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로마노(1)

세계 최고 도시의 인간시장

by leo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는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357년 로마를 방문하기로 했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선황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할 무렵 다뉴브 강 북동쪽 지역인 판노니아에서 태어났던 그는 한 번도 로마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서 로마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콘스탄티노플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콘스탄티우스는 화려하고 값비싼 온갖 보석과 희귀한 돌로 치장한 황금 마차를 타고 로마로 들어갔다. 신장과 덩치가 작은 편이었던 그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절대로 옆으로 돌리지 않았다. 연도에 늘어서 환호하는 많은 로마인에게 손도 흔들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과거에 많은 장군, 황제가 개선식을 거행할 때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마르스 평원과 키르쿠스 막시무스, 팔라티노 언덕을 거쳐 행진했다. 번쩍이는 문양으로 장식한 방패를 들고 은으로 만든 것 같은 창을 거머쥔 게르만 병사들이 황제 뒤를 따라 걸었다.


콜로세움 앞의 메타 수단스에서 방향을 바꿔 포로 로마노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큰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내리친 것 같은 충격도 느꼈다.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아름답고 널찍한 포로 로마노의 위용이 그를 압도했던 것이다.


콘스탄티우스는 연단인 로스트라에 올라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성스럽고 거대한 많은 건축물이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그 너른 포로 로마노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많은 로마인이 모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며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로마에 비하면 콘스탄티노플은 시골에 불과하구나.’


포로 로마노는 로마제국의 번영과 영광, 몰락과 모욕을 상징하는 장소다. 로마라는 작은 도시가 탄생해서 제국으로 성장하고, 결국은 야만족 용병에게 멸망당하기까지의 1229년 역사를 로마인과 함께 지켜본 곳이었다. 포로 로마노는 왕정 시대부터 공화정, 제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전과 각종 공공건물이 연이어 세워진 로마 건축의 전시장이었고, 많은 로마인이 매일 오고가며 하루를 보내는 활기 넘치는 인간시장이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방문했을 무렵은 로마가 서서히 몰락하고 있을 때였다. 그랬던 시대에도 황제가 입을 다물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로마제국의 전성기에는 포로 로마노의 위용이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포로 로마노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렸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건축물은 다 부서졌고, 일부 신전의 기둥만 몇 개 남아 있다. 로마 여행을 처음 가는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이게 포로 로마노야’라는 게 실망한 입에서 튀어나오는 한탄이다.


어떤 시인은 “폐허에서 오히려 오랜 세월을 반추해볼 수 있다”고 말하지만, 포로 로마노에서 로마의 옛 모습을 추측해보기란 보통 관광객의 처지에서는 불가능하다. 거기에 갈 때마다 인생과 역사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필자의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 포로 로마노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대인의 공동묘지


포로 로마노는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 자리 잡은 저지대다. 지금도 그렇지만 먼 옛날에도 넓지 않고 전망이 좋지 않은 곳이었다. 원래는 습지였으니 살기 좋았던 장소도 아니었다.


테베레 강이 수시로 범람해 물바다를 만드는 게 이곳이 습지로 변한 이유였다.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 사이에서 테베레 강으로 연결되는 계곡처럼 생긴 지역을 벨라브룸이라고 불렀다. 홍수가 나서 테베레 강이 범람하면 벨라브룸을 통해 엄청난 물이 포로 로마노로 흘러들었다. 매년 홍수가 수시로 일어나다 보니 포로 로마노에서는 물이 빠질 날이 없었고 습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사람이 살기 어려웠다. 팔라티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 초기 로마인에게 포로 로마노는 주거지로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장소였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시인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는 『파스티』에서 ‘포로 로마노가 있는 곳은 과거 물웅덩이와 습지였다. 테베레 강을 넘은 물은 제방 너머로 흘러 넘쳤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로 가는 발걸음이 이어지는 벨라브룸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갈대만 무성했다’고 묘사했다.


