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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키옥 Feb 14. 2022

20. 선택

이전의 글들은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고 내가 겪었던 혼란, 좌절, 분노, 슬픔, 포기, 집착 등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제부터는 내가 그 지옥 같았던 시간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포용해줄 만큼 넓은 아량을 가진 이도 아니다. 내가 남편의 외도를 용서하고 다시 행복한 부부관계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선택’, 단지 난 수많은 것들 중에서 내가 받아들일 것을 선택한 것뿐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뭘까’, ‘어떤 선택을 해야 내가 행복해질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지’. 모든 선택에는 오로지 나만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도, 남편과 아이들, 엄마도 아닌 철저하게 이기적일 정도로 나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생각했다. 내가 행복해야 나의 주변 사람들도 행복하다. 주변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기 위해 싫은 데도 참고 희생하며 나를 낮출 필요는 없다. 행복에 있어서만큼은 이기적이어도 좋다. 나를 위한 선택에 집중해라. 오직 그뿐이다.


그동안 나는 어릴 적부터 ‘언니에게 양보해주다니, 착하네’, ‘말끔히 정리했구나, 착하네’, ‘안 깨웠는데도 일찍 일어났네, 착하다’, ‘넌 참 마음씨가 고은 것 같아, 고마워’ 등의 말들을 듣는 것이 최고의 칭찬이라 여겼다. 사실 나도 욕심 많은 언니처럼 늘 새 옷과 장난감을 갖고 싶었고, 물려 입고 쓰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언제나 브랜드 옷만 사고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언니(갖고 싶은 것에 대한 감정이 솔직한)를 보며 다 해줄 수 없어 괴로워하던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다. 나는 갖고 싶은 것이 없다. 사실 있으면서도 아주 많으면서도 나는 그런 거 없다 하며 엄마와 아빠의 칭찬을 듣길 원했었다.


나는 참 게으르고 청소는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다. 지금도 화장대 위나 회사 책상은 한껏 어질러져 있다. 그런 내가 예전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부지런 떨고 깨끗하게 유지하려 매일을 노력했다. 말끔하게 치워진 화장대나 책상을 보며 그다지 행복한 기분도 들지 않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나의 화장대와 책상은 남들이 보기엔 좀 지저분해 보일지도 모를 정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난 그 안에서 내가 필요한 것들은 단번에 찾아낼 수 있는 나름 정리된 모양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동화책을 읽으며 가정에서 학교에서 양보와 성실, 그러한 미덕에 대한 것들을 배워왔다. 콩쥐팥쥐, 신데렐라만 봐도 동생과 언니들의 온갖 구박에도 늘 밝게 웃으며 열심히 산다. 온갖 궂은일들을 다 도맡아 한다. 그러면 콩쥐에게 못되게 군 팥쥐나 신데렐라의 모든 것을 빼앗은 아나스타샤, 드리젤라는 아주 무서운 벌을 받고 착한 성심을 유지하며 산 콩쥐와 신데렐라는 보상을 받는다. 것 보기엔 그럴싸한 아름답고 교훈적인 이야기지만 현실에선 달랐다. 난 천성이 착한 사람이 아닌데 착한 아이로, 착한 어른으로 커야 한다는 잠재의식이 모든 나의 행동을 제약했다. 무조건 나쁘란 것이 아니다. 나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참아가며 친절을 베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생각보다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하겠는가. 아니,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이 나를 가장 사랑해주고 아껴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떠한 모습이더라도 유일한 내편. 변하지 않는 내 편은 오로지 자신 그 하나뿐이다. 나 자신을 아끼고  나를 사랑하는 일은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고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시작이었는데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그 누구도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늘 나를 내려놓고 한번 더 참고, 양보하고, 배려하고 사는 것이 미덕이라 배웠다. 이기적이지 않아서 좋다는 말이 칭찬인 줄 알았는데 남들에겐 좋은 거지 나에겐 좋은 일이 아니란 것을 뒤늦게 알았다. 나를 위한 선택, 그것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고 후회하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다.


아직도 매일 아침 눈 뜨는 것이 괴로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가슴을 옭맬 듯한 통증에 괴로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가. 이 고통이 슬픔이 분노가 영원할 것만 같아 두려운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금 바로 벗어날 수도 있고 일 년 후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5년. 아니면 평생 부정을 저지른 배우자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선택한 것이 꼭 옳다고 할 수 없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 배우자와 이혼하고 나만의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하다면 주저 없이 그 행복을 선택하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나는 아직 남편을 사랑하고,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깊게 반성한다고 믿고 있고, 어린 두 아이들을 위해 행복한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하루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었다.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제는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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