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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Jul 12. 2022

바위 속의 또 다른 세상, 오프라기아 바위그림 유적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64

차 엔진도 멈춰버린 열사의 고원을 넘어


운전기사는 내가 준 오프라기아 바위그림 유적에 대해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아사파 계곡의 땅그림과 혼돈했던 것 같다. 그는 내가 갈 준비를 하자 이제 다 보았으니 시내로 돌아가자고 했다. 내가 휴대폰에 들어 있는 코드파(Codpa) 마을 근처의 오프라기아(Ofragia) 바위그림에 관한 정보를 다시 보여주었다. 자료를 다시 본 운전기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더니 코드파로 가자고 했다.


코드파는 생각보다 멀었다. 차는 아사파 계곡에서 나와  아리카 시내를 거쳐 이키케에서 아리카로 왔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아리카 시내 뒤쪽의 사막을 30분 정도 달리자 차카(Chaca) 마을이 나왔다. 차카는 널찍한 계곡에 비교적 많은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었고 강 가에는 나무도 제법 많았는데 차는 계곡을 따라 계속 상류로 올라갔다.


계곡에는 케브라다 데 비토르 강이 좁은 폭으로 가늘게 흐르고 있었는데 그 정도 강물도 이런 사막지대에서는 이처럼 푸른 초록 지대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숨을 쉴 수 있는 훌륭한 산소 공급원이 되어주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휴식을 위한 공원과 휴양지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였다.


엔진 과열로 차가 멈춘 덕에 멀리 흰 눈을 이고 있는 안데스를 바라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차는 강가에서 다시 고원의 사막으로 올라갔고 강을 내려다보면서 강과 같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강이 사막에 막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길이 갈라지고 양쪽의 모래밭 풍경이 좀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 차가 멈추었다. 차의 엔진이 멈추어버린 것이다. 에어컨도 틀지 않고 달리던 차의 엔진은 뜨거운 태양 볕에 달궈진 채 더 이상 가동을 하지 못했다. 차가운 냉수라도 냉각수 통에 부어주면 좋을 텐데 이렇게 멀리 올지 몰랐는지 여분의 냉각수도 준비되지 않은 듯했다. 보네트를 열고 이것저것 만지던 운전기사가 나보고 차에서 내리라 했다. 내려도 햇볕을 피할 곳은 없었지만 바람이 불어 차에 있는 것보다는 나은 듯 싶었다.


괜찮아요?

좀 쉬면 돼요.


이런 대화는 꼭 이렇게 서로 말을 나누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대로 또 그는 그대로 한 말을 내가 나의 뇌피셜로 번역해본 것이다.


코드파 마을의 산 마르틴 데 투르스 성당의 종탑. 성당의 초창은 1618년이라지만 현재 건물은 19세기 말에 재건된 것이다. 칠레 국가기념물이다


얼마를 쉬다가 엔진을 거니 다시   시동이 걸렸다. 우리의 목적지인 오프라기아 바위그림이 있는 마을 코드파(Codpa)는 거기서도 25킬로미터나 더 가야 했다. 코드파는 우리가 처음 계곡으로 들어설 때 만났던 케브라다 데 비토르 강의 상류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아리카에서 114킬로미터나 떨어진, 생각보다 훨씬 먼 곳이었다. 점심도 못 먹은 채 땡볕에서 차 때문에 고생을 한 끝이라 일단 식당부터 찾아들었다. 식당은 우리가 들어간 곳이 유일하게 문을 연 곳처럼 보였다.


휴양지를 끼고 앉은 산비탈의 바위그림


코드파는 휴양지로 알려진 곳이다. 계곡 바닥에는 케브라다 데 비토르가 흐르고 그 주변에는 버드나무처럼 보이는 푸른 관목들이 우거져 있었다. 이곳은 구아바라는 과일이 많이 난다고 하고 와인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계곡 사이에는 풀장을 갖춘 휴양시설이 들어서 있고 꽤 많은 방갈로 형태의 숙박시설들이 보였다. 아마도 규모로 보아 이곳은 아리카 일대에서 가장 대표적인 리조트 형태의 휴양시설인 듯했다.


