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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키옥 Jan 12. 2022

18. 맞바람

남편과 크게 다투고 난 후 어느 날이었다.

나의 지속적인 의심과 분노에 지친 그가 더 이상 어떻게 더 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우리 사이가 정말로 끝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병원에 입퇴원 후, 통원치료를 받으면서 의사 선생님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감정이 격해질 때 우선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반복되는 악순환에 나 자신을 들여놓지 말란 것이다. 남편과 다투고 난 뒤 난 차 키를 들고 무작정 나왔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도 말씀이었지만, 난 더 이상 아이들 앞에서 더는 싸우기가 싫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부부싸움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와 공포인지 내가 경험해 봐서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보통은 집 근처를 걷는 걸로 그 환경에서 벗어났었지만,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껴졌던 때는 집에서 아니, 남편에게서 되도록이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무작정 차를 끌고 가다 보니 어느새 고속도로까지 타게 되었고 내비게이션 없으면 어느 곳도 갈 수 없는 길치인 나는 그냥 무작정 앞으로만 나아갔다. 막히지 않은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 저 멀리 휴게소가 보였고 나는 그곳으로 가 차를 세웠다.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마음이 편안하였다. 싸워도 갈 곳 없는 나에게 어느새 차 안은 나만의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남편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결혼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이혼도 간절했다. 나의 분노와 슬픔, 격한 그 모든 감정들을 당연히 남편이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내가 이렇게 아픈 거니까. 남편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싸움에 더는 자신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잘못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앞으론 달라질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때의 난 달라질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한번 깨진 신뢰는 다시 쌓을 수 없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막상 포기하는 남편 모습에 서운했다. 붙잡고 싶었다. 다시 이전처럼 매일 노력하는 모습을 내게 보인다면 나도 조금은 노력해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나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더 향하는지, 원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휴게소에 멈춰 서서  참을 멍하니 생각을  , 근처 호텔을 찾아보았다.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생애  가출이었다. 되도록이면  자신이 초라하지 않게 최고급 호텔이어야만 했다. 내부 인테리어가 독특하고 예뻐서 인플루언서들에게 핫한  호텔을 예약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예약도 어렵지 않았다. 목적지 없이 달리던  내비게이션을 켜고 호텔로 향했다. 무사히 호텔에 도착해 방으로 들어갔다. 널따란 창문 밖에는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때문에 시야가 흐렸지만 한강과 다리 위를 지나는 차들이 보였다.


‘지금 내 마음과 똑같네…….’


처음엔 조금 보였던 차들이 조금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모습을 사진을 찍어 나의 sns에 사진 한 장 올려놓고 핸드폰을 꺼두었다. 늘 갖고 다니던 가방 안 노트와 펜을 꺼내 들고는 생각의 흐름대로 이것저것 흘겨쓰기 시작했다. ‘이혼, 결혼, 아이들, 엄마, 언니, 친구들, 이혼녀, 시부모님, 홀로서기,  경제적 독립, 죽음, 자살, 살자,…, 바람, 외도, 복수, 용서, 맞바람’ 등  내 안에 떠오르는 모든 단어들을 적었다. 그렇게 한참을 시간을 보내다가 욕조에 물을 받고 반신욕까지 하였다. 이왕에 여기까지 온 이상 누릴 건 모두 누리고 가겠다 생각했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니 나쁜 노폐물과 땀과 함께 나의 어지러운 감정도 어느 정도 빠져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흥분했던 나의 감정이 차분해 짐을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있다가 나와 아까 적어놓은 노트를 들어 올려 다시 읽어보았다. 그때 마침 머리카락에서 똑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한 글자에 떨어져 번졌고 나는 그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한 참을 생각하다가 ‘맞바람’이란 것을 알았다.


맞바람.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형벌 같았다. 예전에 부부 심리상담을 갔었을 때 상담가가 말했다. 아내들이 외도에 빠지는 이유 중 가장 큰 하나가 남편의 외도에 대한 배신감으로 맞바람을 피는 경우가 많다고 말이다. 그 당시엔 어떻게 똑같이 그럴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며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맞으니까.


하지만 스무 살부터 한 남자만 줄곧 만나 연애하고 결혼한 내게 찾아갈 전 애인이 있을 리 만무하고, 드라마처럼 아이 둘 딸린 아줌마를 좋다고 쫓아다니는 총각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이런 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만나는 거지?’ 참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친구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너도 가정 있고, 나도 가정 있지만 서로 만나볼래?’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놓고 이렇게 만남을 이어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상간녀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보통 정신머리론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루 마음을 정리하고 다음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정한 나의 마음은 ‘그가  하든 상관 말고  삶에 집중하자였다. 사실 결론을 내지 못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할지 이혼해야 할지. 그래서 어느 쪽으로든 선택을 굳히면 반드시 후회할  같았다. 그래서 그때 나가 결심하고  것은 남편이  삶의 중심이 아닌  스스로의 삶을 살아보자 였다. 나에게 집중하다 보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믿어도 나는  자신을 믿었으니까.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것이다.


