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시간
처음 미국에 왔을 때도 영어를 못하지는 않았다. 영어로 된 논문들을 읽어왔고, 영어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웬만큼 다 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대학원 생활의 첫 학기, 나는 세미나 수업들의 절반 정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신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세미나 수업에서 한 마디라도 하려면 열심히 주어진 리딩을 하고, 내가 할 질문거리를 생각하고, 그리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하는 고민까지 해갔어야 했다. 그렇게 준비해 간 날에서야 겨우 경우 용기를 내서 세 시간의 세미나 수업 중 한 번, 혹은 두 번쯤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나는 주로 새로운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시작할 때 손을 들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는 대체 어느 시점에 끼어들어야 할지 망설이느라 이야기할 타이밍을 놓쳐버리기 쉬웠다. 수업을 위해 아무리 논문을 열심히 읽어가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다른 학생들의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을 잃어버리고는 했다. 대화를 듣는 동시에 이해하고, 그 와중에 내 생각을 정리해서 발표하는 것은 나에게 지나치게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로 도망쳤다. 세미나 시간에 집중하려면 나에게는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온전한 쉼이 필요한데, 강의실에 앉아있다가는 쉬는 시간이 다시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대화시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나는 강의실과 다른 층에 있는 화장실로 도망치고는 했다. 화장실에 갔는데 누군가와 마주치면 화장실 역시 스몰 토크의 공간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숨을 고르고 돌아오면 곧 수업이 다시 시작될 시간이었다. 종종 시간이 남았을 땐, 과일이나 초콜릿 같은 간식을 꺼내서 먹었다. “친구와 사이좋게 나눠먹으렴”이라는 말을 듣는 문화권에서 자라온 나는 자연스럽게 옆 자리 친구에게도 간식을 권했다. 사실 다른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너도 먹을래?”라는 이야기를 건네며 웃어 보이는 편이 편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친구들은 내가 “Nice” 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간식을 나눠먹는 건 내가 자라온 문화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일 따름이었다. 게다가 간식을 나눠먹으면서라도 대화를 시도하지만 또 너무 복잡한 대화는 피하려 했던 내 속내를 세미나를 함께 들었던 친구들은 영영 모를 것이다.
콜로키움과 해피아워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나마 세미나 시간은 내 이해력이 가장 최고조로 발휘되었던 시간이었다. 학과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저명한 학자들을 초대해서 콜로키움을 열었다. 어느 정도 수업 내용을 예상하고 준비해 갈 수 있는 세미나와 다르게, 나와 세부 관심사나 접근 방법이 전혀 다른 강연자들이 콜로키움에서 어떤 주제로 무엇을 이야기할지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매주 금요일 두시부터 네시까지의 그 두 시간 내내 정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날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머릿속으로 한 주를 정리해보거나, 좀 더 대범해지고 싶은 날에는 노트북을 열어서 필기하는 척을 했다. 영어로 이해하지 못한 강의 내용을 끄적이다가는 옆자리의 누군가에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들을 들켜버릴 것 같아서 때때로 한국어로 일기를 적으며 두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콜로키움 이후에 있는 해피아워였다. 콜로키움이 끝나면, 학과의 교수님들과 학생들은 동네의 Bar로 향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서양 애들은 맥주 한 잔 시켜두고 몇 시간 동안 떠들더라'에 해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일단 Bar에 들어서면 다들 술을 한 잔 주문했다. 만약 그날의 모임이 있는 Bar가 메뉴조차 없는 술집이었다면 여기서 첫 번째 난관이 시작된다. 대체 무슨 술을 시켜야 할지 모르겠고, 웨이터에게 물어봤다가는 알아듣지 못할 술의 이름을 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의 주문이 끝난 직후,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라고 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나의 취향은 전혀 존중되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웬만한 술은 다 괜찮은 취향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술을 주문한 이후부터는 무한 듣기 평가의 시작이었다. 술집에서의 대화는 시공간을 넘나 든다는 사실만큼은 전 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 같았다. 방금 전 콜로키움의 강연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이번 주 세미나 수업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거나 주말에 할 일에 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듣기 평가는 영어를 이해했더라도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예를 들면 어렸을 때 먹었던 과자에 대한 이야기나, 중고등학생 때 인기 있었던 가수에 대한 이야기나, 혹은 미국 각 지역의 악센트에 관한 이야기들처럼. 그리고 이 모든 주제들에 대한 듣기 평가는 시끄러운 노래나 여러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를 배경 소리로 삼아서 이루어졌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의 향연 속에서 듣는 척, 이해하는 척, 웃어 보이며 맥주를 삼키는 시간을 보냈다.
