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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키 Mar 09. 2024

우당탕탕 무대일기


“오빠, 여기 대기실 진짜 정신없거든? 그냥 로비 화장실에서 옷 갈아입고 와야 될 것 같아.”


로비도 정신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지하의 수영장을 이용하러 온 가족들-아무래도 어린이 수영 교실을 운영하는 것 같아보였다.-, 그리고 나처럼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 화장실 끝 칸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흰 셔츠, 정장 바지, 검정 코트에서 흰 티에 청바지, 그리고 까만 바람막이로. 친구 결혼식에서 사진도 찍지 못하고 무려 모범택시를 타고 달려와 놓고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니 내 모양새가 좀 우스워 보였다. 모자를 손목에 걸치고 짐을 두기 위해 S를 따라 대기실로 향했다. 그래, 이곳에서는 절대 옷을 갈아입을 수 없었겠구나. 화장을 하고 있는 아이들, 고데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 혼자 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 구석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까지. 같이 공연하는 아가들 먹일 겸 간식거리나 사 올까 하다 말았는데, 사 왔더라도 못 먹었지 싶다.


공연장에서는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관객석 구석에서 몸을 풀며 다른 팀들의 리허설을 지켜봤다. 오, 저 아가는 아프로도 하는 구나, 저기 다른 아가도 있네. 리허설이 진행될수록 아는 얼굴들이 겹쳐 나왔다. 아무래도 댄스 학원에서 주최하는 공연이다 보니 해당 학원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이 여러 무대에 참여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 올카인드 멤버들이 사실상 이방인인 거지. 오직 오리진 쌤과 함께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의지로, 8주간 목요일마다 7시 20분까지 공릉역의 학원으로 2차 출근을 했으니. 혼자였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을 5명이 함께 신청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리허설은 꽤나 타이트하게 돌아갔다. 팀마다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 10분 안에 무대 위에서 동선을 맞춰 보고, 이상한 부분을 찾아 수정하고, 조명도 맞춰봐야 한다. 선생님 두 명이서 하나의 무대를 만든 경우엔 한 명이 동선을 맞추는 동안, 나머지 한 명은 조명을 맞춰보는 산업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산업화의 극치는 리허설을 주관하는 조명 기사님. “저희 몇 분 남았을까요?” “12초 남았습니다.”


“오리무중 팀 리허설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카운트를 세며 전체적인 동선을 맞춰보았다. 첫 곡에선 합을 맞춰 앞뒤로 이동하는 전체적인 동선을 보여주는 게 포인트. 각각 파트가 나뉘는 두 번째 곡에선 파트별로 치고 빠질 때 위치를 잘 잡는 것이 중요했다. 오리진 쌤의 솔로가 끝난 뒤 모두가 한 번에 들어와서 시작하는 세 번째 곡이 난제였다. 무대 자체가 연습실 보다 넓어 무대 밖으로 빠져있다가 들어갈 때의 거리가 멀어졌고, 무대 양 끝에는 커튼과 조명, 각종 짐들이 즐비했다. 투 에잇 안에 무대 밖으로 빠졌다가 이 난관을 헤쳐 동선을 잡고 기다려야 한다니. 넘어지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필히 실제 속도에 맞춰봐야 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두 번째 곡이 끝나가던 시점에 돌연히 음악이 끊겼다. 우리의 10분이 끝이 난 것이었다. 아니, 1분만 기다려주면 되는데! 우리 뒤에 한 팀 밖에 안 남았는데! 마지막 곡 타이밍 맞춰봐야 되는데! 조명 기사 네 이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내가 섭섭한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해봐라, 그건 다 주최 측 탓이다!



“오리진 쌤, 인원 체크 부탁드릴게요.”

삼삼오오 팀 아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공연을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다들 이제 마지막 무대라 그런지 기분 좋은 들뜸이 무대 뒤를 감싸고 있었다. 나였으면 체력이 방전됐을 텐데, 역시 젊은 게 좋구나. 팀 소개가 끝나고 조명이 페이드아웃되며 무대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올카이…!" 여러 응원의 소리 중 관람 온 크루 멤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 있게 올카인드라고 끝까지 외치지 못한, 그 소리에 N과 눈이 마주쳐 미소가 터졌다. 그리고 암전.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는 암전에 내가 자리를 잘 잡은 게 맞나 불안해할 시간도 없이 음악이 시작되었다.

세 번의 잭킹* 후 몸을 붕 띄우고 런닝맨** 두 번. 다 같이 힘 있게 앞으로 한 걸음 전진, 그리고 스텝과 함께 뒤로 훅 빠지기. 음악이 잠시 멈추는 타이밍에 뒤돌아 스탑! 이제 뒤돌아서 멋지게 중간까지 튀어나갈 차례인데.. 웬걸 동선이 꼬여 앞에 있던 아이와 부딪히고 말았다. 연습 때는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는데, 뒤돌아 오른쪽으로 충분히 치고 나가줘야 할걸, 그러지 못해 부딪힌 것이다. 그래도 맨 뒤 줄이어서, 넘어지진 않아서 다행히 멘탈 붙잡고 춤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무탈히 첫 곡을 끝냈다는 안도가 다가올 때쯤 또 삐끗하고 말았다. 음악이 슬로우 다운되며 몸을 천천히 낮추는데 평소보다 많이 내려갔는지 삐끗한 것이다. 발목이 꺾이는 상황에서도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가운데 있었던 탓에 삐끗한 순간과 당황한 표정은 영상에 박. 제. 


