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 죽어서 신으로 승격한 인간
로마인은 원래부터 세상을 떠난 조상을 매우 숭배하던 민족이었지만, 조상을 신으로 승격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왕정, 공화정 시대에 로마에서 죽은 사람이 신으로 승격된 경우는 두 차례뿐이었다. 트로이에서 탈출해 이탈리아에 정착한 로마의 원조 조상인 아이네아스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였다.
제정 시대로 접어들자 왕정, 공화정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건물이 포로 로마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죽은 뒤 신으로 승격된 인간에게 봉헌하는 신전이었다. 시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로마 최초로 황제 자리에 오른 아우구스투스가 양아버지였던 카이사르를 신으로 모시기로 하고 카이사르 신전을 건설한 것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에서 챙겨온 전리품을 신전에 봉헌했고, 4년에 한 번씩 축제도 열었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후계자로 지명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귀족의 관례에 따라 죽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경기대회를 열었다. 7일 동안 열린 대회가 끝나던 날 밤 커다란 유성이 로마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아우구스투스는 “유성은 카이사르의 영혼이 불멸의 신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증표이다”라고 주장했다.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믿었다. 죽어서 신이 된 카이사르가 유성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갔다고 생각해서 그 유성을 시두스 이울리움(율리우스의 별)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를 신으로 모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로마 원로원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카이사르 암살 초기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던 원로원이 그를 신으로 모시는 데에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여론은 극도로 악화됐다. 위협을 느낀 원로원은 결국 카이사르의 신격화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 암살 2년 후인 BC 42년 최종 결론을 내렸다. 모든 원로원 의원과 로마 시민의 만장일치 결의에 따라 카이사르를 신으로 모시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를 신으로 모시는 시성식을 먼저 성대하게 치렀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정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의 통일을 달성한 뒤 카이사르 신전 봉헌식을 거행했다. 트로이 전쟁 재연 행사가 펼쳐졌고, 검투사경기도 열렸다. 곳곳에서 잔치도 이어졌다. 로마인들이 하마와 물소를 처음 구경한 것은 이때였다.
카이사르에게는 무덤이 없다. 카피톨리노 언덕 아래 포로 로마노에 장작을 쌓아놓고 카이사르의 시신을 화장하던 도중 비가 내리는 바람에 유해가 하수구로 쓸려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아우구스투스가 신전을 지어준 덕에 영혼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신전 앞에는 돌로 만든 연단이 있었다. 제정 시대에 고위인사 장례식이 열릴 때에는 황제가 이 연다에서 추도사를 읽기도 했다.
카이사르 신전은 15세기까지만 해도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만 겨우 남아 있다. 그래도 신전 앞에는 누가 가져다놓은 것인지 늘 화사한 꽃다발이 놓여 있다. 2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로마인은 카이사르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포로 로마노에 카이사르 신전을 세운 이후 다른 황제들은 카이사르처럼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고 신전을 건설하는 것을 관행으로 정착시켰다. 티투스 황제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신격화한 뒤 포로 로마노에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 티투스마저 즉위 2년 만에 눈을 감자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87년에 신전을 완성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와 함께 형도 신격화해 신전에 함께 모셨다. 이 신전이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 신전이었다.
신전을 황제에게만 바치기 위해 지은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황제의 아내나 연인, 다른 가족도 신격화해서 신전에 모셨다. 안토니누스-파우스티나 신전이 그 중 대표적인 건물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평생 해로했던 부인 파우스티나가 숨지자 그녀를 위해 포로 로마노 한쪽에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신전이 완성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두 사람을 신전에 동시에 모시기로 했다.
안토니누스-파우스티나 신전은 7세기 무렵 로마 가톨릭 교회로 바뀌었다. 이름은 ‘미란다의 산 로렌조 교회’가 됐다. 미란다라는 명칭은 교회 여성 후원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성 로렌조는 군인 황제 시대였던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 순교한 사제 7명 중 한 명이었다. 이 신전은 교회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나마 르네상스 시대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포로 로마노에는 로물루스 신전도 건설됐다. 로마 창시자 로물루스를 모신 신전은 아니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에 맞서 싸웠던 막센티우스 황제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를 위해 지어준 신전이었다. 이 신전도 527년 교회가 됐다. 지금 이름은 산티 코스마 디마아노다.