로마보다 앞선 초기 철기시대 사람들은 팔라티노 언덕과 그 주변에 거주하면서 저지대 습지였던 포로 로마노를 공동묘지로 사용했다. 1902년과 200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고고학 발굴조사 팀이 포로 로마노 일대를 파헤쳐보니 초기 철기시대 무덤, 유해가 나왔다. 공동묘지는 BC 12~11세기, 또는 9세기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코로나19가 이탈리아를 덮치기 직전인 2020년 2월에는 전 세계를 발칵 뒤집히게 만든 발굴 결과가 발표됐다. 포로 로마노에서 로마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로물루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신전과 석관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BC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이후 포로 로마노는 거주지보다는 팔라티노 언덕을 방어하는 곳으로 이용됐다. 다른 도시 군대는 로마로 쳐들어가더라도 습지에 발이 묶여 팔라티노 언덕으로 바로 진군하기 어려웠다. 로마인들은 적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 습지로 내려가 싸움을 벌였다. 로마인들에게 많은 여인을 빼앗긴 사비니족이 타티우스 왕을 앞세워 쳐들어 왔을 때 전투를 한 장소도 이곳이었다. 로마와 사비니족은 이른바 ‘사비니 여인의 개입’으로 화해한 뒤 여기에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사비니족은 로마로 이주해 살게 됐다.


로마와 사비니족은 카피톨리노 언덕을 성채 겸 유피테르 신을 모시는 성소로 이용하기로 했다. 덕분에 주변을 오가는 행인이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포로 로마노는 각지에서 모인 사람이 물물교환을 하는 시장으로 변하게 됐다. 나중에는 고기를 파는 정육점이나 생필품을 파는 잡화점 같은 노점이 줄을 설 정도로 많이 생겼고, 축제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행사도 열렸다. BC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테렌티우스 바로는 ‘처음에는 한낮에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쪽에, 나중에는 반대쪽에도 노점이 생겼다’고 기록했다.


시간이 더 지나자 포로 로마노의 풍경은 더 달라졌다. 성공을 꿈꾸는 정치인은 포로 로마노에 사람을 모아 연설을 했다. 다양한 종류의 범죄자를 단죄하는 재판도 열렸다. 시장 이외의 기능이 더 강해진 것이었다.


로물루스는 습지를 공공장소로 활용하면서 포로 로마노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확한 라틴어 이름은 포룸 로마눔이었다. 포룸의 뜻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먼저 ‘바깥 장소’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포로 로마노는 ‘로마의 바깥’이라는 말이 된다. 반면 포룸은 ‘시장’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독일의 건축사학자였던 크리스티안 휠젠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포로 로마노-역사와 기념비』라는 책에서 ‘로마에는 포룸 보아리움(가축 시장), 포룸 홀리토리움(채소 시장), 포룸 쿠페디니스(식료품 시장) 등 여러 포룸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세월이 더 흐르자 인구가 늘어나는 바람에 시장과 신전 등 새로운 공공건물을 더 지을 땅이 필요했다. 로마인들은 카피톨리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 위치한 포로 로마노에 주목했다. 이곳은 습지이기는 하지만 일곱 언덕 모두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위치가 매우 좋았다. 포로 로마노 개발에 가장 먼저 눈을 돌린 사람은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던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였다. 그는 로마의 일곱 언덕을 유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포로 로마노를 내버려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타르퀴니우스는 습지를 마른 땅으로 만들기 위해 토목과 건축 기술이 뛰어났던 에트루리아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매립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먼저 옛날부터 있었던 공동묘지를 에스퀼리노 언덕 밖으로 밀어냈다. 이어 습지를 매립한 뒤 고여 있던 물을 테베레 강으로 빼내기 위해 배수관 설치 공사를 진행했다. 배수관 깊이는 4m, 폭은 3m 정도였다. 배수관 위는 돌로 덮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고, 건물을 지을 부지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배수관은 전쟁이 일어나면 문을 열고 전쟁이 끝나면 닫는 야누스 신전이 서 있던 아르길레툼 거리에서 시작했다. 비미날레 언덕의 하수는 물론 에스퀼리노 언덕과 퀴리날레 언덕의 하수를 모아 포로 로마노를 거쳐 테베레 강으로 배출했다. 로마인은 이 배수 시설을 클로아카 막시마라고 불렀다. ‘대 배수관’이라는 뜻이었다. 사람이 들어가기도 힘든 습지였던 포로 로마노는 배수시설 공사를 마친 후 로마인의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됐다.


