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먼저 모든 땅을 바치리니
로마인들은 포로 로마노를 개발한 뒤 처음에는 신전을 여럿 지었다. 다신교 민족이었던 로마 인은 정치적, 군사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조점을 치거나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물을 정도로 신을 모시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이었다. 포로 로마노에 신전이 세워진 순서, 연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로마의 공식 연표이자 종교 서적인 『제사장 연대기』에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로마에서 해마다 벌어진 사건과 집정관 등 역대 행정관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로마의 공식 연표이자 종교 서적인 『제사장 연대기』에 따르면 포로 로마노에 가장 먼저 세워진 신전은 BC 497년 카피톨리노 언덕 기슭에 만들어진 사투르누스 신전이었다. 로마인이 새로 마련한 땅에 왜 사투르누스 신전을 가장 먼저 지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사투르누스를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크로노스라고 믿었다. 그는 자식에게 쫓겨난다는 예언을 듣고는 태어나는 자식을 모두 잡아먹어버렸다. 하지만 막내아들 제우스에 의해 그리스에서 쫓겨나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로 달아난 그는 사투르누스로 변신한 뒤 야누스 신의 딸과 결혼했고, 농업기술을 이탈리아에 보급해 ‘농업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농업은 재산을 일구는 산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의 신’으로 존경받았다. 사투르누스가 다스렸던 시대를 로마인은 ‘황금시대’라고 불렀다. 이 때문인지 사투르누스 신전은 고대 로마의 금, 은 등 국고를 보관하는 창고가 됐다.
사투르누스는 로마 건국 이전 한 부족의 족장이었는데, 죽어서 신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테렌티우스 바로는 『라틴어 원론』에서 ‘원래 사투르누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던 사투르니아 마을의 원주민을 다스리던 족장이었다. 그래서 카피톨리노 언덕은 로마 이전에는 몬스 사투르니우스(사투르누스의 산)로 불렸다’고 주장했다.
사투르누스 신전 봉헌식은 12월 17일 열렸다. 로마인들은 사투르누스의 황금시대를 기리기 위해 신전 봉헌식 날짜를 전후한 매년 12월 17~23일에 사투르날리아 축제를 열었다. 날짜를 잘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크리스마스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축제는 오늘날 크리스마스에 많은 영향을 미친 흥미로운 축제다. 1907년 발간된 미국의 『가톨릭 백과사전』은 ‘사투르날리아 같은 이교도의 겨울 축제가 크리스마스 날짜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적었다.
처음에는 축제기간이 하루였지만 나중에 1주일로 늘었다. 다른 로마 축제는 대개 신전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열린 반면 사투르날리아는 포로 로마노 등 로마의 모든 장소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상업 활동을 하지 않았고, 학교와 법정도 문을 닫았다.
5세기 말 학자였던 마르코비우스 테오도시우스가 쓴 『사투르날리아』라는 책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평소에는 색깔 있는 토가를 하층민이 입는 옷이라고 천대하며 착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투르날리아 축제 중에는 전통 토가를 벗고 화려한 토가를 애용했다.
로마인들은 평소에는 모자를 잘 쓰지 않았지만 축제 때에는 필레우스라는 창 없는 모자를 즐겨 쓰고 다녔다. 일상에서는 모자를 아예 쓸 수 없었던 노예도 이때만큼은 필레우스를 쓰고 다녔다. 이렇게 되면 누가 노예이고 주인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노예와 주인의 신분이 일시적으로 바뀌는 시간도 있었다. 이때에는 노예가 먼저 밥을 먹었다. 주인은 노예에게 밥을 대접했다. 때로는 노예와 주인이 같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1세기 로마 시인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는 이를 ‘12월의 자유’라고 표현했다. 축제 중 ‘야자 타임’은 나중에 없어졌다.