아이 둘 출산 이후 그 어떤 노력을 해도 빠지지 않던 몸무게가 남편의 외도로 인해 쭉쭉 빠져나갔다. 다시 아가씨 때 몸무게인 40킬로그램 대로 돌아서면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사람들에게 예쁘다, 지금이 너의 최고 리즈인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런 나를 두고도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자존감이 떨어진 나에게 다른 이들의 시선과 말은 큰 용기가 되어 주었다. 다시 난 화장을 곱게 하고 나를 가꾸는 데 시간을 보냈다. 정신이 반쯤 나갔을 때 싹둑 잘라버린 머리카락도 거금을 주어 붙임머리를 하여 긴 웨이브 머리스타일을 얻었다. 남편이 있든 없든, 아이들이 있든 없든 하고 싶은 대로 살자, 딱 두 달만 그렇게 해보자 마음먹었다. 예쁘게 차려입고 내가 좋아하는 호텔 높은 층에 있는 뷔페에 가서 홀로 식사도 하고 그 옆 와인바에서 맛있는 칵테일을 마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진을 찍어 나의 sns에 올렸다. 어떤 날이면 남편은 내가 홀로 호텔 와인바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알고 허겁지겁 택시를 타고 달려온 적도 있었다. 나는 내가 그에게 집중하는 대신 그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너무도 좋았다. 은근 그러한 상황들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나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때, 정말 거짓말 같게도 오래전 잠깐 알고 스쳐갔던 남자에게서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한 대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그 사람은 나보단 나이가 많았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나의 sns 사진을 보았노라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나를 걱정했다. 그다지 친분이 있지도 않고 이름과 나이, 직업 정도만 아는 사이에서 ‘네. 남편이 바람 폈거든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냥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시기라 가족들을 놓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려 하고 있다는 정도만 이야기했다. 그렇게 그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통화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음악을 전공한 그는 나를 위한 나만의 테마송을 만들어 녹음해 보내주기도 하였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을 위한 음악이 있다는 것이. 그는 자신이 주말마다 친구들과 공연을 하는 한 재즈카페에 나를 초대했다. 몇 번을 고민하다가 나는 남편과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나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다. 가정을 유지하며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그대로 해주겠노라고. 혹은 가정을 떠나 자신과 함께 한다고 하면 그 어디라도 함께 가겠다고.


예전 호텔에서 적어놓았던 메모가 떠올랐다. 맞바람.. 내게는 일어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정말 거짓말 같게도 그런 일이, 기회가 생겨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당시 내가 올렸던 피드들은 ‘나 외로워요, 나 오늘도 혼자예요, 누가 나를 좀 위로해주세요’라는 메시지가 가득했다. 물론 사진 한 장 딸랑 올리고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지만, 사진들만 봐도 느껴졌다. 평소 나를 눈여겨보았던 사람에겐 나의 이 빈틈이 보였으리라.


이 빈틈이 어디 그 사람에게만 보였을까. 대학 동창이었던 남자 사람 친구 녀석도 수년만에 내게 연락을 했다. 나와 동갑인 그 친구도 미혼이었는데, 나와 남편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예전 연애를 했을 때도 남자 친구가(지금의 남편)이 나를 너무 귀하게 여기지 않은 것 같다며 세상엔 좋은 남자 많다며 헤어지라고 권유도 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도 내게 고백을 해 왔다. 정말 거짓말 같게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편에게 멋진(?) 복수를 할 기회가 나게 찾아왔지만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 어떤 사소한 대화라도 연락하지 않았다. 내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었고, 나의 아이들에게 떳떳하고 싶었다. 맞바람을 피면 그것은 또다시 무기가 되어서 나에게 날아와 생채기를 남길 것을 알기에… 고통과 후회, 절망뿐인 그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할수록 내가 얼마나 멋진 여성이고 매력적인 사람인지.. 무엇보다 내가 나에게 집중하여 보내는 작은 시간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았기에 그 소중한 시간을 남편도 아이들도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겐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가끔 그때 내가 그 두 사람 중 한 명과 만났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역시나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나는 그때의 내 선택이 옳았고 후회하지 않는다.


수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적어도 이주일에 하루는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낸다. 홀로 영화도 보고, 예쁜 카페에 가서 책도 보고 차도 마시고, 핫하다는 곳에 가서 최고급 요리를 먹는다. 그 과정에서 일상에서 남편과 아이들, 회사에서 일로 치인 감정들을 치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딱히 하는 것도 없다. 나에게 쉴 시간을… 잠시만 홀로 있을 시간을 주는 것뿐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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