콜로세움에 올라가서 포로 로마노를 바라보면 바로 정면의 언덕 위에 기둥이 길게 늘어선 건축물이 있다.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다는 베누스-로마 신전이다. 사랑과 미의 여신이며 로마에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알려진 여신 ‘베누스 펠릭스’(아프로디테)와 ‘로마 아테르나’에 바친 신전이다. 신화에 따르면 베누스는 그리스 연합군에게 멸망당한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이네아스의 어머니다. 아이네아스는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의 조상이니 베누스는 결국 로마의 선조인 셈이다. 로마 에테르나는 로마를 지키는 여신이다. 로마라는 나라 자체를 신으로 만든 것이다.
베누스-로마 신전을 만든 사람은 하드리아누스 황제다. 그는 취임 첫해부터 평소 관심이 많던 건축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먼저 포로 로마노에 베누스-로마 신전을 짓기로 했다. 설계도는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루스의 도움을 받아 직접 그렸다. 신전은 121년에 짓기 시작해 135년에 봉헌식을 치렀다. 하드리나우스 시대에는 마무리하지 못하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때인 141년에야 최종적으로 완공됐다. 원래 길이는 145m, 폭이 100m에 이르렀다.
베누스-로마 신전은 건물 두 채가 서로 등을 맞댄 모습을 하고 있다. 로마 신전은 서쪽을 향해 포로 로마노를, 베누스 신전은 동쪽을 향해 콜로세움을 내려다보고 있다. 두 건물에는 베누스 동상과 로마 신의 동상이 각각 세워졌다. 두 동상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동상 앞에는 제단이 있어 신혼부부가 와서 결혼생활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맹세를 했다. 신전 동서쪽에는 지름 1.8m짜리 흰색 기둥이 10개씩 세워졌다. 남북으로도 흰색 기둥 18개씩이 세워졌다.
건물을 나란히 세운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뜻이었다. 베누스는 사랑을 지키는 여신이다. 사랑은 라틴어로 ‘AMOR’다. 로마는 ‘ROMA’이다. 사랑의 여신과 로마의 신을 모시는 신전을 나란히 세우면 글자로는 ‘AMOROMA’가 된다. 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똑같은 철자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 같은 절묘한 단어 대칭을 염두에 두고 신전을 나란히 만든 것이었다.
9세기 무렵 대지진으로 베누스 로마 신전은 큰 피해를 입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신전 주변에 늘어서 있던 기둥들도 하나둘씩 사라졌다. 지금은 겨우 몇 개만 남아있다.
베누스 여신을 숭상한 로마인은 베누스 축제를 해마다 여러 번 열었다. ‘베누스의 달’인 4월 1일에는 베네랄리아 축제가 펼쳐졌다. 베누스는 물론 행운의 여신인 포르투나 비릴리스를 숭상하는 행사였다. 4월 23일에는 비날리아 우르바나라고 하는 축제가 열렸다. 전년도 가을에 담은 포도주를 베누스는 물론 유피테르에게 가장 먼저 바치는 포도주의 축제였다. 베누스는 ‘불경한 포도주’를 인간이 마실 수 있게 해주는 신이며, 유피테르는 ‘가장 독하고 순수한 포도주’을 지켜주는 신이었다. 귀족 여성들은 이날 베누스 신전에 모여 유피테르와 베누스에게 바친 뒤 헌주를 모두 하수구에 버렸다. 평민 여성들은 로마 외곽에 있는 베누스 신전에 도금양 꽃, 등심초 등을 바쳤다.
신전의 틀을 갖추고 사크라 비아도 완성한 로마 인은 이제 포로 로마노에 정치적 의미를 담은 건축물을 하나둘씩 짓기 시작했다. 고대에 어느 민족보다 정치적이었던 로마 인의 성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포로 로마노에 건설된 정치적 건물 중에서 기록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쿠리아였다. 원로원 회의를 여는 공간이었다.
