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특수교사 정서인 쌤
Aug 14. 2021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시골집 툇마루가 꽤 높았다. 어린아이는 혼자 올라갈 수 없을 정도의 높이였다. 툇마루에는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하나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가서 마당으로 들락거리며 다녔다. 어느 날 툇마루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툇마루에서 날아가던 비행기를 쳐다보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깜짝 놀라 한참 동안 울다가 괜찮겠지 하고 며칠 지냈다. 그런데 엉덩이 부분이 자꾸 아프다고 호소한 나는 엄마랑 같이 부리나케 포항병원으로 갔다. X-ray촬영을 했다. 엉치뼈가 어긋났다는 결과가 나왔다. 걸을 수 없다고 했다. 어긋난 엉치뼈가 돌아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꼼짝 않고 누워 있어야 했다. 결국 오른쪽 허리에서부터 발가락까지 하얀 깁스를 했다.
모내기철이 되어 엄마, 아빠, 언니마저 밖에 나가고 없을 때에는 혼자서 하루 종일 방안에 있었다. 깁스한 부분이 가려웠다. 아버지가 마련해 준 얇은 긁음대로 살살 긁으면서 그 힘든 시기를 보냈다. 당연히 학교도 못 갔다. 마을에서 적어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나의 사고는 큰 이슈가 되었다. 마을에서는 ‘다리 다친 아이’로 불렸다.
추석날 아침이었다. 시골에서 대구로 나가 공부하던 6촌 오빠가 차례를 지내러 왔다. 부엌에 있는 엄마로부터 나의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오빠는 깁스만 해 있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대구에 있는 동산 기독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포항에서 깁스를 다시 할 때에는 칼로 깁스를 잘랐다. 그런데 대구에서는 기계로 깁스를 풀어주었다. 어린 나이에 소도시와 대도시의 차이를 피부로 실감했다. 오랫동안 하던 깁스를 풀고 '동방 보조기 상사'에서 보조기를 맞추었다. 아프지 않은 왼발에 구두만 맞추어 신고, 오른쪽 부분은 발을 땅에 닿지 않게 보조기를 착용했다. 무릎 부분에 보조기를 굽힐 수 있는 장치가 있는데 그걸 사용하면 발이 땅에 닿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오른쪽 다리는 보조기를 착용하면 다리를 뻗어서 걸어야 했다.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 아니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서는 무거운 보조기를 즉시 벗어 놓고 목발로 다녔다.
어느 날 동네 남자 선배가 ‘다리병신’이라고 말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엄마에게 고자질하려고 목발 짚으면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엄마, 00가 나 보고 ‘다리병신’이라고 말했어.” “누가 그랬어? 앞장서라, 내가 관두는지 봐라” 엄마 눈앞에 있는 빗자루를 손에 들고 선배가 놀고 있는 곳으로 갔다. “누가 내 딸에게 다리병신이라고 했어? 누구야? 당장 나오지 못해?” 호통을 쳤다. 엄마의 목소리가 그렇게 우렁찬 줄 처음 알았다. 함께 있던 선배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한 선배가 “제가 그랬어요. 죄송해요.” 분이 풀리지 않은 엄마는 “어디 감히 네가 남의 귀한 자식한테 함부로 말을 해? 네 다리 내가 부러뜨려볼까?” 하면서 빗자루로 선배를 때리려고 했다. 그 일이 오랜 시간 동안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2살 터울인 언니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따라다니는 것이 귀찮은 언니는 나 몰래 친구 집으로 놀러 갔다. 어떻게 하든지 언니를 찾아내 결국 집에 올 때는 같이 온 것으로 기억된다. 언니랑 함께 집으로 오다가 골목길에서 동네 어른들을 만났다. 보조기를 착용한 나를 보고 "아이고, 쯧쯧!" 하며 혀를 차면서 한마디 했다. “아휴! 불쌍한 거. 이 일을 어째? 얼굴은 언니가 더 예쁘네. 공부는 동생이 더 잘한다며?” 이렇게 말하는 어른들이 싫었다. 외모에 대한 자존감이 낮은 이유가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을 동네 어른들에게서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공부는 잘한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그 말보다는 얼굴이 안 이쁘다는 말이 더 크게 들렸다. 아마 언니 역시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 거다.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만나게 되는 어른들 하는 말은 모두 같았다. 어른들이 괘씸했다. 인사를 하지 않고 그냥 가고 싶은 마음 꿀떡 같았지만, 예의를 중시하는 부모의 마음을 알기에 그렇지도 못했다. 왜 어른들은 지나가고 있던 언니와 나를 서로 비교하면서 기분을 나쁘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만 5살에 초등학교 입학한 큰아들은 한글 깨치기가 좀 늦었다. 1학년 때 받아쓰기를 유난히 어려워했다. “엄마, 개미가 거에 이야? 가에 이야?”라는 질문을 자주 했다. 받아쓰기한다고 나머지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말했다. “아니 얼마나 못했길래 나머지 공부를 학교에서 하고 와?, 도대체 몇 점 받았어? 겨우 이렇게밖에 못 받았어. 너 친구 걔는 나머지 공부 안 했지?”라고 말했다. 비교는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비교했다. 친구의 자녀와 비교하고, 반 친구와 비교하고, 심지어는 조카들과도 비교했다. 초등학교 때 비교당하면서 상처를 갖고 있던 나를 보지 못하고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어릴 때 비교를 당하면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가지게 되며,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는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비교하는 잘못된 양육 방법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고 매사에 자신감 없는 아들로 성장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긍정적인 비교는 삶의 좋은 기준이 된다. 하지만 잘못된 비교는 누구든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 어릴 때 비교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비교했다. 비교를 당한 사람에게는 아주 큰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까맣게 잊고, 말이다. 욕심에 눈이 멀어 아들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상처를 주었다. 자라나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가 언제 형제간에 무슨 차별 대우를 했는지, 서로 비교하며 자신의 자존심에 어떤 상처를 입혔는지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당신이 행여 아이를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지는 않나요? 비교를 당하는 아이의 마음속에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로 인한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 불행의 싹이 더 자라나지 않도록 다시는 비교하지 않은 부모가 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