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했을 때 주변에는 라틴족 도시가 많았다. 로마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헤르니키, 라누비움, 알바, 아리키아, 안티움 등은 로마에서 가까우면 3~4㎞, 멀어도 20~30㎞ 정도 거리였다. 로마 주변의 대다수 라틴족 도시는 새로 생긴 로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를 외톨이로 따돌렸다. 대표적 사례는 통혼권이었다.
라티움에 속하는 모든 도시는 청춘남녀를 서로 결혼시킬 수 있는 통혼권을 갖고 있었다. 알바롱가의 남성이 볼스키의 여성과, 안티움의 남성이 헤르니키의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라티움 도시들은 통혼을 통해 가까운 친척이라는 느낌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동족이라는 감정을 형성했다. 새로 생긴 도시였던 로마는 그런 통혼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제 막 생겨난 탓에 재산도 부족하고 힘도 약한 도시에 딸을 보내려고 하는 부모는 하나도 없었다. 이 탓에 로마에는 결혼하지 못한 미혼 청년이 넘쳐났다.
로물루스는 결혼을 못한 로마 총각들에게 신붓감을 구해주기 위해 납치를 기획했다. 루키우스 아나이우스 플로루스라는 1세기 로마 역사학자는 『로마사 개요』에서 ‘로마는 이웃 부족에 통혼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여성을)납치하기로 했다’고 적었다.
로물루스는 곡물의 신 콘수스 또는 말의 신인 넵투누스를 기념하는 축제 콘수알리아를 열기로 했다. 미혼 청년 문제로 머리가 아팠던 원로원은 왕의 뜻을 받아들이고 계획을 승인했다. 그는 소문을 잘 내는 사람 여럿을 인근 도시에 보내 이야기를 퍼뜨리게 했다.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숙식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행사가 시작하던 날 많은 이방인이 아내, 딸을 데리고 축제를 구경하러 로마에 몰려들었다. 로물루스는 무르키아 계곡에서 먼저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는 제사를 지낸 뒤 행사를 시작했다. 그는 축제의 열기가 한참 달아오를 때 청년들에게 은밀한 장소에 숨어 있으라고 지시했다. 축제 마지막 날 신호를 보내면 여인들을 납치해 집으로 데리고 가되 절대 몸에 손을 대지 말고 추가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가둬두라고 덧붙였다.
여러 그룹으로 나눠 대기하던 청년들은 축제 마지막 날 저녁에 로물루스의 신호가 떨어지자 눈에 띄는 대로 여인들을 납치했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태에 놀란 다른 도시 사람들은 싸울 생각도 못한 채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로물루스는 다음날 청년들에게 여인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세어 보니 모두 683명이나 됐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청년 683명을 골라 여인들과 짝을 지어 주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여인들을 납치한 이유를 로마에 여자가 부족해서였다고 말한다. 다른 역사학자는 다른 도시와 전쟁을 벌일 명분을 만들려고 고의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로마인들이 여인을 납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라틴 도시는 분개했다. 빼앗긴 아내, 딸을 되찾기 위해 카이니나의 아크론 왕이 가장 먼저 로마로 쳐들어왔다. 로물루스는 아크론 왕에게 일대일 싸움으로 결판을 내자고 했다. 그는 맞대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크론의 목을 베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카이니나 영토로 쳐들어가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
로물루스는 나무 기둥을 어깨에 멘 채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로마로 행진했다. 그는 행렬의 맨 뒤에서 다른 병사들을 따라갔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라색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월계수 관을 쓰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부대별로 행진했다. 조국의 노래를 부르며 신을 찬송하거나, 멋진 시를 읊어 장군을 찬미하기도 했다.
