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 온 둘째 날은 빨래하고 숙소에서 그냥 쉬기로 했다. 우유니에서부터 가지고 온 빨래 거리가 제법 많다. 세탁실로 가서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방으로 돌아와 잠시 잠이 들었었나 보다. 정신 차리고 세탁실로 가니 호텔 여직원이 다 된 빨래를 모두 꺼내서 바구니에 담아 놓았다. 방안 가득 빨래를 널어놓고 밖으로 나왔다. 그냥 방 안에서 무료하게 빈둥거릴 수 없어 박물관이나 찾아보기로 했다.
이곳에서 갈만한 박물관은 구스타보 르 페이지 박물관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인터넷 자료의 주소를 구글 지도에서 검색해서 천천히 걸었다. 내가 묵은 숙소는 시 중심의 동남쪽 끝자락이고 박물관은 북쪽 외곽이다. 끝에서 끝인 것 같은데 시 자체가 워낙 작아서 걸어서 시내를 관통하는 데 기껏 2,30분이면 족하다.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해가면서 천천히 산보 겸해서 박물관 쪽으로 걸었다.
구스타보 르 페이지 박물관의 정문 입구. 문 옆의 벽에 걸린 건물 명태는 '북부 가톨릭 대학교(Universidad Católica del Norte)'라는 명칭만 있다.
지도에 표기된 박물관의 위치까지 갔다. 시가지에서 좀 떨어진 사막 모래밭에 따로 떨어진 곳인데 인터넷에서 본 박물관 건물이 없다. 얇고 허술한 담장 위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가시철조망을 둥글게 감아올렸고 대문 옆 담벼락에는 북부 가톨릭 대학교(Universidad Católica del Norte)라는 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컨테이너 건물들이 몇 동 있을 뿐 박물관으로 볼 수 있는 건물도 없고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입구에 박물관 글자도 보이지 않으니 여기가 아닌 듯했다.
다시 거기서 모래밭을 걸어 나와 근처 골목을 찾아보았다. 이 동네는 도대체 관광객도 안 다니는 곳 같았다. 물어볼 데도 마땅히 없어 빙빙 돌다가 다시 구글 지도를 따라 아까 그곳으로 갔다. 이번에는 마당에 어떤 사람이 나와서 꽃밭을 가꾸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무세오(museo) 어쩌고 했더니 바로 앞에 있는 컨테이너 건물을 가리켰다.
컨테이너를 붙여 만든 박물관 건물(왼쪽)과 사무실 건물(오른쪽)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 박물관 표를 파는 곳이 있었다. 표 파는 곳이라야 티켓 박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복도 끝 테이블에 여직원이 앉아 표를 주었다. 카메라를 보더니 '노 카메라'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책자를 하나 주었는데 유물 설명서였다. 이 설명서는 관람 시 참고하다가 나갈 때 돌려주어야 한다.
인터넷에 올라온 박물관 사진 속의 건물들은 아마도 헐린 듯했고 앞으로 새로 박물관을 신축할 계획인 듯한데 현재의 전시실은 유물 수장고를 겸하여 임시로 만든 듯했다. 유물의 내용은 시설에 비해서 상당히 충실했다. 아타카마 사막에서 발굴된 석기 토기 무덤 관련 자료들, 그리고 곡물류나 직물류 등이 건조된 상태로 전시되고 있었다. 소장된 유물은 총 38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 뿐 아니라 내가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암각화 자료도 상당히 있으며 박물관 외부 벽에 암각화의 복제품이 일부 걸려 있었다. 앞으로 현장 답사 이야기를 쓸 때 소개하겠지만 아타카마 사막에는 암각화를 비롯해서 대규모의 땅그림 즉 지오글립스도 여러 군데 존재한다.
박물관 벽에 걸린 암각화 복제품 일부. 위의 왼쪽 구석에 등이 굽은 인물이 있는데 이는 미국의 서남부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코코펠리라고 하는 인물상이다.
동물 그림은 세계 어느 곳의 암각화나 비슷하며 여기서도 쪼아 새기거나 갈아서 새긴 선각 그림들이 많았고 간단한 실루엣 형태의 면각 기법도 있었다. 선각화 인물상 중에는 미국 서남부 사막지역에 있는 코코펠리(Kokopelli)라고 하는 그림과 매우 흡사하여 남미 서해안 쪽의 주민들이 북미 서남부 사막지역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코코펠리는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등지의 사막지역에 있는 암각화로 등이 굽은 인물이 피리를 불거나 들고 있는 형태의 그림이다.