신에게 바친 새 땅


로마인들은 포로 로마노에 건축물을 하나둘씩 세우기 시작했다. 단순히 시장으로만 사용할 것 같았으면 배수관을 깔고 돌로 그 위를 덮을 이유가 없었다. 시대에 따라 로마인이 만든 건축물의 유형과 성격은 달랐다. 각 건축물을 보면 로마가 발전하고 변화한 역사를 알 수 있다. 지금 포로 로마노에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건축물의 이름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타블라리움, 사투르누스 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티투스 개선문, 쿠리아 율리아, 로스트라, 바실리카 아이밀리아, 바실리카 율리아, 카이사르 신전, 레기아,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베스타 신전, 로물루스 신전, 로마-베누스 신전.


로마 전성기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건축물이 존재했다. 제정 시대에는 바늘 하나 꽂을 틈조차 없을 정도로 건축물이 빽빽했다. 로마가 멸망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건물은 부서지거나 무너지고 그나마 일부가 흔적이나마 남은 게 오늘날의 포로 로마노다.


포로 로마노에 건축물이 만들어진 역사만 나열하다 보면 이곳은 아주 엄격하고 엄숙하고 딱딱한 곳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로마인들이 간단히 포룸이라고 부른 포로 로마노는 공화정 초기부터 로마인들의 일상생활이 이뤄지던 중심지였다. 많은 로마인이 매일 오고가며 하루를 보내던 활기 넘치는 인간시장이었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여 희로애락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포로 로마노에는 매일 정치인, 경제인, 일반 시민은 물론 범죄자와 사기꾼, 매춘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사람이 모여들어 로마의 일상을 이뤘다. 로마인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모든 종류의 사람이 모여드는 인종과 민족의 도가니였다. 오늘날 서울의 종로, 명동이나 부산의 서면, 남포동 같은 곳이었다.


로마를 상징하는 개선식의 마지막 행선지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제사가 벌어지는 성소였다. 선거와 연설이 펼쳐지는 정치무대였고, 범죄 재판이 열리는 법원이었고, 검투사 대결은 물론 각종 상업 행위가 진행되는 시장이었다.


포로 로마노는 사통팔달이었다. 그 중심은 ‘신성한 길’이라는 뜻인 사크라 비아였다. 포로 로마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카피톨리노 언덕에까지 이르는 길이다. 여러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개선식이 펼쳐지는 장소로 묘사되는 곳이다. 사크라 비아는 로마 초기 왕정 시대에는 누마 폼필리우스, 안쿠스 마르티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등 왕의 집이 있던 길이었다. 공화정 시대 초반에는 유력한 귀족 가문도 사크라 비아 주변에 모여 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크라 비아를 따라 많은 가게가 들어섰다. 특히 보석 같은 귀중품이나 과일, 꽃을 파는 상점이 많았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섹스투스 포르페르티우스는 ‘제정 로마 시대 초기에는 사크라 비아 양쪽에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황제들은 이름 그대로 로마에서 가장 신성한 길이 장사치들 때문에 더럽혀지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제정 중기 이후에는 길 주변에 있던 상점을 몰아내기도 했다.




포로 로마노에 건축물이 만들어진 역사만 나열하다 보면 이곳은 아주 엄격하고 엄숙하고 딱딱한 곳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로마인들이 간단히 포룸이라고 부른 포로 로마노는 공화정 초기부터 로마인들의 일상생활이 이뤄지던 중심지였다.


사크라 비아에는 여러 곳으로 갈라지는 작은 도로들이 연결돼 있었다. 오늘날에는 콜로세움 쪽과 카피톨리노 언덕 쪽, 그리고 팔라티노 언덕 쪽을 제외하면 모두 막혀있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여러 도로는 사크라 비아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퍼져 있었다. 수부라로 연결되는 아르길레툼이 있었고, 노점상이 더 이어지는 다른 길도 존재했다. 퀴리날레, 비미날레 언덕과 연결되는 비쿠스 롱구스, 포르타 카르멘탈리스로 이어지는 비쿠스 유가리우스, 키르쿠스 막시무스로 통하는 비쿠스 투스쿠스 등도 있었다. 로마인은 어디에 살든 포로 로마노에 접근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아침을 먹은 뒤 남녀노소에 따라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집안의 가장인 성인 남성은 토가를 걸치고 포로 로마노로 갔다. 그는 동료를 만나 정치적 대화를 나누고 물건을 사고팔았으며 은행 업무도 보았다.