병사들이 로마 근처에 왔을 때 로마인들은 부인과 아이의 손을 잡고 길가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병사들에게 승리를 축하하고 무사 귀환을 환영한다며 박수를 치고 크게 함성을 질렀다. 병사들이 시내에 들어섰을 때에는 와인을 가득 채운 술잔과 온갖 음식을 담은 그릇이 여러 집 앞에 놓여 있었다. 병사들의 노고를 격려하기 위해 귀족들이 차려놓은 것이었다. 병사들은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다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것이 전리품을 나르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승리 행렬, 로물루스가 거행했다고 알려진 로마 최초의 개선식이었다.
부족에서 쫓겨나거나 달아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팔라티노 언덕에 모인 로마인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가지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무기를 드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생산할 수 없다면 약탈하는 게 최선책이었다. 로마가 동포인 다른 라틴 도시로부터 호전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건국 이래로 로마인에게 전쟁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가 만든 야누스의 문이 닫힐 틈이 없을 정도로 로마인에게 전쟁은 생활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고대 로마 시대에 전투는 대개 양쪽 병사끼리 1대1로 싸우는 형식이었다. 처음에는 창, 칼로 싸우다 나중에는 주먹으로 치고받거나 돌을 들기도 했다. 병사로서는 전투에서 이겨 살아남으려면 육체적 능력과 심리적 결단성이 필요했다.
한번 전쟁에 나서면 적을 누르고 돌아올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로마 초창기에는 봄에 전쟁에 나가 가을에 돌아왔지만, 공화정 말기와 제정 시대에는 수년씩 전쟁터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귀향한 장군과 병사들이 동포에게 전쟁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어떻게 이겼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개선식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전쟁에서 이겨 빼앗은 전리품을 수레에 싣고 행진하면서 로마인에게 보여주는 게 개선식의 요지였다. 전쟁을 해서 이기면 얻을 게 많기 때문에 전쟁은 필요하다는 점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탄생할 때부터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제국주의였기 때문에 개선식을 동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개선식을 연 뒤에는 승리 역사를 담은 개선문을 세우는 게 순서였다.
개선식
로마 역사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쳤던 축제 트리암부스가 개선식의 기원이었다고 추정한다. 디오니소스의 영광을 외치면서 술을 마시며 행진하던 행사였다. 이것이 에트루리아로 건너가 유피테르 신에게 감사하기 위해 치르던 종교 행사가 됐다. 이 행사가 다시 로마로 전해지면서 로마인의 정신과 기상을 고양하는 화려한 축제처럼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국 로물루스의 개선식은 에트루리아의 행사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다.
개선장군이 걸어서 로마로 돌아왔던 로물루스 때와는 달리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때부터는 마차를 이용한 성대한 개선식이 열렸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차를 끄는 말 네 마리를 모두 백마로 고른 사람은 2대 집정관 푸블리콜라 발레리우스였다.
로마로 쳐들어왔던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을 꺾고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개선식 때부터는 개선장군을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에 비유했다. 헤라클레스를 개선장군과 연결시킨 것은 ‘사람들의 절대 이익을 위해 헌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개선식은 전쟁에서 이긴 장군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거행하는 행사였다. 공화정 시대에 개선식은 최고의 영예였기 때문에 장군이 개선식을 거행하려면 까다로운 조건을 맞춰야 했다. 19세기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학교 교수였던 윌리엄 램지에 따르면 먼저 독재관, 집정관, 법무관 등 군 통수권(임페리움)을 가진 현직 행정관만 개선식 자격을 갖고 있었다. 외적과 싸워 승리해야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내전 승리는 개선식 조건이 아니었다.
안드레아 만테그나 '카이사르의 개선식' at 로열 컬렉션
전투에서 적 병사 5천 명 이상을 죽이고, 로마군의 피해는 아주 적어야 했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얻어야 했다. 특정 전투에서 5천 명 이상을 죽이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이어져 온 전쟁을 최종 승리로 이끌면 개선식을 허용 받을 수 있었다. 대신 전쟁의 결과로 로마 영토가 확장되어야 했다. 로마에 돌아오면 군대를 해산해야 했다. 이는 전쟁이 끝났고, 군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밝히는 행위였다. 여기서 말하는 군대는 로마 시민 병사에 국한됐다.