또 하나 흥미 있는 그림으로는 우주인 같은 옷을 입고 가슴에 태양신으로 보이는 둥근 얼굴을 새겨 넣은 것이다. 이 지역의 태양신 숭배를 암각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이처럼 가슴에 태양을 안고 있는 암각화의 사례를 중국의 내이멍꾸 지역에서도 볼 수 있어서 흥미롭게 보았다. 확인해보지는 못했으나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서 북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레인보우 밸리라는 곳에 암각화 유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 복제 암각화들도 레인보우 밸리 유적에 있는 것으로 추측했다.
제의용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가슴에 태양신의 얼굴을 품고 있으며 한 손에 창을 들고 있는 인물상
이 박물관은 아타카마 사막의 원주민들 즉 아타카메뇨들의 문화를 속속들이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또 연구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박물관을 처음 만들게 된 것은 1950년대 이곳 가톨릭 교구의 사제로 부임한 구스타보 르 페이지(Gustavo le Paige)의 조사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덴마크 출신의 가톨릭 사제이면서 1955년 이곳에 부임해 온 뒤 20년 넘는 시간을 아타카마 사막의 고고학 조사와 연구에 바쳤다.
그는 아타카마 사막의 원주민의 역사를 고고학 연구를 통해 밝히는 것을 사제의 사명으로 삼았던 듯하다. 아타카마 사막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원주민들이 어떻게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유지시켜 왔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문헌자료가 전혀 없음으로 고고학적 조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스타보 르 페이지의 20년에 걸친 연구는 아타카메뇨들의 사막에서의 생존과 문화적 계통을 밝혀내는데 엄청난 결과를 만들게 되었다. 이는 성경의 말씀을 아타카마에 심는 것 못지않게 큰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에 있는 페이지 신부의 두상
고고학자로서의 활동 외에도 그는 아타카마 지역에서 병원, 학교, 도로 등의 건설에도 힘썼고 그의 다양한 방면에의 헌신적 봉사로 인해 명예 시민권을 받는 등 칠레에서 외국인에게 주는 최상의 영예를 얻었다.
그는 1980년 5월 19일 산티아고에서 사망했으나 그의 유언에 따라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 묻혔다고 한다. 또 페이지 신부는 칠레 아이들의 동화책에도 등장하며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시내의 중앙광장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 이름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 그는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뿐 아니라 칠레 사람들에게 영웅적인 인물이 되었다.
박물관은 안토파가스타에 있는 북부 가톨릭 대학교에서 처음 설립한 것이며 현재 그 대학의 고고학 연구소를 겸하고 있다. 머지않아 컨테이너 신세를 면하고 첨단 시설을 갖춘 본격적인 박물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때가 기대된다.
안데스를 병풍 삼은 죽은 이들의 마을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의 공동묘지 정문
박물관이 아타카마 사막 주민들 조상이 남긴 유품들의 수장고라면 공동묘지는 그 유품을 남긴 사람들이 죽어서 사는 마을이다. 박물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의 공동묘지가 있다. 물론 이 묘지는 박물관 유물들을 남긴 사람들의 묘지는 아니지만 현재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주민들의 가까운 조상들의 분묘들이다.
흙벽돌의 토담으로 둘러싸인 공동묘지에는 크고 작은 여러 분묘들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부터 죽는 사람은 어디 다른 곳으로 묘지를 정해야 할 정도로 빈 공간이 거의 없었다. 아타카마 사막이 아무리 넓어도 이 지역 주민들의 묘지로 쓰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이나 또는 서구의 어떤 곳을 여행하든지 나는 공동묘지를 찾아보곤 한다. 묘지에는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의 묘도 있고 또 그 지역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기도 하다.
오색의 십자가들이 죽은이들의 집을 꾸미고 있다.
