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가에서-.
동네 아저씨가, 이웃집 아줌마가, 그리고 엄마가 말했다.
태풍이 몰아치던 날, 난데없이 오른쪽 다리가 아팠다. 비가 오기 전날부터 욱신거리고 아프더니 결국 보호대까지 차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확히 통증이 느껴진 곳은 오른쪽 발목 중앙쯤. 헬스장에서 하체 운동을 하거나 러닝머신을 뛰고 난 뒤에 느끼는 통증이었다. 이럴 때는 앉아있을 때도 아프고 가만히 누워 있어도 아프다. 운동을 해도 좋아지기는커녕 도리어 상태가 나빠지니, 나는 자연스레 병원을 찾았고 그 병원에서 만성 인대 통증인지, 발목 안정증인지 다소 헷갈리는 병명을 들었다.
왜 내 발목에 이런 병명이 붙은 걸까?
곱씹어 생각하다가 지난 삶 속에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이른 나이에 일을 하게 된 건, 가난 때문이었다. 쌀이 떨어져 밥을 못 먹었던 적도 있었고 돈벌레와 쥐가 우글거리는 흙집에서 산 적도 있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서부터,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때까지 쉬지 않고 여러 일을 해왔다. 음식점 서빙이라든가, 야채를 다듬고 포장하는 일이라든가, 생닭을 써는- 그런 알바였다. 그러다가 24살에 시골 동네 병원에 취업을 했다. 자격증이 딱히 필요하지 않은 물리치료 보조 일이었다. 손에 더러운 걸 묻히지 않고 그나마 깨끗한 시설에서 일할 수 있어, 시골에서는 학교 다음으로 병원 근무가 최고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거기서 어떻게 버텼나 싶다. 100만 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일했으니까.
어쨌든 첫 월급을 받고 엄마에게 내복과 용돈을 드렸던 날이 생각난다. 그렇게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고 지내다가 처음으로 배워보고 싶은 걸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태권도였다. 어린 시절에 또래 아이들이 다니는 걸 봐서 그런가, 그게 참 부러웠다. 배워두면 호신술도 되고 살도 뺄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배웠다. 엄살 피우지 않고 바지런히 따라 했다. 그러다가 오른쪽 발목을 다치게 되었는데, 발차기를 잘못해서 발목 인대가 늘어나 버렸다.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했지만, 아쉽게도 휴식은 갖지 못했다.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했고 삼 남매 중 첫째였던 나는 돈은 벌어야 했다. 쉴 시간이 없었다. 그저 태권도를 선택한 순간을 후회할 뿐이었다. 반깁스를 하고 쩔뚝거리며 병원 안을 돌아다니자, 물리치료 선생님이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며칠 쉬라니까 그러네. 너 그러다가 평생 아플 수도 있어.”
“아이참, 선생님~ 저도 쉬고 싶어요. 그런데 며칠 쉬면 월급이 줄어들잖아요.”
“젊은 애가 돈독이 올랐나… 돈보다 건강이 먼저야. 여기서 일하면서 많이 보지 않았어?”
봤다. 매일 보고 있어서 나도 안다. 시골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는 대부분 쉬지 않고 일하다가 끝내 골병이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겉은 멀쩡했지만 속은 만신창이였다. 그런데도 어떡해서든 벌어먹고 살겠다고 아등바등 살았다. 그건 엄마도 그랬다. 물리치료실을 찾은 환자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보면 동네 아저씨가, 이웃집 아줌마가, 그리고 엄마가 아픈 신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무덤가에서 바꿔왔으면 좋겠다고. 실하고 참한 걸로 아픈 신체를 바꾸고 싶다고 푸념했다. 그렇게 신체를 교체하면 아플 일도 없고 쉬지 않고 일해도 되니 얼마나 좋냐며 그런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제 것이 낫지 않나.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런 통증은 낫지 않을까? 항상 젊음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20대의 철없는 선택은 결국 평생을 안고 갈 병명을 남겼다. 강산이 훌쩍 변한 지금은 과거의 선택이 후회되었다. 그때 조금이라도 쉴걸. 물리치료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이렇게 아픈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오른쪽 발목은 여전히 아프다. 조금만 무리해도 아프고 운동을 해도 좋아지지 않았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나는 푸념하듯 말해본다. 무덤가에서 실하고 참한 발목 하나 바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