램지의 개선식 조건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메리 비어드 교수는 2007년 『로마의 개선식』에서 대다수 역사학자가 사실로 믿는 ‘개선식의 조건’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대부분 조건은 후세에 정치적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선식은 하루 만에 끝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공로가 엄청나게 클 때에는 여러 날에 걸쳐 진행하기도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48년 그리스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누르고, 2년 뒤에는 아프리카에서 소 카토 등 잔당을 제거한 뒤 개선식을 치렀다. 나흘 동안 이어진 개선식이었다. 첫째 날은 갈리아, 둘째 날은 이집트, 셋째 날은 폰투스, 넷째 날은 누미디아 전쟁의 승리를 축하했다. 그는 내전에서도 이겼지만, 내전 승리는 개선식 조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다섯 번째 개선식은 거행하지 않았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BC 79년 등에 걸쳐 세 차례 개선식을 거행했다. 동방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BC 61년에는 카이사르보다 하루 적은 사흘 동안 개선식을 열었다. 그는 45세 생일에 시작한 개선식에서 왕 등 고위 포로 300명을 개선식에 동행시켰다. 플래카드에는 적선 846척을 침몰시켰고, 적군 1천218만 명을 죽이거나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내용을 적었다. 병사들에게는 각각 은화 1천500데나리우스를 나눠주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세 차례 열린 폼페이우스의 개선식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그는 세 대륙에서 거둔 승리를 앞세워 세 차례 개선식을 열었다. 첫 번째는 아프리카의 리비아, 두 번째는 유럽, 마지막은 아시아였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믿는 이론에 따르면 개선식 허용 여부는 전적으로 원로원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장군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면 월계관으로 장식한 함에 승전 기록과 전리품 목록을 담아 원로원에 보낸다. 원로원은 로마 성벽 밖에서 회의를 열어 기록을 면밀히 살펴본 뒤 만족할 만한 내용이라고 판단하면 개선식을 선포한다. 개선식이 선포되면 로마의 모든 신전은 문을 열고 모든 신을 의자에 앉혀 신전 밖에 내놓는다. 전쟁에서 이기게 해 준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신에게 갖가지 공물을 바친다.
공화정 초기에는 민회에서 시민 투표로 개선식 거행 여부가 결정되는 일도 있었다. BC 5세기 발레리우스와 호라티우스에게 주어진 개선식의 경우가 그러했다. 또 사상 첫 평민 독재관이었던 마르키우스 루틸루스도 마찬가지로 시민 투표로 개선식을 치를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아주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민족이었다. ‘현직 행정관만 개선식을 치를 수 있다’는 규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늘 얽매이지는 않았다. 공화정 시대에 집정관 퀸투스 푸블리우스 필로가 전쟁에 나갔을 때 도중에 임기가 끝나고 말았다. 원로원은 그의 임기를 늘려줘 전쟁을 계속 수행하게 했고, 나중에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개선식을 치르게 해 주었다.
다른 예외도 있었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집정관 직책을 가지지 않았는데도 에스파냐 반란 등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세 차례나 개선식을 치렀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불만을 품은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해산시키지 않고 마르스 평원에서 버티고 있어 원로원이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로물루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초창기 개선식은 매우 간단했다. 먼저 적군의 장수와 포로가 개선장군에 앞서 끌려 나갔다. 이어 전리품을 잔뜩 챙긴 병사들이 행진했고, 성문 곳곳에서 이들을 환영하는 만찬이 열렸다. 시민들은 아무렇게나 병사들의 뒤를 따라갔다. 당연히 아주 신나는 노래를 불렀고, 때로는 장난삼아 서로를 야유하고 깔깔 웃기도 했다.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하면서 개선식의 순서와 규모도 달라졌다. 먼저 총사령관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는 군단을 해산해야 했다. 북쪽에서 귀국할 때는 루비콘 강, 남쪽에서 돌아올 때에는 브린디시가 해산 장소였다. 총사령관은 병사들에게 수도 로마에서 열리는 개선식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다. 총사령관은 소수의 수행원만 거느리고 로마로 간다. 개선식이 열릴 때까지 성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가 로마 시내에 발을 딛는 순간 개선식 조건은 소멸되는 게 법이었다.
