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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Jan 12. 2021

그림을 못 그려도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내가 뉴욕의 디자인 스쿨에서 배운 것들 – 1화 –

내가 미국의 디자인 스쿨로 유학을 가게 된 사연은 조금 어이없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공대를 졸업했던 나는 한국에서 미대 학부로 편입할 방법을 찾고 있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대를 졸업하고 한국 미대에 편입하는 일은 (농담이 아니라) 미국의 예일 Yale대 미대에 편입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한국의 미대들은 일 년에 한두 명의 편입생밖에 뽑지 않았으며, 입시 미술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 편입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한국의 명문대 미대를 졸업한 내 친구는 시각 예술적 감각과 입시 미술을 잘하는 것 사이에는 별 관계가 없다며, 자신이 입시 미술 학원에 등록한 첫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날 학원에서는 배추를 보고 정물화를 그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오래되어 시든 배추 주변으로 십여 명의 학생이 둘러앉아 정물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림을 꽤 잘 그렸던 그 친구는 자신의 자리에서 눈에 보이는 모습대로 배추를 그렸지만 학원 선생님께 혼이 났다고 했다. 혼이 난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로는 예쁘지 않은 배추의 밑단을 그렸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시든 모습을 그대로 그렸기 때문이었다. 미술학원 강사는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에 관계없이 항상 배추의 옆면을 시들지 않은 생생한 모습으로 그려내길 주문했다. 


미대 입시를 향한 플라톤의 이상향 Image from ChefSteps


친구는 입시 미술이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플라톤의 이상향을 그리는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했다. 입시 미술에 매달리기 싫었던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해외 유학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그림을 못 그린다’라는 말 자체가 현대 미술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못하다’는 표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각 예술을 포함한 모든 현대 예술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주관적인 기호와 취향에 따라 좋고 싫음이 갈릴뿐, 바흐 Bach의 평균율 같은 이상적 아름다움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 결국 그림이 ‘잘’ 그려졌는지 비교할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잘하고 못하고를 평가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 오직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 좋아하거나 싫어한다고 하는 평가와 취향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림을 못 그린다’는 표현은 사실 실물처럼 똑같이 못 그린다는 의미이다. 실물처럼 똑같이 그리는 그림은 낭만주의 미술이 태동한 18세기 말에 이미 그 종말을 고했다. 더불어 사진 기술의 등장으로 정밀묘사는 예술의 영역에서 그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한국의 미대 입시가 안타까운 점은 이백 년도 넘은 가치관을 가지고 21세기의 학생을 뽑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시각 예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지만 한국의 미대에 갈 수 없었다면,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입시 제도의 잘못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한국의 입시 미술 기준에서 볼 때 뉴욕의 디자인 스쿨에서 만난 수많은 학생들은 ‘수준 이하’의 드로잉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디자인 전공이 아닌 순수 회화 Fine Arts 전공의 학생들 가운데에도 엉성한 드로잉 스킬을 지닌 학생이 적지 않았다. 학교가 그 학생들의 입학을 허락한 이유는 드로잉 스킬이 미래의 아티스트들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이 창작자로서 지닌 잠재력과 창의력을 더 눈여겨보았다.


드로잉이나 정밀묘사를 천편일률적으로 훈련시키지 않는 분위기는 자유로운 표현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된다. 미국의 미대 학생들도 졸업할 무렵이 되면 꽤 괜찮은 드로잉 능력을 갖추게 되는데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독창적인 드로잉 스타일을 갖게 된다. 실제로 함께 공부한 미국 친구들은 대부분 드로잉 실력에 관계없이 그림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드로잉이 사실적이지 않은 것보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더 큰 부끄러움으로 여겼다. 당시 드로잉 스킬이 엉망이었던 많은 친구들은 십 년이 지난 지금 실리콘 밸리와 뉴욕에서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어 활약하고 있다.


언젠가 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분야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의 첫 번째 역할은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디자이너로서 당신이 그리게 될 그림은 의사소통 수단으로써의 그림이다. 당신의 창의적인 생각과 논리적인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만 있다면 사실적 드로잉 스킬은 디자이너로서 그리 필요치 않다. 뉴욕의 잘 나가는 디자이너들이 얼마나 그림을 ‘못’ 그리는지 안다면 당신은 크게 놀랄 것이다. 


시티은행 로고의 탄생 Image from Pintrest


혹시나 아직도 그림을 ‘못’ 그려서 망설이고 있는 미래의 디자이너들을 위해 위의 그림을 공유하고자 한다. 시티은행 로고를 디자인한 세계적인 시각 디자이너 폴라 쉐어 Paula Scher는 카페에서 식사를 하던 중 로고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 자리에서 스케치를 했고, 그 스케치는 결국 시티은행의 공식 로고가 되었다. 당신이 위의 냅킨에 끄적여진 스케치만큼만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디자이너로서 충분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위의 스케치가 단순하고 엉성할지언정 그 뒤에 숨어있는 문제와 그것을 해결한 방식은 매우 세련된 것이었다. 당시 시티은행이 새로운 로고가 필요했던 이유는 시티 그룹 Citi Group과 트래블러스 그룹 Travelers Group의 합병 때문이었다. 두 그룹의 정체성을 하나의 브랜드로 합쳐야 한다는 고객의 엄중한 요구가 디자이너인 폴라 쉐어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래 그림과 같이 그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했다. 


빨간색 곡선과 소문자 t의 조합에서 빨간 우산을 발견할 수 있다. Image from missdetails.com


자, 이제 시티라는 단어와 함께 트래블러스 그룹의 상징인 빨간 우산이 보이는가? citi라는 글자와 더불어 붉은색 곡선과 영어 소문자 t가 만나 트래블러스 그룹의 상징인 빨간 우산을 우아하게 표현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다. 그녀가 우산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지난 이십여 년간 한 명도 없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디자이너가 되지 못하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세상에 ‘잘’ 그린 그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니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특히 더 크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부끄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당신의 근거 없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에게 한계를 설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디자이너로서 실무를 하다 보면 드로잉 스킬보다는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자신 있게 결과물을 들이밀 수 있는 뻔뻔함이 더 요구된다. 좋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면 그림 실력을 늘리기에 앞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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