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침묵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간 속에서 숨 쉬며 살아가지만 공간이 실재하는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일상의 삶에 지쳐 지내다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에 낯선 불청객과의 예기치 않은 만남처럼 그 존재를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지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나는 실내에서 잠복해 있다가 휙 하니 내 몸을 싸안아 버리는 낯설고 축축하고 텁텁하고 어두운 공기의 무게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실 밑바닥! 하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질렀다. 순간 온몸에서 힘이 달아나면서 나는 어두운 구석에 놓인 소파로 간신히 걸어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윤대녕, “은어“)
소설 속 주인공은 지하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공간이 자기 몸을 덮쳐 감싸 안는 것처럼 느낀다. 실내의 습기와 냄새, 그리고 어두운 공기 무게를 온몸으로 감지한 것이다. 곧이어 주인공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아이들이 열심히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 중에 시간가는 줄도 잊은 채 컴컴한 목조 교실 밑바닥에 들어가 누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에게는 막내 삼촌이 우물에 빠져 죽은 뒤 우울했던 시절이다. 카페 실내는 우물이나 교실 밑바닥같이 음습하고 어두운 공간의 이미지와 너무도 흡사하여 주인공은 흠칫 놀라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다. 무의식에 자리해 있던 어린 시절 상처가 꿈틀거리며 되살아난 것이다.
누구든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 미로에 갇힌 적이 있거나 분명히 처음 간 곳인데도 언젠가 와보았던 느낌이 난다든지, 어느 곳엘 갔더니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들은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미 공간의 심리적인 효과를 실체로 경험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 공간은 무게와 밀도를 지닌 존재처럼 구체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늘 불쾌한 감정에 연루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공간은 때로 감동적인 전율을 느끼게 하는 힘을 드러내기도 한다. 프랑스 남부지방의 또로네(Thoronet) 11세기에 지어진 ‘시토회 수도원(L'abbaye cistercienne)'에 갔을 때다.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깊은 수렁에 빠져든 것처럼, 전혀 다른 세상에 와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다. 공간은 분명 나를 압도하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나를 억압하거나 불편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고 고요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공간은 차가운 돌로 지어졌음에 틀림없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돌은 본래의 ‘무겁고, 딱딱하고, 차가운’ 물성(物性)을 잊은 채, 한없이 부드럽고 경쾌하며 따뜻한 존재로 바뀌어 있었다. 주변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창이 많거나, 크지도 않지만, 답답하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포근하게 감싸인 느낌이 컸다. 바닥에서 벽면, 천장으로 이어지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서서히 온 몸으로 전염되고 있었다. 나는 지상 어느 곳에서도 이처럼 안온한 공간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또로네 성당은 근원을 알 수없는 곳으로부터 오는 공간의 힘을 내장하고 있었다. 신앙을 가진 이라면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숨결이요, 그 분의 자비로운 품안이겠구나 싶은 느낌이 절로 들었을 것이다. 공간은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침묵 속에 가만히 드러내고 있었다.
성당은 저 바깥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빛, 전혀 다른 크기와 벽면으로 중세 사람들의 고결했던 영혼의 단면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공간에 깃든 침묵에도 깊은 두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들어 다시 제단 쪽을 바라보자 맑고 영롱한 빛이 어둠을 가로질러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고, 나는 내 안에 금빛 비늘이 일제히 돋아난 듯한 감흥에 전율하였다.
이처럼 공간은 단순한 공기의 집합체가 아니라, 힘을 지닌 유한한 실체로서 우리 몸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공간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언어’로 작용하여 정서를 지배하는 힘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