이곳에서는 선거가 열리기도 했고, 당연히 선거에 부수되는 대중연설도 수시로 이뤄졌다. 범죄자를 재판하기도 했고, 콜로세움 건립 전에는 검투사경기도 자주 펼쳐졌다. 원로원 회의도 종종 열렸고, 종교나 교육 행사도 개최됐고, 대중 집회도 펼쳐졌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가르치는 사설 학교도 이곳에 있었다. 연설 또는 수사학 교사는 어린 학생을 포로 로마노에 데리고 나간 뒤 특정한 주제를 주고는 행인을 붙잡고 연설로 설득해보라며 현장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포로 로마노에서 일을 하거나 놀이를 즐기거나 연설을 하다 목이 마르면 광장 한가운데 있는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근처에 세워진 유투르나 분수에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유투르나는 고대 로마에서 분수의 여신으로 숭앙받던 신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유투르나 분수는 레길루스 호수 전쟁에서 로마군을 승리로 이끈 카스토르-폴룩스 형제가 백마를 타고 로마로 달려와 목을 축인 곳이었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을 분수 옆에 세운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오전 시간을 보낸 뒤 배가 고프면 포로 로마노 곳곳에 서 있는 노점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었다. 아니면 바실리카에 들어선 제법 그럴싸한 식당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오후에는 욕장에 가서 땀을 흘리며 하루를 정리했다. BC 1~2세기 로마 극작가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가 희곡 『쿠르쿨리오』에서 묘사한 포로 로마노의 풍경을 보면 당시 모습을 더욱 적나라하게 이해할 수 있다.


‘위증한 사람을 찾고 있다면 코미티움에 가라. 거짓말쟁이나 허풍선이는 클로아키나 신전에서 만날 수 있다. 바실리카에서는 아내의 재산을 축내는 남편이 득실거린다. 화려한 경력을 가진 매춘부나 잔인한 살인범도 그곳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미식가가 생선가게에서 맛있는 저녁거리를 찾고 있는 사이 아랫길에서는 사람 좋아 보이는 사내가 웃으면서 느긋하게 걸어간다.


중간 길은 큰소리를 뻥뻥 치며 껄껄대는 자들로 가득하고, 라쿠스 인근 지역에는 아무 근거도 없이 선량한 사람을 헐뜯는 수다쟁이의 목소리가 시끄럽다. 오래된 가게에는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사채업자가 앉아 있고, 카스토르 신전 뒤에는 신용을 잃은 사내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모여 있다. 비쿠스 투스쿠스 거리에는 돈에 인생을 팔려는 자들이 모여 있다.’


포로 로마노의 몰락


군인 황제, 사두 황제 시대를 거친 뒤 천하를 평정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포로 로마노의 운명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후 포로 로마노는 로마 시민들에게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는 장소에 불과했다.


포로 로마노가 완벽하게 몰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4년 ‘모든 이교도 신전을 폐쇄하라’고 명령을 내린 게 계기가 됐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 기운을 잃고 있던 로마에서 포로 로마노는 기독교도의 사냥터에 불과했다. 이들은 ‘이교도의 성소’인 포로 로마노에서 파괴를 일삼았다.


410년에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로 쳐들어와 불을 지르는 바람에 바실리카 아이밀리아 등 많은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 442년에는 끔찍한 지진이 발생했고, 455년에는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아프리카의 반달족이 포로 로마노를 휩쓸고 지나갔다.


포로 로마노는 이런 어려움을 겪고도 14세기까지는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로마에 쳐들어온 고트족이나 반달족 등은 불을 지르기는 했지만 포로 로마노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던 것이었다. 이들은 보물 등 값비싼 보물을 약탈해가는 데 바빴다. 기껏해야 칼이나 창, 방패만 들고 로마로 쳐들어온 야만족이 일부 목조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 말고는 대리석 등 단단한 돌로 지은 건물을 부술 방법은 없었다.


