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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성 Mar 04. 2022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보고

시드니 루멧 "12명의 성난 사람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인생 영화"가 있다. 영화 팟캐스트에 초대되어 출연했을 때, 첫 질문이 "인생 영화가 무엇인가?"였다. 분위기 상 하나의 영화를 말해야 하는 듯했고, 또한 질문에 당황하여 당시 가장 최근에 본 영화를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에게 '인생 영화'는 한 편의 영화가 아니다. 장르별로 나뉜다. 사랑에 대한 인생 영화, 가족에 대한 인생 영화, 액션 인생 영화 등등 나에게 법정 영화 중 인생 영화를 말하라면

난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이라 답할 듯하다. 내가 본 최고의 법정 영화는 "12명의 성난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겐 생소한 배심원이라는 제도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동시에 일상의 영화이다. 영화의 큰 줄기는 살인 사건에 대한 12명의 배심원들의 판결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치라 생각한다. 법정 영화 혹은 배심원 제도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인간의 인식 한계와 판단 능력과 사회적 책무에 대한 영화이자 현상학적 영화라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사태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릴 때, 자신의 경험 자료 안에서 그 사태를 판단한다. 영화에서도 동일하다. 불량한 아이들에게 어떤 불이익을 받은 사람은 그 경험 자료 안에서 어쩌면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건에도 자신의 경험을 대입하여 판단하고자 한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한 예로 나는 흑인에 대한 편견이 적은 편이다. 이것은 내가 미국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만난 흑인들이

너무나 친절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흑인들은 대부분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고 키 작은 동양인인 나에게 어떤 위압감도 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배려해주고 존중해 주었다.

반면, 나는 히스패닉에 대한 편견이 있다. 그것은 히스패닉 아이들이 나에게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고

키 작은 동양인인 나에게 "넌 젠더가 뭐냐?"라는 농담들과 비꼼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라는 인간의 제한적 경험에 의존한 편견이다. 

영화에서는 불우한 가정의 아이,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에 대한 편견이 수도 없이 나온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도, 학식이 있는 사람도 그리고 자수성가한 사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결국 사태에 대한 편견 없는 관점은 일종의 태도의 문제가 된다. 어떤 태도로 사태를 직시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영화가 바로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이다.

다행히 영화 내에서는 현실의 경험 자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사태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헨리 폰다가 있었다.

헨리 폰다(극 중 배심원 3)는 선입견이라 할 수 있는 경험 자료나 통속적 가치를 배제하고  "사태 그 자체로" 나아간다. 그는 사태에 대해 통속적인 것들의 인식 작용을 판단 정지시킨다. 후설 철학의 테마인 "사태 그 자체로"는 이 영화의 핵심이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판단 정지! 사태에 대한 정직한 태도! 후설의 표현으로 한다면 에포케 치기 혹은 괄호 닫기와 괄호 열기는 사태에 대한 순수한 태도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그것을 잘 표현한다.

영화 초반 헨리 폰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통속의 가치 혹은 판단의 관성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함은 물론이거니와 판단 자체를 귀찮아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사유의 관성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한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이 개떡 같은 말로 사유를 정지시킨다. 그러나 헨리 폰다는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닌

올바른 것이 좋은 것이라 말한다. 올바름을 찾는 것은 불편하다. 나의 사유의 관성을 멈추게 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불편하고 힘이 든다. 영화는 그 지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헨리 폰다는 이 불편함과 마주 서서 극복해 나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하고 각자가 가진 선입견을 직면하게 한다. 10분이면 끝날 일이 몇 시간이나 이어진다.

그렇다. 사태를 사태 그 자체로 직면하는 것에는 시간이 요청되고 수고스러움이 요청되며 마지막으로 사태 자체를 보기 위해 자신의 판단의 관성을 정지해야 한다는 태도가 요청된다.

이 영화는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것도 아주 긴장감 넘치는 앵글 속에서. 휴머니즘이란 관성을 과감히 멈추고 존재자를 대상이 아닌 존재자 그 자체로 보는 것에서 비롯되다는 깨달음은 덤으로 주어진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비범하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댓글을 달고 가치 판단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세대에 이 영화는 필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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