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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Apr 02. 2024

떠나버린 아내를 찾는

노인 이야기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머리는 길고 옷은 남루하며 며칠은 씻지 않은 듯한 사람이 커다란 봉지를 들고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앞니가 다 빠졌지만 노인은 아니었다. 어쩌면 나보다 한참 젊은 사람일 수 있다. 그가 앉고 옆자리가 비었지만 서 있는 사람들은 선뜻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빈 옆자리를 좀 더 넓혀주려는 듯 어깨를 웅크리고 사람들 눈치를 봤다. 두 정거장을 지나 그가 내리자 사람들이 빈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를 보는 순간 갑자기 시어도어 드라이저 (Theodore Dreiser)의 단편 소설 <<떠나버린 피비(The Lost Phoebe)>>에 나오는 헨리 노인이 생각났다. 


<<떠나버린 피비>>는 에드워드 제이 오브라이언(Edward J. O’Brien)이 발행한 <<1916년 최고의 미국 단편소설(The Best Short Stories of 1916)>>에 수록되어 있다. 주인공 헨리 라이프스나이더는 1900년대 초 인구가 꾸준히 감소하는 미국의 중서부 시골 마을에 산다. 헨리는 할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태어나 21살에 피비와 결혼하며 집 한쪽을 직접 넓혀서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10년을 모시고 산다. 아이 7명을 낳았지만 3명이 사망하고 생존한 아이 4명이 성장하여 타지로 떠난 후 시골집에는 두 부부만 남는다. 가끔 헨리가 사소한 일로 피비에게 잔소리를 하고 피비는 조용히 하지 않으면 떠날 거라고 협박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아끼며 농장 일 외에 바깥세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다 48년간 함께 산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70세 헨리는 아내의 환영을 보고 아내를 찾아 헤맨다. 


내가 이 이야기에 끌린 이유는 좀 엉뚱하다. 헨리의 아내 피비가 지금 내 나이에 사망해서다. 이른 봄 어느 날 64세 피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열이 나고 남편은 옆 동네까지 가서 의사를 데리고 오지만 아내는 결국 사망하고 만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1910년 미국 백인 여성의 평균 기대수명이 52세여서 피비는 장수한 거다. 평생 농부여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남편과 사이가 좋아서 그랬을 거다. 나는 피비만큼 부지런하지 못하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의료 기술 덕분에 2022년 대한민국 여성의 기대수명인 85세까지는 살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앞으로 큰 이변이 없는 한 20년을 더 살 수 있다.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20년 전을 생각하니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건강하게 사는 거다. 그래야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거다. 그래서 하기 싫어도 열심히 걷고 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진다. 헨리와 피비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평생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몸이 안 따라줘서 농사 일도 가축 키우는 일도 줄였다. 왕래하는 친구도 줄고 특히 헨리는 아내 없이 살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내가 요새 그런 생각이 든다. 난 남편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다. 다행히 남편은 나보다 훨씬 부지런해서 병원에서 장시간 일하고도 헬스에 가는 걸 잊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저녁 6시 이후에 책상에 앉아 있는 게 힘들어졌다. 자꾸 졸음이 밀려온다. 그래서 수업이 있는 날은 출근 전에 독서나 프랑스어 공부를 해야 한다. 저녁에 뭔가 새로운 걸 기억하는 게 잘 안 된다. 다행히 저녁에 수업 준비는 할 수 있다. 미리 준비한 PPT를 보며 학생에게 가르칠 내용을 점검할 때는 정신이 맑아진다. 그러나 내년이면 정년퇴직이니 앞으로 저녁 일과도 줄어들 거다. 


그러면 언젠가는 피비처럼 마지막 날을 맞을 거다. 미리 생각하면 조금 슬프지만 그보다 내가 생각하는 프로젝트를 그 시간 전에 마치지 못할까 염려된다. 만약 내가 계획한 일을 마무리하면 여한은 없을 것 같다. 아니 그 일을 마치지 않아도 지금까지 감사하게 잘 살았다. 그러나 이왕 20년을 더 살 수 있다면 뭔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 가지 더 하고 싶다. 그러려면 오래 걸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죽는 날까지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사무실을 공유하는 일본인 교수의 할머니가 102센데 몇 달 전까지 걸을 수 있었단다. 그러나 이제 며칠째 계속 잠만 주무셔서 의사가 가족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단다. 102세까지 산 건 부럽지 않지만 끝까지 걸었다는 게 부럽다. 헨리도 걸을 수 있어서 무려 7년이나 피비를 찾아다닐 수 있었다. 비록 몰골은 야만인처럼 변해 갔지만 걸을 수 있어서 아내 찾기 프로젝트를 실천할 수 있었다. 비록 이웃에게 약간의 식량을 구걸하긴 했지만 다른 모든 건 자급자족했다. 그리고 드디어 레드 클리프(Red Cliff) 벼랑에서 젊은 시절의 피비를 만났다. 사람들은 헨리가 고독사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오랫동안 꿈꾸던 아내를 만나 “기쁨의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다.


미국 중서부 (인디애나주, 일리노이주, 아이오와주 등)을 차로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옥수수나 밀밭을 목격했을 거다. 그리고 어쩌다 농가가 하나씩 보이는 마을로 난 길에 들어서면 마을 이름 밑에 인구수가 적혀 있는데 500명도 안 되는 곳이 많다. 그런 곳을 지날 때면 스테판 킹의 <<칠드런 오브 더 콘(Children of the Corn)>>이 생각나서 자동차에 기름이 충분한지 몇 번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 다시 그곳에 간다면 아내의 이름을 애처롭게 부르는 헨리 노인이 생각날 것 같다. “오~ 피비!~피비!~~”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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