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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하 Jan 06. 2024

소설 쓰는 (바보 같은) 마음

카페에서 에세이도 씁니다

  이제 나도 등단 2년 차 작가가 되었다. 2년 차라고 하기엔 어떤 실무적 경험이 착실히 쌓였다거나, 1년 차 후배 작가에게 조언 같은 것을 해줄 만한 소설적 노하우가 쌓이지는 않았다. 그저 어렵게 두 편의 소설을 문예지에 발표했을 뿐이고 그마저도 유명한 문예지는 아니라서 평론가나 일반 독자분들의 반응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는 (아예)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내가 소설가긴 한가, 그런 생각이 종종 든다. 그리고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해 새로 깨달은 것이 있는데, 소설가는 결코 직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평생 성실한 자세로 글을 쓰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도 펴내긴 했지만, 그런 제목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가 직업과 아주 멀다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이라는 것은 보통 매일 업으로 삼는 일을 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수입을 내는-설령 그게 불규칙적이고 수익의 편차가 있다고는 해도- 예상 가능하고 체계 잡힌 일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는 매달 한 편의 작품을 꼬박 써내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매달 쓴다고 해도 그것을 독자에게 공개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어서 원고를 수익화하기가 쉽지 않다. (원고 청탁이 오지 않는 문단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도 썼으니 이제 그만 얘기하기로 하자;) 그러니까 한 편의 소설을 쓰는 일은 형태 모를 생각과 마음을 애틋하게 굴리고 굴리다가 하나의 조각처럼 완성해 내지만, 미래의 누군가에게 발견되길 희망하며 서랍 속에 조용히 묻어두는 타임캡슐 같은 것이다. 물론 돈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직업이라 할 수는 없고, 일종의 종교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내 소설에게 언젠가 구원의 날이 깃들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


  어쨌든 정말 이런 식으로 가다간 책 한 권 내지 못하는 10년 차 무명작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마치 배우나 희극인들이 공채를 통해 데뷔한다고 해도 출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인기를 얻지 못하면 무명의 긴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토록 동경하던 '등단'을 하기만 하면 작품 발표 기회가 공평하게 돌아올 줄 알았던 나는 이곳 또한 무한 경쟁 시스템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동안 굉장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게다가 여기는 판이 좁아서 소설가들끼리는 한 다리 건너면 다들 알 정도로 운신의 폭도 굉장히 좁다)   

  예전에 국어 교사를 준비했을 때도 내가 그렇게 굉장한 것을 욕심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문학’을 직업으로 연결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도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총 4년이란 시간을 수험생으로 보냈고 120:1 정도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소설가로 사는 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나답게 살고 싶어서, 글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한 도전이었지만 군소 문예지로 등단한 신인 소설가에게 주목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물론 등단 자체가 정말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에는 늘 감사하고 있다) 어리석게도 내가 또 한 번 탐내서는 안 되는 것을 탐내며 스스로 고생길을 자처한 것일까?

  혹여 이 글을 읽고 있는 작가 지망생분들이 있다면, 이왕이면 '메인' 신문사의 신춘문예로 등단하거나 '메인' 문예지의 신인상으로 등단하시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아니면 단편 소설이 아닌 장편소설 공모전으로 데뷔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장편소설은 쓰는 것 자체가 어려우니 경쟁률도 낮고, 상금은 크고, 책도 바로 나오니 어디 나가서 '나 작가요'라고 말하고 다닐 수도 있다. 그리고 문단 중앙에 진출해 주목을 받고, 책을 내고, 행사에 불려 다니는 작가보다는 등단만 하고 사라지는 작가분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도전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다 보니 퇴사 일기를 쓰던 몇 년 전의 내가 떠오른다. 그때도 나는 교직 시스템의 불합리함과 비인간성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고 도망치듯 학교를 떠났다. 그런데 새로 정착한 곳에서도 이렇게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런데 내가 직면한 진짜 문제는 이제는 더 이상 탈출구가 없다는 사실이다. 소설 말고는, 도대체 나라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젠 정말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더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고, 나는 문득 고민만 하느라 1년여의 세월을 흘려보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타임캡슐처럼 묻어두었던 1년 전의 초고를 다시 들여다보고 형편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고작 이런 초고를 써놓고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했다는 것에 대해, 나의 오만함과 뻔뻔한 마음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런) 소설 쓰는 (바보 같은)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돈도 나오지 않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시간만 축내고,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하는 이 소설을 나는 왜 쓰려고 하는 걸까.  소설은 결국 마음을 보여주는 일일 텐데, 나는 고작 이런 마음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걸까? 하나의 생각, 하나의 의심, 하나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에둘러 가야 하고, 아무리 숨겨 봐도 그 결과로써 ‘나’라는 사람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나는 결국 그런 일을 하고 싶은 걸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이것도 역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직은 포기가 안 되니 몇 년 더 해보자는 생각뿐이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소설가 1년 차에 늘 마음에 품을 나만의 문구를 적어놓았었다. ‘나를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마음에 집중해 소설을 쓰게 하소서’ 어쩌면 그동안의 나는 나를 버리고, 욕심에 집중해, 소설을 비워왔나 보다. 이제는 미우나 고우나 여기가 정말 내 자리이니 지구에서 탈출하는 날까지는 여기에 마음 붙이고 살아가는 수밖에. 그리고 나는 버텨보겠다는 마음에 대한 증명으로 매주 토요일에 카페에 와서 에세이를 쓰기로 결심했다. 내가 결코 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나 여전히 소설 쓰고 있다는 사실, 글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인생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법이고,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일은 실패해도 그 자체로서 언제든 가치 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또 오랜만의 가하입니다. 이제는 긴 방황을 끝내고 진짜 주 1회 토요일에 글을 연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행히 2024년의 첫 토요일에는 성공했네요~ 토요일 2시에 퇴근해서 근처 카페에 가서 7시 30분까지 업로드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렇다 보니 매번의 글에 성실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짧게라도 꾸준히, 써보려고 합니다. 모든 글이 초고이니 감안하고 봐주세요.(사실 인생도 그렇지 않나요.) 앞으로도 쓰면서 성장하는 가하가 되겠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오늘도 당신만의 하루를 사시길 :)

  

[*토요일 퇴근 후 카페에 가서  3시에서 7시 30분 사이에 써서 올리는 실시간 연재입니다. 그래서 모든 글이 초고입니다. 사실 인생도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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