* 몸을 앞뒤로 흔들며 춤추는 댄스 동작

** 달려나갈 것 같이 뛰는 모습을 연상케하는 댄스 동작


개인적으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두 번째 곡이었다.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난 앞의 두 파트를 이어서 춰야 했다. 다인원이라면 동작을 틀리더라도 크게 티가 나지 않지만, 소수에서는 같은 동작이라도 합을 맞추지 않으면 눈에 튀고 자칫 지저분해 보인다. 그 눈에 튐과 지저분함을 맡고 있는 게 나였다. 내 춤에는 항상 요염함이 묻어 있다. ‘방금 저 동작은 십 미터 멀리서 봐도 딱 상기였어.’ H의 말처럼 난 분명히 힙합을 하고 있는데 남들과 다른 그런 포인트가 항상 존재했다. 강한 힘으로 무대를 부시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의 요염함은 틀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걸 지우기 위해 수도 없이 쌤의 영상을 보고, 카운트를 쪼개 동작을 잡았다. 결과적으로 안무를 틀리지도, 튀어 보이지도 않았다. 무대가 다 끝난 뒤에 멤버들에게 말했다. “나 힙합 좀 는 거 같아.”


“조심하세요!”

두 번째 곡을 마무리하고 쌤의 솔로가 진행되는 동안 커튼 뒤에서 나지막하게 외쳐진 한 마디. 그 한 마디는 나를 향한 것이었다. 무대 밖으로 빠져나가 커튼 뒤에서 자리를 잡으러 가는 동안 즐비한 짐에 무릎을 박고 만 것이다. 누군가 부딪히거나 넘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게 나였다니. 다행히 뒤에서 J가 나지막한 외침과 함께 몸을 잡아준 덕분에 바로 이어서 무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연습하는 8주간 단 한 마디도 나눠본 적이 없는데. 짜식 따뜻한 아이였구나. 이제 와서 전하는 이야기지만 고마웠어. 군대 잘 다녀오고.


마지막 곡을 할 때는 정말로 숨이 차고 입에서 피 맛이 나기도 한다. 내 앞에 서는 P는 마지막 곡 할 때마다 나의 숨소리가 음악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고 할 정도였다. 뛰어 들어와 춤을 추고, 턴을 돌고, 발을 차고, 비트를 쪼개며 동작을 하는데 어찌 숨이 안 차겠는가. 쌤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나뉘어 서로 대칭적인 모습으로 춤을 추고 비트에 맞춰 마주 본다. 그리고 차례차례 앞으로 전진하며 무대 뒤로 퇴장. 조명 페이드아웃 되며 음악은 끝이 나고 관객은 환호한다. 오리무중의 유일무이한 무대 종료.



“이거 원래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드리려고 했는데..”

수줍은 듯 주머니에서 꺼낸 오리진쌤의 손에는 편지가 한 움큼이었다. 어젯밤에 팀원 각각에게 편지를 쓰셨다고, 시간이 없어서 내용은 별게 아니라고 쑥스럽게 이야기하셨지만 그 마음 자체가 따뜻했다. 올카인드 멤버들과 거나하게 뒤풀이를 진행한 뒤 집에 돌아와 쌤의 편지를 뜯어보았다. 멀리까지 와서 항상 열심히 해주어서 고맙다는 짧은 메시지를 읽고 다시 편지를 넣는데 편지봉투에 숨겨진 메시지가 있었다.


‘장르 가리지 않는 다재다능 멋진 Dancer!’

기억하고 계셨구나. 한때 쌤처럼 간지나게 힙합을 하고 싶은데, 난 항상 걸리시한 느낌이 나서 불만이라고 고민 상담을 했던 적이 있었다. 쌤은 그게 나만의 매력이고, 나만 할 수 있는 거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기억하고 계셨나 보다. 안 그래도 다른 멤버들은 더 깊은 힙합의 세계로 향하고 있는데 나만 왁킹이니 보깅이니 너무 많은 장르를 하는 건 아닐까 고민이 되던 시기였다. 그런 내게 장르 가리지 않는 “다재다능” 멋진 “Dancer!”라니! 이러니 오리진 쌤을 벗어날 수가 없지. 충성 충성!


공연 당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이번 공연의 컨셉이 네온이었다고 한다. (어두운 밤에도 밝게 빛나는 네온 사인처럼 우리의 춤도 빛날 것이다, 뭐 대충 이런 의미였던 것 같지만 그건 잘 모르겠고) 네온 사인은 한 가지 색이 아닌 여러 가지 색을 내도록 만들어진다. 한 가지 색만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없다. 눈도 아플 것 같고. 춤도 마찬가지로 한 가지 장르만 추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다양한 춤을 추고 그 안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게 좀 더 나답지 않을까. 왜냐, 난 장르를 가리지 않는 다재다능한 멋진 댄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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