개선식이 열리는 날 행사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은 마르스 평원에 모인다. 이곳에서 행렬의 선두부터 후미까지 대열을 짠다. 개선장군이 나타나면 병사들은 군단장의 구령에 따라 부동자세로 오른팔을 비스듬하게 들어 올리며 장군에게 경례한다. 고대 로마의 부활을 꿈꾼 무솔리니가 로마 병사들의 경례를 흉내 냈고, 나중에 이 경례를 좋아했던 히틀러도 병사들에게 사용하게 했다.
개선장군은 병사들에게 일장 연설을 한다. 병사들의 용기와 헌신을 찬양하고, 그들에게 돌아갈 보상 규모를 밝힌다. 카이사르의 경우 병사들에게 각각 2만 4천 세스테르티우스를 주었다. 또 곡물 90리터와 오일 90파운드를 선물했다. 로마 시민에게는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선물했고, 연간 임차료 2천 세스테르티우스 이하의 집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1년 임차료를 면제해 주었다.
개선장군의 연설이 끝나면 비로소 개선식이 시작된다. 마르스 평원을 출발한 행렬은 포르타 트리엄팔리스(개선의 문)를 통해 로마 시내로 들어간다. 이 문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4가지 주장이 나온다.
먼저 포르타 트리엄팔리스는 세르비우스 성벽에 붙어 있던 문이었다는 주장이다. 대전차경기장으로 통하는 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부에서는 ‘어느 문이든지 개선장군이 시내로 들어갈 때 사용한 문을 포르타 트리엄팔리스라고 불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마르스의 평원에 별개로 만든 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래 개선식 행렬은 포르타 카르멘탈리스(카르멘탈리스 문)를 지나갔지만 개선식에만 사용하기 위해 포르타 트리엄팔리스를 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재는 마지막 주장이 통설로 받아들여진다.
포르타 트리엄팔리스에는 원로원 의원과 정부 고관이 나와 개선장군을 기다린다. 그들이 앞장서 개선 행렬을 선도한다.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와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 행렬이 뒤를 따른다. 전쟁 상황을 그린 플래카드와 들것(담가) 행렬이 이어진다. 들것에는 정복한 나라와 도시, 민족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실려 있고, 아이보리나 나무로 만든 도시 모형도 실려 있었다. 정복한 지역의 강과 산은 물론 특이한 지형을 담은 그림도 플래카드에 그려져 있었다.
다시 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다른 악대가 뒤를 따르고 제사에서 제물로 쓸 흰 소가 끌려간다. 그 뒤에는 소를 도살할 여러 제사장이 따라간다. 프라이팬처럼 생겼고 손잡이가 달린 접시를 든 제사장도 따라간다. 점령지에서 끌고 온 코끼리 등 이색동물 행렬이 이어지고, 적군의 주요 무기나 적장의 휘장이 등장한다. 전쟁에서 사로잡은 적장이나 포로를 태운 마차도 등장한다. 카이사르의 개선식에는 갈리아의 베르킨게토릭스, 이집트의 아르시노에 공주, 폰토스의 파르나케스 왕의 아들, 누미디아의 유바 왕의 아들 등이 포로로 등장했다.
개선식에 끌려 나온 포로는 포로 로마노에 있는 감옥인 툴리아눔에 갇힌다. 로마에 맞섰다 마리우스에 패해 붙잡혔던 누미디아 왕인 유구르타는 여기서 굶어죽었다. 갈리아 여러 부족의 힘을 모아 로마에 맞서 싸웠던 아르베르니 부족의 베르킨게토릭스 족장은 감옥에 갇힌 뒤 처형당했다. 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로마 속주 시리아에서 팔미라 왕국을 세웠던 제노비아 여왕은 사면을 받기도 했다.