바위그림 유적과 코드파 계곡


마을에는 국가기념물로 지정된 성당을 비롯해서 박물관도 있다. 운전기사는 계곡의 숲과 리조트 등도 둘러보면 좋다고 했으나 나는 곧바로 암각화 유적으로 가도록 했다. 오프라기아 바위그림은 코드파 마을에서 약 5킬로미터 하류로 내려가서 볼 수 있었다.


바위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지점부터 케브라다 데 비토르 강의 남쪽 산비탈은 거의 붉은색 바위로 덮여 있었다. 다른 곳에 비해 이곳은 유별나게 바위들이 많았고 거의 산비탈을 뒤덮다시피 했는데 이로 인해 이 지역이 신성한 지역으로 정해진 것 같았다. 바위그림도 자연히 신성한 지역의 제의적 행위로써 새겨졌을 것이다. 한낮의 햇볕이 바로 머리 위에서 내려 쪼여서 바위그림들이 입체적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붉은색 표면을 쪼아내 바위의 밝은 속살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림을 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사람들이 동물을 끌고 가는 그림. 아래쪽의 동물을 끌고 가는 인물 하나는 발이 오른쪽 머리가 왼쪽으로 있어서 수직으로 서있는 사람과 직각을 이루며 새겨져 있다.  
아래에서 능선 위까지 있는 바윗돌들에 그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코드파 계곡은 아리카 지역에서도 특별히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음은 지금도 무성한 계곡의 숲과 풍부한 물 등으로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은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농경이 비교적 쉽게 발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안데스 산악지역에서 태평양 해안지역으로 연결되는 통로에서 매우 중요한 중간 거점이 될 수 있었고 그래서 두 지역의 물자교류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해 오기도 했다. 따라서 이 계곡은 경제적으로나 또 그에 기반한 종교적인 중심지로 발전해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곳의 바위그림이 내용 면에서나 규모 면에서 칠레 북부를 대표하는 유적임은 이러한 사회 경제적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코드파 계곡에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은 것은 대체로 2500년 이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나 바위그림의 제작은 이 지역의 다른 고고학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기원 1000년에서 1400년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이곳에서 농업이 발전하고 주민들의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 대체로 그 시기였을 것이라는 점과 연관된다.


그림들은 매우 다양하다. 대체로 바위에 새긴 그림(Petroglyphs)들이지만 드물게 붉은 안료로 그린 그림(Pictographs)도 보인다.


붉은 안료의 암채화로 기하학적 추상화들이다. 왼쪽 상단은 바둑판같은 격자무늬를 새기고 칸에 색칠을 한 것으로 암각화와 암채화의 기법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그림의 내용에는 동물이나 인물이 많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징 기호 같은 것도 상당히 많다. 동물 중에는 목이 길거나 발가락이 두 개로 갈라진 것들이 많은데 이들은 대부분 야마거나 또는 알파카나 과나코 같은 안데스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들이라 생각할 수 있다. 앞 뒷다리 모두 두 개의 발가락을 뚜렷하게 묘사한 그림 하나는 목과 머리가 훼손되어 안 보이지만 야마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그림은 앞발은 뒤쪽을 향하고 뒷발은 앞쪽을 향하고 있어 앞 뒷발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앞다리가 역방향으로 붙어있는 것으로 매우 부자연스러운데 다른 그림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어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새긴 것이 아닌가 한다.