안데스 산맥의 흰 눈 덮인 산봉들을 바라보는 이곳 사막의 모래밭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죽은 이들의 집들을 보면서 이 집들이 이렇게 늘어가다가는 곧 죽은 사람들의 마을이 산 사람들의 마을을 추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들은 대체로 다른 지역에서 보는 것보다 많이 소박했다. 대부분 흙벽돌을 이용해 매장한 땅 위에 야트막한 장방형의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
토단과 십자가는 흰색으로 치장을 한 것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흙벽돌 구조 그대로 둔 것들도 많았다. 그 경우 십자가도 나무 십자가 그대로인 경우가 많았는데 대부분 십자가에 흰색, 검은색,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등의 여러가지 색을 칠했다. 그래서 공동묘지는 울긋불긋한 나무십자가의 숲이 되었다.
크고 작은 무덤들이 운동장에서 신 앞에 도열해 조회를 서는 듯하다.
그래도 집안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높거나 경제적으로 괜찮은 집안의 사람들의 것으로 보이는 묘들은 같은 묘지에 묻혔어도 묘의 규모나 외부의 장식 등이 차이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흙벽돌의 구조이지만 높은 기단 위에 교회의 종탑 모양의 집을 짓고 하늘 높이 십자가를 세운 묘가 눈에 들어왔다. 묘지 뒤로 안데스의 설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어느 묘의 모습은 공동묘지 안의 다른 묘들을 제압하는 듯한 아우라가 풍기기도 했다.
구스타보 르 페이지 신부의 묘가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 못하였다. 아마 가톨릭 신부들의 묘지가 따로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흰 눈 덮인 안데스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흙벽돌의 무덤
아타카마 사막의 요새 푸카라
아타카마 사막의 작은 마을에 도착한 지 사흘째, 4월 9일이다. 오늘은 우유니에서 함께 했던 양군과 합류한다. 점심 후 푸카라 유적을 함께 가보기로 했다. 유적은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다. 유적의 앞으로는 산 페드로 강이 흐른다. 강변은 대부분 모래층으로 형성되어 있지만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이곳이 사막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이다. 이러한 좋은 자연환경으로 인해 이곳은 캠프장 등 휴식 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산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푸카라 요새 유적
푸카라 유적은 일종의 성채의 형식을 갖춘 곳이다. 푸카라(Pukará)라는 말은 요새라는 뜻이라고 한다. 유적의 명칭은 키토르의 푸카라(Pukará de Quitor)이다. 키토르는 유적이 있는 곳의 지명이다. AD 1300년 경에 지었다고 하는 유적 안에는 모두 164채의 건축물이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 돌과 흙으로 쌓은 담과 건물의 벽체들이 남아 있다.
마을은 크고 작은 건물들이 밀집된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마을 전체는 거의 정삼각형의 평면에 조성되어 있는데 동쪽은 산 페드로 강의 푸른 녹지를 향하고 있고 서남쪽과 서북쪽은 거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동남쪽의 경사지에 길게 성벽을 쌓아 외부와 단절되도록 만들었다. 천혜의 요새인 셈이다.
푸카라 유적의 석축과 돌담들
유적 부근의 땅은 척박한 바위투성이지만 모래와 돌틈에 다육 식물들이 예쁜 꽃을 피우고 있다.
성벽은 121미터가 잘 남아 있고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약 3미터 된다고 한다. 중앙에는 망루도 있다고 하는데 80킬로미터까지 보인다고 하니 요새로서의 기능은 매우 충실히 작동되었던 듯하다. 주로 안데스 산맥 동쪽의 세력이 산맥을 넘어 침략해 오는 경우가 많아 그들을 막기 위한 시설로 보는 견해가 많다. 유적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된 것은 16세기 중반 스페인의 침략자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유적의 외곽에 출입금지 울타리가 둘러 있어서 유적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몇 년 전 이곳에 큰 지진이 있었는데 그때 훼손된 부분의 보수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알려지기로는 지진이 났을 당시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시가지가 대부분 무너졌는데 이 푸카라 유적은 전혀 무너진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훼손된 곳이 상당 부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미 사람들에게 시로 봉사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유적 동남쪽의 계곡을 건너 주로 모래땅으로 이루어진 경사지를 따라 지그재그로 오르면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길을 따라 산책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중턱에 커다란 석비가 하나 보였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라는 시인의 시비였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시비. 봉사(SERVIR)라는 시 제목이 보인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1889-1957)은 칠레의 여류시인으로 칠레인으로 뿐 아니라 1945년 남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남미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뒤에 칠레에서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블로 네루다는 열두 살 때 가브리엘라를 만나 문학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가브리엘라의 시는 주로 자연, 사랑, 어머니, 어린이 또 남미의 원주민의 정신세계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고 하며 남미의 정체성을 시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시비에 새긴 시는 '봉사의 즐거움'이라는 시로 자연과 사람 그리고 신과의 관계를 봉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시 내용이 자연과 멀리하고 있는 요즘 우리들 가슴에 닿는 부분이 많다. 스페인어를 알지 못하지만 영역과 스페인어 원문을 번역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억지로 한국어로 바꾸어 보았다. 번역의 오류가 있을 것이지만 대강의 의미는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자연은 봉사를 갈망합니다.
