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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성 May 11. 2022

그날 밤 내가 죽인 소녀를 읽고

장은영 "그날 밤 내가 죽인 소녀"

이 책 "그날 밤 내가 죽인 소녀"의 내용은 복수극 같은 복수극 아닌 복수극 같은 이야기이다. 한 소녀가 죽었고 그 소녀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일곱이 납치 감금되어 범인 찾기를 하는 이야기다. 줄거리 소개는 여기까지. 진짜 재미있는 책이다. 

나의 리뷰가 늘 그러했으니 오늘도 여기까지만 쓰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하련다.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감금도 납치도 아니다. O라는 인물이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의 내용이 현실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난 이 지점이 읽는 동안 너무 좋았다. 아니, 이것이 핵심이라 생각했다. 소설이 있기에 사건이 발생한 것일까? 아니면 O가 현실에서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일까? 그렇다. 난 처음부터 O를 의심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의심 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작가님이 O의 소설을 소개할 이유가 없으니깐. 그렇지만 마지막 반전으로 작가님께 뒤통수 빡!! 아파라.... 너무 즐거웠다. 이 책은 아휴 그냥 뒤통수를... 뒤통수가 아주 너덜너덜 해졌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럼 다시 돌아와서 언어가 현실을 만드는 것일까? 현실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일까? 왜 O는 자신의 사건을 소설로 쓴 것일까? 난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함정이라 생각한다. 언어는 과연 현실 혹은 리얼일까? 

라깡은 상상계, 상징계, 현실계 이 세 가지 계로 세계를 구분한다. 여기서는 상징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이다.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는 현실계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징계가 리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실계는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 현실계도 곧 상징, 즉 언어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초반(프롤로그)에서 O의 소설을 등장인물들이 분석하고 평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언어로 구현된 세계가 자신들의 현실이 될 것을 모르고 이러쿵저러쿵 비평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이 비평했던 현실 속에 빨려 들어간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비평하고 평가질 했던 그 언어의 세계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들은 상징계에서 나와 현실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을 상징계에서 마무리한다. 

그러나 진범(밝힐 수 없다. 그대도 뒤통수의 아픔을 맞보길 바라기에)은 상징계와 현실계를 오가며 존재한다. 에필로그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작가님께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진범이 한 말"문장도 그렇고, 제가 쓰던 문체랑은 너무 다른데."라는 표현이 진범의 글이 아니라 O의 글이라는 뜻인지를. 난 에필로그에 나오는 그 글은 진범이 아닌 O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범이 진정한 진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징의 세계를 넘어선 존재, 현실계와 상징계를 넘나들 수 있는 존재라면 그는 자신의 사건을 언어로 남겨 상징계에 예속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라캉의 통찰에 따르면 상징계이다. 우린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작중의 인물들도 그러하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과에게 어떤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닌 진범의 욕망에 따라 행동했다. 상징계에 머무는 그들에게 현실계를 넘나드는 어떤 존재는 일종의 대타자가 된다. 그렇기에 그런 존재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린 그런 존재를 일상에서 품고 누군가를 죽이며 살아간다. 언어는 일종의 법칙을 만든다. 우린 언어의 논리 구조로 사유하고 판단한다. 그렇기에 언어는 일종의 구조와 같다.

우리는 이 언어가 지시하는 욕망으로 살아간다. 마치 작중 인물들이 진범의 명령에 따라 욕망하고 행동하듯. 그것을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그러한 것에 가까운 것은 아마도 자본의 명령이 아닐까 싶다. 착취의 구조에 눈감고 누군가를 죽이면서 우린 살아간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나는 직접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본의 구조에서 우리의 역할은 바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구조는 우리에게서 현실을 빼앗아 간다. 우린 스펙터클의 세계를 통해 보이는 것을 보며 그것이 현실이라 믿고 나의 욕망이 나의 것이라 믿고 살아간다. 그러나 라캉의 통찰에 따르면 이건 허무한 맹신이다. 나의 삶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삶, 소설로 치환한다면 진범에게 조종당하며 진범이 그리고자 한 세계 혹은 이야기 혹은 상징계의 구현을 위해 이용당하게 된다. 그렇게 소설 속의 진범은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고 작중 인물들은 이용당한다. 마치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이 상징계를 살고 있는 우리들처럼. 이 책은 내게 묻는 듯하다. 넌 너의 삶을 살고 있느냐고.


당신의 욕망은 과연 당신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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