원래 쿠리아는 로마인을 살던 무리에 따라 나눈 ‘동’을 뜻했다. 로마뿐만 아니라 당시 인근에 있던 라틴족은 모두 쿠리아 제도를 갖고 있었다. 각 쿠리아는 자체적으로 신봉하는 신과 제사의식, 제사장소를 갖고 있었다. 쿠리아가 제사를 진행하는 장소도 쿠리아라고 불렀다. 제사가 열릴 때에는 사람이 많이 모였다. 그때는 제사만 지내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현안을 의논했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하는 장소도 쿠리아라고 부르게 됐다. 세월이 흘러 ‘동’을 뜻하는 쿠리아는 사라졌고, 원로원이 모여 회의를 하는 장소를 쿠리아라고 불렀다.
원로원 회의를 여는 쿠리아를 처음 만든 사람은 BC 7세기 무렵 제3대 왕이었던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였다. 그는 로마와 사비니족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체결한 장소인 코미티움에 쿠리아 호스틸리아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BC 1세기 무렵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반대파인 마리우스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뒤 원로원의 인원을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 인원이 늘어난 만큼 회의장인 쿠리아 호스틸리아를 넓혀야 했다. 마침 폭동으로 쿠리아 호스틸리아가 소실되는 바람에 새 건물을 지어야 했다. 이때 새로 건설한 게 쿠리아 코르넬리아였다. 술라의 이름을 붙인 건물이었다.
BC 44년 로마 정치를 완전히 장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쿠리아 코르넬리아를 신전으로 바꿔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없애 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쿠리아 율리아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그가 암살당한 뒤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공사를 재개해 BC 29년에 완공했다. 쿠리아 율리아 완공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종말과 제정 시대의 개막’을 상징하는 대사건이었다.
쿠리아 율리아는 포로 로마노에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앞에 아직도 서 있다. 삼각형 지붕을 가진 직사각형 건물이다. 쿠리아 율리아에는 회랑이 있었고, 그곳에는 미네르바 석상이 서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 날개 달린 빅토리아(니케) 석상을 쿠리아 율리아 정면 위에 세웠다. 미네르바, 빅토리아 여신상은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원로원의 지혜와 제국의 막강한 힘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쿠리아 율리아는 세월이 흐르면서 화재, 지진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부서졌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지금의 건물은 284~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새로 지은 것이다. 쿠리아 율리아에는 원래 청동 문이 달려 있었지만 1660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떼어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했다. 지금 있는 쿠리아 율리아의 문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7세기 무렵 쿠리아 율리아는 교회로 바뀌었다. 그 덕분에 르네상스 시대 파괴의 파도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은 교회로 사용되지 않는다.
BC 3~4세기 무렵 쿠리아 호스틸리아 앞의 작은 광장인 코미티움에 로스트라가 세워졌다. 포로 로마노에 모인 시민들 앞에서 집정관, 호민관은 물론 여러 정치적 인물이 연설하던 연단이었다. 공화정 시대 로마에 정치적 격변이 벌어질 때마다 논란의 한가운데 선 인물이 자신의 주장을 로마 시민에게 호소하려고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바로 로스트라였다.
코미티움에는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매년 2월 23일, 3월 24일, 4월 24일에 왕이나 집정관 등이 이곳에서 신성한 제사 의식을 거행했다. 의식을 마친 뒤 왕, 집정관은 마치 쫓겨나듯이 서둘러 코미티움을 떠나는 게 관례였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로물루스의 무덤에 로스트라를 세운 이유는 분명했다. ‘성스러운 땅에서 연설을 할 때에는 로물루스가 세운 조국을 흔들 수 있는 거짓말, 허황된 말, 과장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정치인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로스트라는 조점관에 의해 템플룸으로 선포됐다. 템플룸은 오늘날에는 신전, 사원으로 변한 단어지만 당시에는 신성한 공식이나 절차에 따라 주변의 다른 구역과 분리된 공간이었다. 당연히 신성한 구역으로 인정받았고, 여기서 누군가 연설하고 있을 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코지를 할 수 없었다. 로스트라에는 공동체에 해를 끼칠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와 함께 누구든 소신을 밝힐 때에는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로스트라는 원래 뱃머리라는 뜻이었다. 로마군이 해전에서 물리친 적 함선의 뱃머리에 달려 있던 조각을 전리품으로 챙겨와 연단에 설치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나중에는 로스트라 주변에 코르넬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유명한 사람의 석상이 차례로 세워졌다. 나중에는 석상이 너무 많아 통행에 방해를 줄 정도가 돼서 수시로 치워야 했다.