구름이 봉사하고 바람과 밭고랑이 봉사합니다.
그곳에 심어야 할 나무가 있다면 당신이 그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돌이켜야 할 실수가 있다면 당신이 돌이킬 수 있습니다.
당신은 들판에서 돌을 치우고,
사람의 마음에서 증오를 치우며,
문제들로부터 어려움을 치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롭고 정의롭게 되는 기쁨이 있으며,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한한 봉사의 행복입니다.
모든 것이 이미 끝이 났다면 세상은 얼마나 슬플까요?
심을 장미 덩굴이 없고,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당신 스스로를 쉬운 일에만 묶어두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피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일을 성취해야만
성취로 볼 수 있다는 오류에 빠지지 마십시오.
좋은 봉사에는 작은 행동들이 있습니다:
테이블 장식하기,
책 정리하기,
어린 소녀 머리 빗어주기.
저쪽에는 비판하는 사람이,
이쪽에는 파괴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은 봉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봉사는 낮은 존재만을 위한 노동이 아닙니다.
열매와 빛을 주시는 하나님이 봉사하십니다.
그의 이름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봉사하는 하나님.
그리고 그의 눈은 우리의 손 위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루가 끝날 때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오늘 봉사하셨습니까? 누구에게 하셨지요? 나무에게, 친구에게, 어머니에게 하셨나요?"
산 능선에서 보는 산 페드로 강
주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산책길 능선 위에 올라서면 산 페드로 강의 푸른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는 아타카마 사막을 흐르는 산 페드로 강과 그 강으로 만들어진 오아시스에 세워진 마을이다. 산 페드로 강은 이 마을의 젖줄이고 수천 년 아타카마 사막을 살아온 아타카메뇨들의 문화를 만들어낸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산책길 중간의 새로 쌓은 성문을 통해 보는 안데스의 리칸카부르 화산
산책길의 능선 중간에 돌로 쌓은 성벽과 성문이 있는데 요즘 조성한 것이다. 산책길을 계속 올라 길의 마지막에 이르면 전망대가 있고 거대한 십자가 조형물이 서 있다. 전망대에서 북쪽을 보면 주름진 사막의 언덕과 골짜기들이 마치 평생 사막에서 살아온 노인의 주름살처럼 보인다. 그곳을 데스 밸리(Death Valley)라고 하는데 미국 캘리포니아의 데스 밸리와 비슷한 데서 붙인 이름 같다.
데스 밸리의 주름진 산능선들
데스 밸리의 붉은 산과 뒤의 모래산 칼날 능선에 석양이 비치고 있다.
남미는 어느 나라나 할 것 없이 산 위 높은 곳에는 큰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천국과 가까운 곳이라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십자가 위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하나님을 향해 했다는 말이다. 왜 하필 이 귀절일까는 내 능력으로 알 수가 없다. 십자가 그늘 밑에는 여행에 지친 몸을 누이고 땀을 식히는 젊은이가 있었다.
양군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보니 오늘은 내 생일날이다. 집에 있을 때야 가족들이 챙겨주기도 하지만 내 스스로는 생일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살아 왔는데 이렇게 집에서 멀고 먼 곳에 오니 저녁 한끼라도 좀 잘 차려 먹고 싶었다. 양군과 함께 어디 괜찮은 식당엘 가서 먹은 것 같은데 어디서 무얼 먹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주름진 붉은 바위산들과 물이 말라버린 산 페드로 강
아타카막 사막 건너로 보이는 안데스 연봉
전망대 높은 곳에 세운 십자가 탑. 꼭대기에 '주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성경 귀절을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