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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Feb 23. 2021

장식에 대하여 (2)

장식이 내게로 왔다

  Henri Matisse(1869-1954), Large red interior(1948)


마티스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화폭 그득 모든 것이 장식 아닌 게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정반대로 그 어느 것도 선뜻 장식이라 말 할 수 없는 묘한 구석이 있다. 원색을 대놓고 쓰기가 두렵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마음먹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학창 시절, 그의 그림 앞에서 나는 서로 모순되는 감정에 무던히도 시달려야 했다.


언뜻 보기에 화폭 전면에 거침없이 펼쳐진 원색의 활달함 앞에서 한편으로는 나도 신나게 따라 그릴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막상 그리기 시작하다보면 화면이 금세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하여 결국은 붓을 내려 놓아야할 만큼 절망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리기가 제일 어려웠던 부위는 군데군데 흰 여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무엇보다도 그 여백은 그려진 것도, 남겨진 것도 아닌 것처럼 애매모호하게 느껴졌다. 여백을 경계지운 선들을 잘 살펴보면 언뜻 소품과 경계를 이룬 것 같기도 하다가 배경의 일부분이 되기도 하며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하였으니 종잡기가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는 어떤 선들은 교묘하게 틀어져 있거나 그림자를 암시하기도 해서 소품이 공간에서 떠다니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도록 나름 중력 방향에 대응하고 있는 듯, 화폭 구석구석에 복잡 미묘한 계산이 깔려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붓을 들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정물의 형상을 다 잊어버리고 순수하게 선과 면, 색깔 사이의 관계만 놓고 보아도 여백은 여느 동양화 못지않게 나름 ‘잘 비워낸 힘’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듯했으니 읽어내는 작업 없이 무조건 따라 그리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의 그림에는 선과 면, 평면과 입체, 그리고 벽과 바닥의 경계도 모호한데다 깊이를 포기한 듯하면서도, 사물들 사이 절묘한 전/후의 배치만으로도 더 오묘한 깊이를 구현해내고 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무엇이 장식이고 무엇이 골격인지 구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구체적인 형상과 추상적인 선, 면, 입체 등 모든 회화적 요소들이 완벽하게 통합된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장식이 분명 있지만 단순히 장식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알고 보면, 그럴만한 이유와 정교한 계산에 따라 모든 부분이 전체의 질서에 복무하듯, 그 자리 그런 모습으로 엄밀하게 놓여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티스는 그 어느 것도 장식 아닌 게 없는 동시에 모두가 장식이라 말 할 수 없는 고공의 경계 지점에서 줄을 타듯 곡예를 보여주었던 화가였다. 


졸작, 장식이 내게로 왔다


한때이기는 하였으나 ‘장식은 죄악’이라던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경구, 그 폐부를 찌르는 한 마디에 치여 나는 장식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거나 말 꺼내는 것조차 거북해했다. 마티스가 내 등을 떠밀었던 것일까, 그가 매놓은 팽팽한 줄 위에 섰다.


장식과의 독대(獨對)라! 장식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식을 위한 장식’과 ‘이유 있는 장식’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그림 속 그 어느 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요소들과 뭔가 ‘이유 있는 관계’ 속에서 나름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건축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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