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04 책상 앞에서 시작된 일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그게 처음부터 인생 목표였던 건 아니지만,
도무지 생각해도 회사에 9 to 5 출근하는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월급날이 예고되어 있으며,
무언가를 쌓아갈 수 있는 직장.
그게 바로 '공공 조직'이었다.
나는 SP-04 직급으로 시작했다.
국세청에 입사했고, 업무는 비교적 단순한 행정 지원이었다.
처음엔 그 번호가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중에야 알게 됐다.
이 숫자 하나가 캐나다 공공 조직 안에서 어떤 문을 여는지.
내 매니저는 SP-02로 시작했다.
우편을 분류하고, 메일을 전달하고, 종이를 정리하던 자리였다.
지금은 캐나다 서부 지역의 감사관 팀을 총괄하는 관리자다.
15년을 조직 안에서, 내부 채용만으로 올라온 사람.
그 사람을 옆에서 보며 확신하게 됐다.
“공무원은 어디서 시작했는지가 아니라, 안으로 들어갔는지가 중요하다.”
입사 초기엔 ‘들어간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과,
‘여기서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처음엔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조차 몰랐다.
누군가는 팀 회의를 주도했고, 누군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성격이든, 공공 조직 안에선 각자의 자리가 있었다.
캐나다 공무원 조직은 외부에겐 복잡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CR, AS, PM, SP, CO...
코드처럼 보이는 이 직급들은 각기 다른 역할과 범위를 뜻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입구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특히 자격 조건에 '고등학교 졸업(secondary school diploma)'만 있으면 지원 가능한 entry-level 포지션은 많다.
대표적인 건 다음과 같다:
SP-02, SP-03, SP-04: 세무·행정 지원직
CR-03: 민원응대, 문서 정리, 전화 상담 등
AS-01: 일반 행정 보조
PM-01: 프로젝트 지원
GS-STS: 물류, 창고, 체력직 포함
이런 자리들은 일단 들어가기 쉬운 대신,
들어간 이후에 조직 내부에서 이동하거나 승진하기 유리하다.
실제로 공무원 채용의 80% 이상은 내부 채용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처음 입사하고 몇 개월간, 내가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전화벨은 매일 울렸고, 숫자와 서류는 끝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런 일들이 루틴이 되었고,
루틴 속에서 나만의 속도로 숨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조직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모두 특별한 스펙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수가 적고, 제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용히, 꾸준히, 오래가는 사람들.
그건 나에게도 위로가 되는 사실이었다.
‘눈에 띄지 않아도 괜찮다.’
‘빠르게 승진하지 않아도 괜찮다.’
‘일단 들어가서 나만의 속도로 걸으면 된다.’
그리고 공무원 조직의 또 하나의 장점은,
월급이 해마다 정해진 기준에 따라 꾸준히 인상된다는 것이다.
성과급이 없다고 아쉬워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변동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예측 가능한 삶이 있었다.
내가 아무리 조용히 있어도,
일정 시간과 경력을 쌓으면 급여가 차근차근 올라갔다.
또 하나,
모든 공휴일을 쉰다.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국경일, 심지어 Civic Holiday 같은 작은 휴일까지 포함해서
달력에 표시된 날은 확실히 쉴 수 있다.
적으면 매달 이틀, 많게는 매주 long weekend가 된다.
가족과의 시간, 혼자만의 회복, 리듬 있는 일상이 가능해진다.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이 조직에서 오래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너만 보아도 그랬던 것이, 주 4일 근무였기 때문에 여가 활동을 즐길 시간이 여유롭였다.
공무원을 꿈꾼다면, 완벽한 조건만 기다리지 말고
지원할 수 있는 자리에 먼저 손을 뻗어보자.
모든 게 준비된 순간은 오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문이 먼저 열려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입사했고, 실제로 그 이후 여러 부서를 경험했고,
군 조직으로도 전환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모든 시작은 '일단 들어간 자리'에서 가능해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말하고 싶다.
“처음엔 어디든, 들어가는 게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