사투르날리아 기간 중에는 가면을 썼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기록도 있다. 핼러윈 데이 때 어린이들이 가면을 쓰고 각 집을 돌아다니며 사탕이나 과자를 얻는 ‘트릭 or 트릿’과 비슷한 놀이도 있었다. 평소에는 금지됐던 도박이나 주사위 놀이도 이때만큼은 허용됐다. 특히 노예들이 두 놀이를 즐겼다. 내기에 주로 걸었던 것은 동전이나 견과류 등이었다. 과식이나 폭음도 이때만큼은 너그럽게 받아들여졌다.
로마인들은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축복하기도 했다. 선물을 주는 날은 12월 23일이었다. 선물의 값어치가 사회적 신분을 나타냈기 때문에 때로는 값비싼 항아리, 밀랍인형 등을 주고받기도 했다. 자료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주고받은 선물 목록을 살펴보면 주사위, 뼈로 만든 공기놀이 돌, 빗, 이쑤시개, 모자, 사냥용 칼, 도끼, 불을 밝히는 등, 둥근 공, 향수, 소시지, 컵, 숟가락, 앵무새, 옷가지, 마스크, 책이 있었다.
때로는 노예나 외국동물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정말 친한 친구끼리는 짓궂은 장난삼아 저질 선물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선물과 함께 시를 적어 보내기도 했다. 오늘날 성탄절 선물카드와 비슷한 것이었다. 사투르날리아가 크리스마스에 미친 가장 큰 풍습은 선물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선물 주고받기가 이교도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금지당하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사투르누스 신전을 봉헌하고 13년 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을 건립했다. 디오스쿠리 신전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곳은 ‘왕정의 완전한 몰락과 공화정의 완벽한 정착’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반란 때문에 쫓겨난 로마의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BC 499년 권좌를 되찾으려고 라틴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로마로 쳐들어왔다. 로마군은 레길루스 호수에서 라틴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총사령관이었던 독재관 포스투미우스는 전쟁 막바지 신에게 “승리를 내려주시면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을 지어 디오스쿠리 형제에게 봉헌하겠다”고 맹세했다. 로마군은 처음에는 매우 불리했지만 기병대까지 말에서 내려 전력을 다해 싸운 덕에 역전승을 거뒀다.
포스투미우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신전을 완성했다. 로마인들은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을 봉헌하면서 성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신화를 만들어냈다. 레길루스 호수 전투에서 로마군이 패전의 위기에 빠졌을 때 디오스쿠리 형제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 도와준 덕분에 로마군이 승리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로마에서는 매년 7월 15일 디오스쿠리 축제가 거행됐고, 디오스쿠리처럼 분장한 기병 1천800명이 시내를 행진했다.
사실 카스토르, 폴룩스 형제의 신화뿐만 아니라 로마가 승리를 거뒀다는 레길루스 호수 전투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어낸 전설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어머니는 레다로 같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카스토르의 아버지는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우스, 폴룩스의 아버지는 신들의 왕 제우스였다. 레다가 카스토르를 임신했을 때 제우스가 백조로 변장해서 그녀를 범해 폴룩스도 임신하게 만든 것이었다. 두 형제는 같은 날 태어나 쌍둥이가 됐다. 카스토르는 인간의 아들이고 폴룩스는 신의 아들이었다.
그리스 신이었던 카스토르, 폴룩스 형제는 BC 5세기 무렵부터 로마에서도 숭앙받게 된다.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식민도시를 하나둘 건설하기 시작한 그리스인들에 의해 신화가 서서히 퍼진 덕분이었다. 디오스쿠리는 백마를 타고 다니는 신으로 묘사됐다. 기병대가 승리에 기여한 레길루스 호수 전투를 기념하면서 신전을 바치기에 가장 적합한 신이었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은 포로 로마노 한복판에 서 있어 원로원 회의장소로 자주 사용됐다. 정치인이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놓고 연설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로마인들은 이 신전 안에 무게, 길이 등을 재는 각종 도량형 측정 장비를 가져다 놓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측정했다는 점이다. 왜 여기에서 그랬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포로 로마노에는 기둥만 남아 있는 건물이 대부분이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기둥 3개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신전은 거의 사라졌지만 뜻밖에 두 형제의 석상은 아직 건재하다. 카피톨리노 언덕의 캄피돌리오 광장 계단 앞에 말을 붙들고 서 있는 두 나체 청년의 석상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두 석상은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든 것은 아니다.