나의 박사과정은 그렇게 세미나 준비와 세미나 참가와 콜로키움과 해피아워의 연속으로 빼곡히 찼다. 주말은 따로 없고 월화수목, 금요일의 콜로키움과 해피아워, 그리고 월화수목을 준비하기 위한 주말로 일주일이 채워졌다 (물론 티칭과 티칭 준비, 논문쓰기,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지도 교수님과의 미팅들도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아주 가끔씩은 밤을 새우는 날도 있었고,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서 커다란 책상을 혼자 다 차지할 수 있을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의 자리를 지키는 날들도 있었고, 모두가 연구실에서 퇴근하는 시간에 함께 퇴근했다가 저녁을 먹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는 날들은 그보다 더 자주 있었다. 무슨 용기였는지, 욕심이었는지, 아니면 배짱이었는지, 나는 거의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매주 무한 듣기 평가가 펼쳐지는 콜로키움과 해피아워에도 꼬박꼬박 참여했다.
그래서일까, 시간은 참 빠르게 지나갔다. 지루할 틈이 없었기에 재미있는 순간들이 마음에 남았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기엔 내가 선택한 길을 걷고 있어서 행복한 순간들이 더 많았다.
Community Relations Chair
그렇게 1년차가 지나고 2년차가 끝나갈 때 쯤, 세미나를 위해서 논문을 읽다 보면 정말로 궁금한 점들이 생겼다. 그러니까 수업 참여 점수를 위한 질문 말고, 정말 궁금해서 수업 시간에 꼭 대화눠보고 싶은 그런 궁금한 점들 말이다. 그리고 별로 어렵지 않게 그 궁금한 점들을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세미나 수업들을 통해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언젠가부터는 종종 내 주장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세 시간 내내 영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즈음 콜로키움은 자주 재미있었고, 강연자들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수업시간에는 생각해보지 못한 아이디어들을 접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이해하는 척할 때보다 정말로 이해할 때가 많아졌고, 웃는 척할 때 보다 함께 웃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아침, 나는 옆 자리 친구에게 “이따가 해피아워 갈 거지?”라는 질문을 건네고서, 내가 그 질문을 건넸다는 사실에 멈칫했다. 열심히 월화수목요일을 보낸 그 금요일 아침, 나는 어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 싶어서 해피아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질문을 하고 나 스스로에게 놀랐던 순간은 내가 미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여전히 모든 대화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대화가 시작되면 “지금 무슨 이야기하는 거야?”라고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아니면 다른 재미있는 주제로 대화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은근슬쩍 “어? 나 그거 모르는 내용인데.” 하고 웃어 보이는 방법도 있었고. 그렇게 나는 해피아워 때면 신나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서로가 하는 공부에 대한 이야기, 최근에 이슈가 된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 대학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또 연애 이야기까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종잡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해피아워가 끝나가는 시간이 왔다. 헤어지기 아쉬운 우리는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으면서 금요일 저녁을 함께 보낼 때가 많았다.
해피아워가 정말로 해피한 시간이 되었을 때쯤, 나는 매주 금요일 해피아워를 주최하는 사람이 되었다. 학생회의 직책 중에서도 Community Relations Chair라는 직책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학생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그 일년 동안에 나는 평소보다도 더 열심히 해피아워에 참여했다. 논문을 읽어가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있었던 수많은 시간들과,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상태로 임했던 세미나 수업 시간들과, 쉬기 위해 화장실로 도망가버렸던 시간들, 그리고 웃으며 맥주를 삼키던 해피아워에서의 시간들이 모두 녹아있는 세 단어인 것만 같아서, Community Relations Chair라는 세 글자는 여전히 내 이력서의 수많은 내용들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한 줄 중 하나이다.
지루할 틈이 없었기에
재미있는 순간들이 마음에 남았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기엔
내가 선택한 길을 걷고 있어서,
행복한 순간들이 더 많았던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