이제 개선장군이 나설 차례다. 호위병인 릭토르 12명이 집정관을 상징하는 파스케스를 들고 앞장서면 말 네 마리가 이끄는 둥근 마차를 탄 개선장군이 등장한다. BC 2세기까지는 개선장군이 전차를 직접 몰았다. BC 1세기부터는 하인이 전차를 몰고, 개선장군은 그 위에 올라가 군중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었다.
개선장군은 화려한 수를 놓은 황금색 토가와 꽃무늬가 새겨진 튜닉을 입는다. 시대나 사람에 따라 옷의 모양과 색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개선장군을 신이나 왕처럼 보이게 만드는 옷이었다. 이마에는 월계수관을 쓰고, 오른손에는 월계수 나뭇가지를, 왼손에는 홀을 든다. 공화정 초기에는 유피테르 신을 흉내 내 얼굴을 주홍색으로 칠하기도 했다.
개선장군 뒤에는 황금관을 쓴 노예가 뒤따르기도 했다. 노예는 개선장군에게 끊임없이 ‘레스피케 포스트 테 호미넴 메멘토 테’라고 속삭였다. “항상 뒤를 보라. 너는 불멸이 아니다. 도덕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개선장군이 승리에 도취돼 도덕성을 망각하고 자만에 빠지거나, 황제가 되려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을 막자는 의도였다. 똑같은 이유로 성기 모양의 작은 종인 파스키눔과 채찍이 마차에 달려 있기도 했다. 파스키눔은 원래 ‘성기의 신’ 파스키누스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신은 어린이와 개선장군에게서 악운을 물리쳐주는 힘을 가졌다고 로마인은 믿었다.
개선장군 뒤로는 참모들이 말을 타고 따라가고, 군단 병사들이 행진한다. 군단장, 대대장, 백인대장에 이어 군단, 대대, 중대별로 행진한다. 이들의 행진은 위풍당당하다기보다는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강했다. 그들은 이날을 위해 미리 정해둔 구호를 합창한다. 우쭐해지기 쉬운 개선장군의 위엄에 찬물을 끼얹는 구호를 외치는 게 로마 개선식의 전통이었다. 신이 개선장군을 질투하지 않게 만든다는 게 이유였다. 카이사르의 개선식에서 나온 구호는 이랬다.
‘우리는 고향에 대머리 호색한을 데려왔다네.
로마인이여, 마누라를 제대로 단속하라.
당신이 그에게 빌려준 황금 보따리는
갈리아 매춘부에게 쓰느라 모두 사라졌다네.’
개선 행렬은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거쳐 비아 트리엄팔리스(개선의 길)로 이어진다. 이후 팔라티노 언덕을 지나 콜로세움 쪽으로 행진한다. 콜로세움 앞의 분수 메타 수단스까지 가서 회전한 뒤 포로 로마노로 방향을 바꾼다.
개선장군은 포로 로마노 중심가인 사크라 비아(신성한 길)를 거쳐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이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간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엄숙해진다. 신에게 감사를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기 때문이다. 개선장군은 신전 밖에서 하얀 소를 잡아 유피테르 신에게 바친다. 신전에는 혼자 들어가 다시 월계수 관을 헌정한다.