카스토르-폴룩스 신전에 이어 BC 4세기 중엽에는 화합의 신 콩코르디아에게 바치는 콩코르디아 신전이 건립됐다. 이 신전을 만든 것은 순전히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초기부터 로마 평민과 귀족은 평민의 권리 신장을 놓고 오랫동안 치열한 갈등을 빚었다. 평민은 수시로 병역 의무를 거부하고 ‘성산(聖山)’에 틀어박혀 농성했다. 국론 분열 탓에 BC 390년에는 갈리아족의 침략을 받아 카피톨리노 언덕만 남겨놓고 로마 전역이 점령당하는 일까지 겪었다.
BC 376~367년 호민관이던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는 이런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BC 367년 ‘집정관 2명 중 1명은 꼭 평민 출신으로 한다’는 리키니우스 법을 제정했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해소될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콩코르디아 신전을 만들었다. 이름 그대로 화합의 신전이었다. ‘평민, 귀족 계급이 조화를 이뤄 로마를 위해 온 힘을 다 하겠다’고 화합의 신 콩코르디아에게 다짐하는 뜻에서 신전을 봉헌한 것이었다.
리키니우스 법을 새로 하나 만들었다고 로마의 갈등이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제도가 완벽해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제도는 결국 부수적일 수밖에 없다.
포로 로마노에는 화로와 가정의 여신인 베스타를 모시는 베스타 신전도 있었다. 로마에서 최고의 신은 유피테르였지만, 로마인들이 생활에서 가장 가깝게, 가장 중요하게 여긴 신은 화로와 가정의 여신인 베스타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정의 여신 헤스티아가 로마에서 베스타로 바뀌었다고 하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베스타 신전에서는 신성한 불이 타오르는 화로를 관리했다. 고대에는 불이 꺼지면 불씨를 찾기 어려웠다. 남의 집에 가서 달라고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공공장소에 화로를 세워 불을 피워놓고 불씨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베스타 신전이 생긴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신전에는 여신의 동상은 없고 화로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 뿐이었다.
베스타 신전은 불과 생명의 원천인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우주의 중심에 만물의 근본인 불이 자리 잡고 있음을 상징한다. 신전은 둥글게 생겼다. 로마인들은 우주가 둥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베스타 신전의 성스러운 불은 로마의 행운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불이 꺼지면 저주가 찾아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베스타 신전의 불이 꺼질 경우 서둘러 태양 광선을 모아 신성한 불을 새롭게 만들었다. 대개 직각이등변 삼각형의 거울로 모이는 빛을 한 점에 모아 불을 피웠다. 로마인은 이렇게 만든 불에는 영원한 힘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베스타 신전에는 신성한 불만 모신 게 아니었다. 이곳에는 로마제국의 안전과 번영을 지키는 일곱 개의 ‘신성한 유물’ 중에서 여러 개가 보관돼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트로이의 목마’ 때문에 멸망한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이네아스가 가져온 아테나 목상인 ‘팔라디움’이었다. 팔라디움 외에 신성한 유물은 페시누스의 운석, 베이이의 사두마차 테라코타, 오레스테스의 유해, 프리아모스의 홀, 일리오네의 베일, 방패 안킬리아였다.
베스타 신전의 화로에 담긴 신성한 불을 지키는 여성 사제를 베스탈이라고 불렀다. 베스탈은 처음에는 4명이었지만, 나중에는 8명이 됐다가 마지막에는 18명으로 늘어났다. 18명 가운데 6명만 정식 베스탈이었고, 나머지는 보조 베스탈이었다. 이들은 팔라티노 언덕 언저리에 붙은 아트리움 베스타라는 집에서 함께 살았다.