포로 로마노가 망가진 결정적 이유는 바로 교황의 아비뇽 유수 해제였다. 프랑스 왕정의 권위에 눌려 여러 교황은 프랑스 아비뇽에 70년 간 갇혀 있었다. 그런데 1367년 교황 우르바노 5세가 갑자기 아비뇽에서 돌아왔다. 기독교로서는 다행일지 몰라도 포로 로마노로서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황폐해진 로마를 본 교황은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폐허의 도시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많은 궁전, 교회를 지어 교황이 사는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로마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황은 고대 로마의 건축물로 눈을 돌렸다. 건축물을 아끼고 보호하겠다는 게 아니라 궁전과 교회를 짓는 데 필요한 자재를 공급할 수 있는 채석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지시에 따라 건물을 짓게 된 건축가, 조각가는 필요한 자재를 산의 채석장에서 따로 구하지 않고 포로 로마노에 있는 많은 건물에서 뜯어내 조달했다. 그게 훨씬 편하고 돈이 덜 들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뒤를 따라 대저택 건립에 몰두했던 다른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 파괴는 르네상스 시기이던 1540~49년 사이에 벌어졌다.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도급업자는 건축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로 달려갔다. 불과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포로 로마노에 있던 고대 로마의 신전, 개선문, 바실리카는 모두 파괴되고, 해체되고, 불에 타고, 산산조각 나버렸다. 여러 건물에 붙어 있던 명문이나 장식용 조각, 아름다운 부조도 똑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안토니누스-파우스티나 신전의 제단, 계단, 페디먼트는 1540년에 뜯겨나가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541~45년에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개선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과 로물루스 신전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1546년에는 카이사르 신전이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1년 뒤에는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이, 다시 2년 뒤에는 베스타 신전이 완전히 해체돼 버렸다.


포로 로마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위해서만 희생당한 게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의 기둥을 잘라내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옮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청동기마상의 받침대로 사용했다. 라파엘로는 같은 신전의 기둥을 깎아내 포폴로 광장의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있는 치기 예배당의 요나 석상을 제작했다.


결국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포로 로마노는 짧은 시간에 폐허가 돼버렸다. 오늘날 로마가 자랑하는 수많은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 조각 작품은 결국 포로 로마노의 살을 뜯어먹고 태어난 셈이다. 폐허의 미학에 사로잡힌 여러 화가가 채석하는 건축가를 따라가 몰락하는 포로 로마노의 모습을 그림에 담기도 했다. 이 그림들은 현대 역사학자, 고고학자 들이 완벽하게 몰락하기 이전 원래 포로 로마노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건축물이 모두 사라진 포로 로마노는 마침내 완전히 로마인의 외면을 사게 됐다. 나중에는 목동이 소떼나 양떼를 몰고 와 방목하는 초지 신세로 떨어졌다. 목동은 이곳을 ‘소의 들판’이라는 뜻인 ‘캄포 바키노’로 불렀다. 가끔 로마를 지나가던 나그네가 무너진 신전 바닥에 건초 등을 깔고 잠을 청하는 게 포로 로마노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는 드문 경우였다. 심지어 로마인조차 캄포 바키노가 과거에 어떤 곳이었는지 모를 정도가 됐다.



포로 로마노는 19세기 들어서야 겨우 문화재라는 관점에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80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을 시작으로 사투르누스 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포카스 원기둥, 카스토르-폴룩스 신전, 콩코르디아 신전, 사크라 비아, 타불라리움, 티투스 개선문 등이 발굴됐다. 그러나 더 초기의 유적을 더 깊이 발굴하고 연구하려는 노력은 이뤄지지 못했고, 다만 표면에서 발굴했거나 땅에 나뒹굴던 잔해를 정리해놓는 수준에 머물렀다.


포로 로마노의 폐허를 둘러보다 지쳐 먼 옛날에는 신전의 기둥이었을지도 모르는 돌덩이 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려니 역사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BC 2세기 그리스 역사학자 폴리비우스가 『카르타고의 몰락』에 남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눈물이다. 그는 BC 146년 로마에 맞선 카르타고를 잿더미로 만든 장군이었다. 카르타고의 멸망은 로마제국 전성기의 서막이었다. 폴리비우스는 스키피오가 아프리카 최고의 도시를 붕괴시키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


‘스키피오는 무너지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고, 적을 위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모든 도시, 모든 사람은 한때 그리스 최고의 도시였던 트로이는 물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가 겪었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트로이도, 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전사들도 함께 멸망하리라.”


그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숨김없이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언젠가는 나의 조국 로마도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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