BC 3세기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로 로마노에는 로마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건축양식인 새로운 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중해 최고의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자신감을 반영하는 건축물이었다. 로마인들마저 놀라게 만들 정도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 바실리카였다.
지금은 바실리카가 교회, 성당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는 다목적 건물이었다. 조금 더 현대적으로 말하면 주상복합건물이었다. 실용성을 따지는 고대 로마인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건물 양식이었다.바실리카에는 신전뿐만 아니라 법정도 있었다. 상가는 물론 각종 오락시설이나 드물기는 했지만 개인 주택도 들어가 있었다.
바실리카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긴 직사각형이었다. 길이는 대개 100m 안팎이었다. 폭은 길이의 2분의 1~3분의 1 정도였다. 바실리카는 원래 열주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붕은 씌웠지만 벽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공기가 잘 통했다. 세월이 흘러 나중에는 바실리카에도 벽을 세우게 됐다. 열주 회랑은 벽 안쪽으로 들어갔고, 정면 입구에 있는 기둥만 밖에서 보일 정도였다. 포로 로마노에 일을 보러 간 로마인은 날씨가 더우면 바실리카 회랑에 들어가 햇빛을 피했고, 날씨가 추우면 기둥 뒤에 숨어 바람을 피했다
포로 로마노에 세워진 최초의 바실리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이후인 BC 184년 호민관 사무실로도 사용된 바실리카 포르키아였다. 도로를 불법 점유한 여러 시설물을 부수고 세운 건물이었다. 바실리카 포르키아를 세운 사람은 대 카토로 널리 알려진 정치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였다. 그는 카르타고의 누마 회전에서 한니발을 눌러 로마를 구해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무척 싫어해 탄핵했던 인물이었다. 이 건물은 BC 52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의 장례식 도중 발생한 화재 때문에 완전히 타버렸다. 이후에 어떤 기록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재건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바실리카 포르키아의 뒤를 이어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바실리카가 들어섰다. BC 179년 쿠리아 율리아 바로 옆에 건설된 바실리카 아이밀리아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곳에는 물시계도 설치돼 있었다. 건설 당시에는 공사를 담당한 재무관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의 이름을 따서 바실리카 풀비아라고 불렀다. BC 55년 조영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도움 덕분에 보수 공사를 실시한 뒤에 바실리카 아이밀리아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실리카 아이밀리아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내부의 메인 홀 길이가 90m, 폭이 27m였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하얀 대리석 기둥 사이의 천장에 채광을 위한 명층이 달려 있어 바깥에서 빛이 들어오게 했다. 이 바실리카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당대 유명한 학자였던 타렌티우스 바로,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플루타르코스가 저서에 감탄을 늘어놓았을 정도였다.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아 그 아름다움이 어떠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서기 12년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기념하면서 만든 바실리카 율리아가 바실리카 아이밀리아 맞은편에 완공됐다. 2층이었던 바실리카 율리아는 길이 101m, 폭 49m에 이른 큰 건물이었다. 가운데에는 대리석 기둥을 세운 복도에 둘러싸인 넓은 정원이 있었다. 정원 길이는 82m, 폭은 16m에 이를 정도였다.
바실리카 율리아는 기둥만이 아니라 외벽도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바닥에도 대리석을 깔았다. 워낙 크고 아름다운 대리석이 많았기 때문에 중세시대에 교회 관계자, 귀족, 예술가 등이 교회, 궁전이나 각종 조각에 사용하려고 모두 떼어가 지금 남은 거라곤 부스러기밖에 없다.
바실리카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도의 예배 장소로 사용됐다. 많은 사람이 모이기 쉬운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러 갈 때 “바실리카에 갑니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황제는 바실리카를 아예 교회로 바꾸게 했다. 나중에 교회를 새로 지을 때는 넓은 바실리카의 장점을 고려해 건물을 바실리카처럼 만들게 했다. 아예 교회를 바실리카라고 부르게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름이 굳어져 이제는 바실리카는 교회나 성당을 일컫는 명칭으로 정착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