개선장군은 유피테르 신전에는 왜 들어갔을까? 단순히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그렇지는 않다. 그는 이곳에서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 용서를 구했다. 많은 피를 뿌린 데 대한 일종의 세정식이었다. 그는 로마 최고의 신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위대한 유피테르 신이여, 적의 우두머리를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을 모욕하려 했던 자들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머리를 자르소서! 당신의 병사들은 피의 바다에 뛰어들어 정당하고 명예롭게 제국을 구했습니다. 유피테르 신만이 그들의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 정화해주실 수 있습니다. 저와 병사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개선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거리에는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은 시민들이 나와 개선장군에게 꽃 세례를 퍼부으며 열렬한 환영 인사를 건넨다. 때로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신전이나 건물 계단, 꼭대기에 올라가 개선식을 구경하기도 했다. 로마 시내의 모든 신전은 문을 열어 신들도 개선식을 구경할 수 있게 했으며, 신전 곳곳을 꽃으로 장식했다. 신전에 있는 모든 제단에는 향을 피워 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개선장군은 개선식을 마친 다음 시민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푼다. 나흘간 치러진 카이사르의 개선식 때에는 나흘간 잔치를 베풀었다. 잔칫상은 무려 2만 2천 개에 이르렀고, 손님은 6만여 명을 넘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곳곳에서 검투사 경기와 연극 공연을 열었고,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는 매일 전차 경기를 진행했다. 테베레 강에서는 모의해전을 펼치기도 했다.
기록에는 ‘아시아와 비티니아에서 끌려온 공주들이 로마 시민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적혀 있다. 데키무스 라베리우스라는 기사계급의 시민은 직접 만든 소극을 공연했다. 그는 상금 50만 세스테르티우스와 금반지를 선물 받았다.
개선식과 축하잔치 등 모든 행사를 마친 개선장군이 밤늦게 집에 돌아갈 때에는 시민들이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면서 배웅해주었다. 개선장군의 영예는 개선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개 국가가 비용을 지불해 개선장군의 업적에 걸맞은 집을 마련해주는 게 관례였다.
개선장군이 죽으면 시신을 화장한 뒤 유해를 로마 시내에 보관할 수 있었다. 로마에서는 종교적 이유 때문에 시신을 시내에 묻을 수 없는 게 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특혜인 셈이다. 개선장군의 유족이 사는 집의 정문 앞에는 월계관을 쓴 개선장군 동상을 실은 개선마차를 설치할 수 있었다.
정식 개선식 외에 소규모 개선식도 있었다. 트리엄푸스 나발리스는 해군을 위한 개선식이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모두 네 차례 해군 개선식이 열렸다. BC 260년 카르타고 해군을 상대로 로마군 사상 첫 해전을 승리로 이끈 두일리우스가 첫 해군 개선장군이었다. BC 241년 역시 카르타고 해군을 몰살시킨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BC 189년 크레타를 상대로 해전에서 이긴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10여 년 뒤 마케도니아의 왕 페르세우를 바다에서 제압한 옥타비우스가 뒤를 이었다. 집정관이 아니지만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군 지휘관에게도 미니 개선식을 허용했다. 로마 시내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마르스 평원에서 행진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를 트리움푸스 카스트렌시스라고 불렀다.
로마 역사에서 개선식은 제국주의 팽창의 시기였고 공격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던 공화정 시대에 주로 펼쳐졌다. 제국이 어지간히 커져 더 이상 영토 확장이 어려웠고 방어적 전쟁에만 치중했던 제정 시대에는 드물었다. 공화정 시대에는 개선식이 300여 차례 펼쳐졌지만 황제가 다스리던 제정 시대에는 30여 차례밖에 열리지 않았다.
공화정 시대에는 집정관이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다. 총사령관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원로원의 허락만 받으면 쉽게 개선식을 열 수 있었다. 반면 제정 시대에는 황제가 총사령관이었다. 장군이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개선식 자격을 가진 사람은 황제였다. 제정 로마 초‧중기에는 티베리우스, 트라야누스 외에는 전쟁을 제대로 경험한 황제가 없었다. 국경이 비교적 안정돼 황제가 전쟁을 경험할 기회도 적었다. 그래서 개선식이 열릴 만한 일도 별로 없었다.
오현제 시대를 지나 군인황제 시대가 되면서 로마 곳곳에서 전쟁이 터졌다. 군인황제들은 제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야만족을 무찔렀다. 공화정 시대라면 개선식을 치를 만한 공적을 많이 쌓았지만, 군인황제들은 끊임없는 야만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느라 개선식을 거행하러 로마로 돌아갈 시간조차 없었다.
