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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수미데로 협곡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14

by Segweon Yim

3500만 년 걸려 만들어진 협곡


산 능선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수미데로 협곡은 웅장했다. 거대한 치아파스 산지를 수직으로 깎아내듯 깊이깊이 파인 협곡 바닥을 흘러가는 그리할바 강이 마치 커다란 이구아나처럼 보였다. 조그맣게 보이는 유람선 한 척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으나 그것은 너무 멀리 있어서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협곡 안에 갇혀 정지된 물은 너무 평온해서 관광선이 일으키는 물결조차 없었다면 그냥 도화지에 칠해진 푸른색 물감의 띠처럼 느껴졌다.


그리할바 강물이 호수가 되어 수미데로 산지를 휘감고 있다.


관광용 유람선을 타는 선착장 앞의 그리할바 강은 이미 강이 아니었다. 그것은 흐르지 않는 강이었다. 흐르지 않는 강은 그냥 폭이 좁고 긴 호수에 불과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강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양쪽의 산은 마치 병풍을 쳐놓은 듯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렇게 치솟은 절벽의 높이가 높은 곳은 1천 미터에 이른다고 했다. 저 산 위쪽을 흐르던 강이 수직으로 1천 미터를 깎아내는데 대략 3500만 년이 걸렸다고 한다. 사람이 지구 상에 등장한 것이 기껏 수백만 년이라고 하니 몇천만 년이란 시간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긴 시간이다.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다.


협곡을 가르며 달리는 보트의 흰 포말이 마치 거대한 새의 날개 깃처럼 보인다.


본래의 계곡을 걸을 수 있다면


호수의 깊이는 130미터에 이른다고 하는데 물이 이처럼 흐르지 않는 것은 13킬로미터 아래에 있는 치코아센 댐 때문이다. 지금보다 130 미터 밑에서 콸콸 쏟아져 내려가는 계곡물을 따라 걸으면서 까마득히 솟아있는 수직 절벽을 올려다보는 것을 상상해보자.


물론 강 가에 사는 악어나 원숭이들 등 야생동물과 여러 종류의 새들로 인해 계곡에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댐이 지어지기 전의 자연 상태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호수로 변해버린 중국의 창쟝산샤(長江三峽)에서 처럼.


협곡 위를 떠 도는 독수리들


뭐가 살아남고 뭐가 사라졌나?


배를 타고 호수가 된 강을 내려가면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은 멸종 위기종이라는 미국악어를 비롯해서 거미원숭이(spider monkeys)등을 볼 수 있었고 하늘에는 독수리 종류로 보이는 맹금류도 보였다. 물 위에는 안동 집 앞에서 흔하게 보는 백로와 가마우지 종류 그리고 멕시코의 바닷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펠리컨들이 많았다.


이들은 댐이 없었을 때도 지금처럼 많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 뿐 아니라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물속의 생태계도 큰 변화를 겪었으리라. 아마도 뭔가는 살아 남고 뭔가는 사라지고 뭔가는 새로 왔겠지.


크기가 작은 독수리 종류
수많은 가마우지 떼들이 호수에 날아다닌다. 이들의 식욕은 엄청나서 호수의 어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
미국 악어와 거미 원숭이
왼쪽부터 민물가마우지, 펠리칸, 백로


계곡의 흐르는 물에 사는 어류들은 사라지고 호수에서 서식하는 큰 물고기들이 많아졌으리라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안동의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물속에 사는 어류의 종류에 변화가 왔다면 그 고기를 먹고사는 조류들도 큰 변화가 왔을 것이다. 물속에서의 생태계 변화는 먹이사슬의 구조를 바꿔놓게 되어 물 위의 생태계에도 큰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수미데로 협곡의 명물인 거대한 이끼. 절벽 위에서 흘러내린 이끼 위에 오랜 세월 동안 덧 써진 이끼가 바위 표면을 두텁게 덥고 있다.


강을 막고 선 북미에서 가장 높은 댐


협곡의 바로 옆에는 치아파스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툭스틀라 구티에레스가 있다. 이 도시에서 배출되는 각종 쓰레기와 오물로 인해 협곡의 오염은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협곡의 상류에서 진행되는 벌목 사업은 한 해에 5천 톤의 폐기물을 배출한다고 하니 협곡의 오염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댐으로 막혀 호수로 변한 강임에랴, 말할 것이 있겠는가?


협곡 유람의 끝 지점인 치코아센 댐. 물 위에 띄운 드럼통은 이 곳 펠리컨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배에 그물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어부들인 듯하다. 그러나 이 같은 어부들의 보트는 거의 보기 힘들었다.
수많은 쓰레기로 협곡을 오염시키고 있는 툭스틀라 구티에레스 시


1974년에서 1980년 사이에 지어진 치코아센 댐은 높이가 261미터로 북미에서 가장 높은 댐이라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댐의 아래쪽으로 갈 수 없어 댐의 외관을 볼 수는 없었으나 안동댐의 높이가 83미터이니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멕시코 국영 전력회사(CFE)는 댐을 공사하면서 주민들에게 토지구입비의 지불, 수도시설과 학교 및 보건소 등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멕시코 전력회사 로고인 CFE라는 글자가 보이고 그 위에 댐을 만드는데 동원된 노동자들로 보이는 동상이 서 있다.


멕시코에도 봉이 김선달이 있다?


거기에 더하여 CFE는 이 댐에서 10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두 번째 치코아센 댐을 건설했다. 강 유역에 사는 농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들은 거세게 저항하고 야당과 합세하여 투쟁을 벌였다. 농민들은 단식투쟁까지 해가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승소했으나 댐은 그에 상관없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협곡의 주변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나오아(Nahoa) 족과 소께(Zoque) 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전통적인 원주민 지역이다. 멕시코의 가난한 원주민들은 스페인 사람에 학살당하고 살던 땅에서 쫓겨나 겨우 겨우 혈통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거대 자본에 밀려 또다시 삶의 터전을 쫓겨나게 된 것이다.


관광객을 상대로 음료나 과자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현지인들


본래 강은 만든 사람도 없고 주인도 따로 없는 것인데 돈 있는 사람들은 그 강이 자기 것처럼 거대 구조물을 짓고 살던 사람을 내 쫒는다. 내가 사는 안동에서도 그렇게 내몰린 사람들을 수 없이 볼 수 있으니 이게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봉이 김선달은 세계 도처에 있는가보다.


성모님, 강을 다시 흐르게 하여 주소서!


협곡은 석회암 지형으로 양쪽의 절벽에는 종유석 동굴이 많이 있다. 그중의 한 동굴은 벽에 다채로운 색깔들이 밑에서도 뚜렷이 들여다 보인다. 이 동굴은 그래서 색의 동굴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밖에서 잘 보이는 동굴 입구에 과달루페 성모상을 세웠다. 현지 주민들은 이 동굴을 신성시하고 기도를 올리고 있지만 성모가 이들의 생활을 안정되게 도와주거나 막힌 강을 다시 흐르게 해줄 것 같지는 않다.


색의 동굴 입구에서 굴 밖 세상을 향해 서 있는 과달루페 성모는 흐르지 않는 강을 다시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수미데로 #치코아센 #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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