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하 Jan 13. 2024

나는 소설 씨를 얼마나 사랑할까

내가 사랑하는 만큼만 소설 씨도 나를 사랑해 주기를

  요즘 들어 소설 씨에게 이런 질문을 받고 있다.      

"나야? 쟤야? 요즘 나한테 좀 시들하네? 둘 중 하나만 선택해. 나는 너 말고도 좋다는 사람 많아."      

 소설 씨가 말하는 '쟤'는 이름이 '현실'인데, 현실 씨는 살가우면서도 좀 엄한 구석이 있어서 양다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현실 씨랑 가깝게 지내면, 나도 가족에게 사람 구실 할 수 있고, 맛있는 음식(술을 포함한)이나 여행, 계절마다 사는 예쁜 옷 같은 사치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소설 씨는 현실 씨에 비해 훨씬 앙큼한 구석이 있어서 나를 안달 나게 만든다는 것이 문제다. 소설  씨를 내 사람으로 만들기만 하면, 평생 영혼의 동반자가 되어 가슴 뛰고 설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양자택일의 문제인 것 같지만, 진짜 문제는 내가 선택한다고 해도 둘 다 나를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소설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 것일까?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지? 그리고 언제까지 구애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쩌다 이렇게 지독한 짝사랑에 빠져든 것일까…     


 사실 우리는 원래 친구사이였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늘 집에 혼자 있었는데 학원에 다닐 형편은 아니었고,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시간을 때우거나 하는 일은 자주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늘 책을 읽었다. 가난한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풍족했던 건 책이었는데, 경비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없는 돈을 아껴가며 세계명작 동화전집이나 과학 탐구 전집 등을 사주셨다. 나는 책상에 빼곡하고 균일하게 꽂힌 전집들 속에서 매번 새로운 세상을 뽑아 들고 흥미로운 친구들과 만나 놀았다. <비밀의 화원>과 <소공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은 내가 각별히 생각하는 친구들이었다. 좀 더 머리가 큰 중학생이 되어서는 양귀자 님의 <모순>, 신경숙 님의 <외딴방>과 친하게 지냈다. 세상이 애써 감춘 진실에 가닿을 수 있게 해주는 똑똑하고 재밌는 친구들. 그들이 섬세하고 날카롭게 벼려낸 문장들에 나는 매번 심장을 찔렸고, 그 성숙한 친구들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마 내 유년시절이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았다면, 책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었고, 뭐든지 참 쉬운 밥 로스 아저씨를 보면 그림을 배우고 싶기도 했다. 영화도 좋아해서 비디오테이프를 자주 빌려다 보았다. 아마 예술을 두루 사랑하는 아이였기에, 문학도 어느 정도 사랑했던 것이지 꼭 문학이어야만 했던 건 아닐지도 모른다. 대학에 가서도 문학 동아리에 들지 않고 클래식 기타 동아리 활동을 하며 기타와 술(캠퍼스 낭만의 절정)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대학생 때는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인생에 도움이 되는 책들, 그러니까 심리학 책이나 자기 계발서를 더 많이 읽었다. 하지만 심리학 책이 내 신경증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자기 계발서가 나를 계발시켜 주지 못하면 결국 소설 씨에게 돌아갔던 것 같다. 소설 씨는 방황하는 나를 언제나 군말 없이 받아줬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는 법도 없었다. 그런 은은하고도 잔잔한 매력에 나는 점점 빠져들었나 보다.

 

 사실 대학교 1학년 때는 자퇴하고 문창과 입시 준비를 할까 고민하기도 했었고, 본격적으로 국어 임용을 준비하기 전에는 3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습작기를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현실 씨가 나에게 너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나는 소설 씨가 어렵게 내밀어준 손을 잡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구질구질하게 늘 소설 씨를 마음에 품고 있었고, 결국 늦바람이 나서 현실 씨를 내동댕이쳤다(퇴직을 했다). 내 모든 걸 다 버리고 소설 씨에게 갔지만, 이미 너무 늦은 걸까? 요즘 나에게 찬바람 쌩쌩이다. 그리고 멀리서만 동경하던 사람과 막상 진짜 사귀고 보니(?), 이 사람 참 까다롭고 고고하다. 시간을 정말 많이 투자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작가니까 어디 가서 아는 척 좀 하려면 영미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세계 문학도 읽어야지, 동시대 문학을 위해 내가 놓친 20여 년 치 한국 현대 소설도 읽어야지, 또 소설만 읽어서는 깊어질 수 없으니 각종 교양 도서들도 읽어야 한다. 그런데 또 책만 읽는다고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직접 소설을 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소설 쓰다 막히면 작법서도 읽어야 하고 다른 선배 소설가들이 미리 징징대 놓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에세이도 읽고 싶어 진다. 하지만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고, 생업과 집안 살림도 해야 하니 책이고 뭐고 다 귀찮아질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괜한 반발심이 들어서, “책은 원래 시간과 여유가 많은 사람들이 고상한 척하면서 읽는 거잖아, 게다가 나는 사는 게 바빠서 우아하고 감미로운 문장은 쓰지 못해.  지루하기만 한 묘사 딱 질색이거든.” 이렇게 말하면서 쉽고 재밌는 소설만 쓰리라 결심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또 문단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꿈을 이뤘다는 생각이 들지 못할 것 같고, 상상 속 동물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전업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원대한 꿈이 있다.(일하기 싫어 싫어 병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 또 전업 작가가 되면 책 읽을 시간이 많아지니 더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고, 출판사랑 선계약을 하고 취재차 외국으로 나가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러면 또 새로운 장소와 사람을 만나 새롭고 짜릿한 소설을 쓸 수 있겠지. 나도 그런 선순환을 타고 싶으니 그런 소설가가 될 수만 있다면(그렇게 좋은 작품을 쓸 수만 있다면) 남은 내 삼십 대와 사십 대 정도는 바쳐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이후엔 어떻게 될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되면? 돈도 못 모으고,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우울과 좌절과 후회 속에 허덕이다 죽고 싶어지지는 않으려나?  


 얼마 전에 함께 소설을 공부하는 동료들과 10년 전 발행된 기사를 보며 씁쓸해했던 적이 있다.

 2002년에 등단한 작가들의 10년 후 모습을 조사한 기사였는데, 신춘문예와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작가 48명 중에 최근 2년 동안 작품집을 낸 사람은 고작 5명이었고, 근황이 파악된 33명 중 전업 작가는 3명에 불과하다는 기사였다.

출처 : 시사in <등단 10년 차 작가, 어떻게 살고 있나>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23

48명 중에 3명, 약 6퍼센트의 작가들만 글로 먹고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나는 왜 진작 이런 현실을 파악해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몸을 던졌을까ㅎㅎ)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치열한 구조 속에서 위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는 진짜 프로들의 세계이고, 실력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정말 가난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다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연장되면, 나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는데, 나는 적어도 소설 때문에 죽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설 씨, 적당한 때에 저한테 오시겠어요? 그 전까지는 열렬히 사랑해 드릴게요, 더 성실히 말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만큼만 소설 씨도 나를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만큼만 소설 씨도 나를 사랑해 주기


* 안녕하세요 가하입니다. 두 번째 연재는 성공했네요!

퇴근 후 오후 3시쯤 카페에 가저녁 7시 30분 언저리에 발행하는 실시간 연재입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흥미롭게 보아주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



[*토요일 퇴근 후 카페에 가서  3시에서 7시 30분 사이에 써서 올리는 실시간 연재입니다. 그래서 모든 글이 초고입니다. 사실 인생도 그렇지 않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