앞발의 방향이 반대로 묘사된 동물.목과 머리가 훼손되었으나 발가락이 두 개인 것으로 야마 또는 알파카 등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인물상은 특이한 점이 보인다.  두 발은 서로 반대쪽으로 돌리고 두 다리를 엉거주춤하게 서있는데 두 팔은 어깨에서 수평으로 들었으나 팔꿈치에서 팔을 직각으로 내리고 있다. 머리는 마치 동물의 탈을 쓴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인물상이 이런 모습은 아니지만 이런 모습의 인물상이 대다수를 이룬다. 이런 모습은 동물탈을 쓰고 춤을 추는 동작의 한 순간을 묘사한 듯하다. 아마도 태양신에게 올리는 축제의 한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암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사시대 제사 의식의 한 장면이다.


동물탈을 쓰고 춤을 추는 모습의 인물상들이 동물과 함께 있다. 오른쪽의 깃발같은 것을 들고 있는 사람 역시 축제 참가자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태양을 묘사한 그림들. 왼쪽은 광선까지 묘사되었다. 오른쪽은 사람과 동물이 태양 주위에 모여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림 중에는 뱀을 묘사한 것들이 상당히 많다. 뱀의 묘사는 사막지대 암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몽골의 고비지역과 미국 서남부 사막지대의 바위그림에서도 자주 보았었다. 사막의 뱀은 대개 독사류로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고 또 땅 속과 지상을 오가는 존재로서 지하세계와 지상세계를 이어주는 신령한 동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뱀은 선사 또는 고대사회에서 신령한 존재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의 삼국시대 토기에서도 뱀 그림은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뱀을 징그러운 존재로서 원수 대하듯 하는 것은 혹시 기독교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분야이니 더 언급하기 어렵다.


그밖에도 특징적인 그림으로는 콘도르로 보이는 새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콘도르가 두 날개를 수평으로 벌리고 서 있는데 마치 날개옷을 입은 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듯하다. 제사장이 신으로 추앙받는 콘도르로 가장하고 제사를 드리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바위그림들을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워 내 눈에 들어온 그림의 일부를 아래에 늘어놓았다.

 

뱀이 묘사된 암각화의 일부. 오른쪽은 콘도르로 보이는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마치 사람이 날개옷을 입고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듯하다.
산 능선 위의 바위에 새겨진 동물들이 마치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는 것 같다.
바위그림을 따라 길을 걸으면 마치 동물들이 나를 따라오는 듯한 착각이 인다.
동물의 한 무리가 줄을 지어 이동한다. 가운데에는 두 팔을 벌린 사람이 보인다. 목축을 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목축하는 그림. 맨 밑 우측에 동물들을 이끌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동물들은 새끼와 함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런 묘사는 동물의 번식 또는 사람의 자손번식과 관계있을 것이다. 가운데 사람은 마치 스키 같은 것을 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을 새긴 바윗돌이 위에서 굴러 떨어져 있다. 지금도 구를 것처럼 아슬아슬한 바위들이 많다.
가운데 깊이 새긴 인물상이 있다.
야마로 보이는 동물들이 새끼와 함께 있고, 왼쪽에는 콘도르 오른쪽에는 뱀이 보인다.
바위그림이 산재된 산비탈에는 지금도 무너져 내리는 바위들이 위태롭게 보인다. 효과적인 보존책이 필요하다.

바위그림 유적을 돌아보고 코드파를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하늘에는 오후에 떴을 반달이 중천에 걸려 있었다. 돌아오는 길의 사막의 고원 한 복판에 대형 조형물이 보였다. 칠레 예술가들이 황량한 사막에 전통적인 신상의 형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조형물을 세웠다. 아직 남은 황혼 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조각 작품들은 밤의 사막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아리카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밤이 되었다.


이 먼 칠레 땅에서 나스카를 떠난 후 다시 못 볼 것 같았던 땅그림과 바위그림들을 만난 것이 행운으로 생각되었다. 혼자 호스텔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앞으로 내고자 하는 세계 바위그림 사진집의 마지막은 오프라기아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혼의 사막을 배경으로 서 있는 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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