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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키옥 Nov 05. 2020

3. 간통죄

남편에 대한 판도라의 상자가 모두 열리던 그 해.

대한민국 헌법에는 아주 큰 변화가 있었다. 바로 간통죄 폐지인 것이다.


2015년 2월 “국민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헌법에 위반된다”며 해당 조항이 위헌 결정이 된 이후, 2016년 1월 형법에서 삭제되었다.


많은 논란이 있던 만큼 그해 유월이 되어서까지도 관련 내용이 뉴스에 나왔다. 사실 이슈가 있을 때마다 직장 동료들과 회식자리에서 이 주제로 논쟁 아닌 논쟁을 벌였을 때, 난 ‘간통죄 폐지’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아주 달랐다. 그 당시 간통죄를 입증하기 위한 절차나 증거 모으기까지가 너무나 힘이 들었으며 죄를 입증한다고 하더라도 배우자의 처벌을 원할 시 자동 이혼이 되기 때문이었다. 외도한 배우자의 처벌은 원하면서도 이혼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쁜 배우자들은 이러한 아내 혹은 남편의 마음을 이용하면서 당당하게 간통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러한 사유로 간통죄 폐지를 주장한  것이다. 물론 여자 문제는 무조건 이혼이라고 외친 나에겐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때의 나였다면 그 둘을 능지처참하고 당연히 이혼했을 거니까!


“미안해.”


아니라며 날 의부증으로 몰던 그때와는 달리 순순히 인정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불과 몇 달 전까지도 간통죄 폐지를 주장한 내 입을 꿰매버리고만 싶었다.


그날 이후부터 난 고장 난 브레이크가 따로 없었다. 아니 급발진 수준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집 밖으로 뛰쳐나와 거리를 헤매며 울부짖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침대 위에만 누워 먹지도 자지도 않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또 어떤 날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마셔 응급실에 실려가는 날도 있었다. 물론 직장 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무단결근을 하는 날이 잦아졌다. 그럴 때면 남편은 내 대신 회사에 전화를 걸어 수습하기 바빴다.


그 당시 나에겐 4살과 태어난 지 6개월이 된 어린 두 딸이 있었다. 엄마는 강하다지만 그때의 나는 약하디 약한, 상처 받은 가녀린 사람일 뿐이었다.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에 우리 아이들은 할머니와 아빠의 보살핌으로 그 힘든 시간을 버텨내 주었다. 지금에 와서도 가장 미안하고 후회되는 것이 아이들이었다. 둘째는 아주 어려서 기억조차 없겠지만, 첫째 아이가 문제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는 엄마, 아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엄마. 얼마나 힘들었을까. 첫째 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애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내 고통은 고통도 아닌 것이다. 아이들에겐 특히나 어린 자녀들에겐 부모는 온 세상이며 우주이다. 그런 부모가 흔들린다면 우리 아이들은 어른이 감히 가늠하지도 못할 불안감 속에서 자랄 것이다. 내가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부부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한 건 아이들을 위함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매일 어떤 행동을 할지 몰랐다. 통통 튀는 탱탱볼이 따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유일하게 잊지 않고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남편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평생 살면서 욕 한번 하지 않았던 난 심한 욕쟁이가 되어 있었고, 남편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손톱으로 할퀴고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아무 데나 내리쳤다. 심지어 자는 남편의 목을 조른 날도 있었다. 그는 늘 상처 투성이었으며 옷이 찢어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묵묵히 그 모든 폭언과 폭력을 받아주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참 미안한 일이다. 나도 내가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일을 겪고서야 알았다.


배우자의 배신에서 오는 충격과 분노, 슬픔은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크기의 고통이었고,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아픔이었다. 그리고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건 그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우리는 맞벌이였고, 어린 두 자녀를 돌봐주기 위해 친정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한 집에 살고 있었지만 난 엄마에게 어떠한 사실도 말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지금 이 상황보다 더 힘들어질 거란 것을 나는 잘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받으실 충격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팠다. 엄마는 그저 내가 평소 앓고 있던 불면증과 우울증이 심해져 그런 줄로만 아셨다. 내가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우리 부모님이 아시는 날엔 우린 정말 끝이야. 나 죽는 꼴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해!”


우리 사이가 끝이 나는 게 싫었는지, 내가 죽는 게 싫었는지, 아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었는지는 몰라도 남편은 그 말만큼은 내 말을 잘 따라주었다. 나중에 다시 이와 관련하여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우리 부모님과 언니는 우리가 이러한 일을 겪었는지 모른다. 아마 아셨다면, 부부관계가 회복되기까진 지금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침대에 누워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나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울다 가셨다.


“엄마가 너를 키울 때 사랑을 많이 못 준 것 같아 미안해. 그때 엄마가 너무 어렸고 준비가 부족했어. 너랑 네 언니를 키우면서 힘들다고만 생각했지 예쁜 걸 몰랐어. 그래서 네가 이렇게 아픈가 싶어 너무 슬프네. 그렇지만 딸아, 너도 나중에 이 엄마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서 털고 일어나야지. 네 두 딸들을 보면서 기운 내야지, 응?”


그런 엄마에게 어떻게 사실을 말하겠는가. 그럴 때마다 입을 더욱 꾹 닫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러다 잠이 들고 잠에서 깨면 또 울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배우자의 외도는 간통죄가 아닌 살인죄라고... 맞는 말이었다. 육신을 뺀 모든 것이 죽어버렸다. 자신이 가장 사랑한 사람에게 칼로 난도질당하였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고 갈기갈기 찢기었다. 인생에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다. 다신 평범한 삶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았다. 세상 모든 것이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저주였고, 숨 쉬는 것조차 저주였다. 이혼에 걸림돌이 된 두 아이도 저주였다. 나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이 다 저주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몸무게가 빠져나갔다. 것도 그럴 것이 제대로 먹고 자지도 않고 심지어 물조차도 잘 마시질 않았다. 억지로라도 먹으면 그것 마저도 다 쏟아내었다. 그리곤 매일 밤 악에 받쳐 남편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느라 온 에너지를 다 쏟았다. 자연스레 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었다. 밤새 남편에게 쏟아내고 난 후 잠에 들었고, 눈을 떠보니 방 안에 푸른빛이 도는 이른 새벽이었다. 그때 우연히 내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미처 제자리에 걸어두지 못한 채 화장대 위에 무심하게 놓인 그의 넥타이.


침대 밑바닥에는 밤새 나에게 시달리느라 잠 한숨 못 잔 남편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고, 작은 방에 건너가 보니 두 아이와 엄마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집은 고요하고 평온하였다. 나만 없어져 버린다면 이 고요는 계속될 것 같았다. 난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했다. 남편의 넥타이와 화장대 의자를 챙겨 들고는 조용히 안방 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순간 거짓말 같게도 내 안에 평온이 찾아왔다. 한시도 멈출 수 없었던 역겨운 생각들도 내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가슴이 턱 막혀 잘 쉬어지지 않던 숨도 한결 편해졌다. 믿을진 모르겠지만 고통을 끝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레어 웃기도 했다.


‘안녕. 이 더러운 세상아, 안녕이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 그렇게 지옥 같은 세상에, 나의 엄마에, 나의 남편에, 나의 어린 두 딸에... 안녕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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