베스탈 자격은 엄격했다. 우선 육체적,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는 6~10세 여자아이여야 했다. 남자 경험이 전혀 없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순결을 강조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베스탈의 순결은 로마라는 국가의 건강성을 의미했다. 또 정결한 몸의 여인이라야 영원한 불을 지킬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1세기 로마 작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비망록』에 따르면 베스탈의 임기는 30년이었다. 소녀는 베스탈로 임명될 때 30년 동안 남자를 멀리 한다고 선서했다. 첫 10년 동안은 일을 배우고, 다음 10년 동안은 임무를 수행하고, 나머지 10년 동안은 다른 소녀에게 일을 가르쳤다.
30년 임기를 마치면 베스타 신전을 떠나 사회로 돌아가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30년 동안 신전에 갇혀 여자끼리만 살다가 30대 후반~40대 초반에 사회생활에 적응해 결혼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부분 베스탈은 은퇴해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이렇게 인생을 희생하는 어려운 일이다 보니 베스탈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졌다. 먼저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았고, 불을 지키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또 유서를 작성할 자격을 부여받았고, 후견인이나 보호자 없이 자신의 일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었다. 가부장인 아버지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던 로마에서 딸이 유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다.
외출할 때에는 여러 시종이 앞에서 호위해 주었다. 길을 가는 베스탈의 가마를 미는 사람은 사형당하기도 했다. 베스탈이 길을 가다 사형장에 가는 죄수를 만나면 사형 집행을 연기해 주었다. 베스탈은 임의로 노예를 해방시킬 수도 있었다. 베스탈이 노예를 만지면서 해방이라고 외치면 그대로 자유인이 됐다. 로마에서는 도시 안에 사람을 묻을 수 없었지만 베스탈은 예외였다. 역사학자들은 베스탈을 묻는 공동묘지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베스탈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만 벌을 줄 수 있었다. 그는 베스탈 신전과 숙소 주변에 많은 스파이를 심어놓는 것은 물론 신전의 여러 시녀에게 베스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매일 보고하게 했다. 그래서 어떤 베스탈이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금세 알 수 있었다.
베스탈이 실수로 성화를 꺼뜨리는 등 가벼운 죄를 저지르면 옷을 벗기고 장막을 늘어뜨린 어두운 방에서 매질을 했다. 남자를 만난 게 들통 날 경우 더 큰 벌을 받았다. 로마 바깥에 있는 지하 방에 영원히 가둬 굶어죽게 만드는 형벌이었다. 이런 사례는 10번 정도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바로 사형을 시키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도시 안에 사람을 묻을 수 없었고,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사형시킬 수 없다는 법이 있었다. 베스탈을 죽이거나 생매장하면 법을 어기는 게 된다. 폰티펙스 막시무스도 법을 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음식을 갖춘 지하 방에 가둬두면 생매장이나 사형이 아니라는 게 로마인의 논리였다. 세르비우스 성벽의 포르타 콜리나(콜리나 문) 근처에 잘못을 저지른 베스탈을 가두는 지하 방이 있었는데 이곳을 아게르라고 불렀다.
베스탈이 없어진 것은 기독교 때문이었다. 로마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후인 383년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베스타 신전에 드는 비용을 국고에서 지원하지 못하게 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한 술 더 떠서 11년 뒤인 394년 베스타 신전의 성화를 끄게 하고 베스탈 제도를 아예 없애버렸다. 마지막 베스탈이 누구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로마는 그로부터 80년 뒤인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어떤 로마인들은 “베스타 신전의 불이 꺼졌기 때문에 로마가 멸망했다”라고 울부짖었다.
베스타 신전의 흔적은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언덕이 만나는 쪽에 남아 있다. 기둥이 여러 개 서 있고 위에는 지붕 같은 흔적이 보인다. 그 뒤로는 베스탈이 살던 집터 아트리움 베스타이가 있다. 하지만 신성한 불을 담은 화로는 남아 있지 않다. 신전 안에 모셔져 있던 신성한 유물도 보이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기독교에 의해 훼손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마지막 베스탈이 신성한 유물을 베스타 신전 지하나 주변에 묻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지금 포로 로마노 어딘가에는 신성한 유물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다. 누군가 신성한 유물을 다시 햇빛으로 끄집어내는 날 이탈리아는 다시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