서 모든 상담소를 나쁘다 말하는 건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다. 판단은 스스로의 몫이다.

나는 다만 그 기회비용을 다른 곳에 쓰는 것이 좋다 몸으로 느낀 것뿐이다. 나에게는 우리 부부에게는 그 방법이 더욱 좋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한 번씩 부부만의 시간을 가지고, 요즘 젊은 커플들이 많이 간다는 핫 플레이스도 가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밝게 웃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보면 나도 그냥 평범한 일상 중에 하루를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이 든다. 적지 않은 돈을 버리고서야 얻은 것은 소소하지만 작은 삶 속에서도 내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충분히 괜찮은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과의 데이트가 생각보단 거북스럽지 않으며, 연애 시절처럼 손도 잡고 길거리를 걷게 될 수도 있으며, 남편을 향해 작은 미소는 지을 수 있는 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어떤 미션 같은 것도 용서하기 위한 노력도 이해해보려 죽을 만큼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냥 하루를, 그 순간에 느껴지는 진심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하루 중 단 일 분만이라도, 다음날은 오 분만이라도, 또 그다음 날은 십 분. 그렇게 조금씩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14. 선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