로마에서 개선식을 마지막으로 치른 이는 5세기 초 호노리우스 황제였다. 그는 충복이었던 스틸리코 장군이 서고트족과의 전쟁에서 연거푸 승리하자 로마에서 개선식을 열었다. 사두마차에 오른 것은 총사령관 자격을 가진 호노리우스였고, 실제 전쟁을 치른 장군 스틸리코는 말을 타고 뒤를 따라가는 데 그쳤다.
개선문
로마는 공화정 중기부터 삼니움, 타렌툼, 시칠리아, 카르타고 전쟁 등을 치르면서 서서히 제국으로 성장해갔다. 장군, 황제는 개선식을 거행한 뒤에는 건축물을 지어 전쟁 승리의 역사를 영구히 남기려 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건물이 개선문이었다.
이런 형태의 승전 기념물을 만든 것은 로마가 처음이었다. 당시 다른 나라나 부족의 경우 전쟁에서 이기면 장군의 동상이나 기념 원주를 세우곤 했다. 그리스 일부 지역에서는 똑같은 모양의 동상이나 기둥을 나란히 두 개 세우기도 했다.
로마에서 개선문의 시초는 포르타 트리암팔리스였다. 마르스 평원을 출발한 개선 행렬이 로마 시내로 들어갔던 문이었다. 개선식이 열릴 때면 이 문에는 각종 전리품과 승리를 상징할 만한 기념물이 내걸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는 물론 다른 속주와 식민시에도 개선문이 하나둘씩 건설됐다. 대개 큰길을 가로질러 세워졌다. 오가는 행인이 개선문을 보면서 과거 전쟁 승리를 거둔 장군의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에서였다.
대형 개선문도 있었지만 소형 개선문도 적지 않았다. 모양은 다양했다. 아치 한 개로 이뤄진 개선문이 있었는가 하면, 차량이 지날 수 있는 대형 아치를 길에 가로질러 세우고 양쪽 옆에는 보행자가 걸어가는 소형 아치 두 개를 덧붙여 웅장하게 보이도록 만든 개선문도 있었다. 때로는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개선문 두 개를 나란히 세우기도 했다.
개선문의 기본 양식은 거의 비슷했다. 양쪽에 굵은 기둥 두 개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 엔타블러처가 얹혔다. 양쪽 정면에는 원주가 붙여졌고, 여러 가지 부조가 장식으로 달렸다. 정면 윗부분에는 개선문을 건설한 이유 등을 글로 새겼다.
로마에서 포르타 트리암팔리스보다 더 발전한 개선문을 처음 세운 사람은 BC 2세기 정치가, 군인이었던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였다. 전직집정관 자격으로 히스파냐 울테리오르 총독을 지내다 은 2만 3천㎏를 챙겨 귀국한 그는 로마에 개선문을 세 개 건설했다. 두 개는 포룸 보아리움에, 나머지 하나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만들었다.
6년 뒤에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누르고 로마에 최종적인 승리를 안겨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이어지는 도로인 클리부스 카피톨리누스에 개선문을 만들었다. 그는 그곳에 도금한 조각상 일곱 개와 말 조각상 두 개를 붙였다.
포로 로마노에 첫 개선문이 세워진 것은 BC 121년이었다. 갈리아족을 상대로 승전한 집정관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기념해 사크라 비아에 세운 파비아누스 개선문이었다. 스테르티니우스와 스키피오, 막시무스가 세운 개선문은 모두 부서져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로마에 건설된 개선문은 모두 20~30개였다. 이 가운데 지금 살아남은 것은 티투스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드루수스 개선문, 갈리에누스 개선문 등 다섯 개뿐이다.
티투스 개선문
티투스 개선문은 유대 학살과 탄압의 역사를 담고 있는 건축물이다. 티투스 황제는 즉위 이전인 67~70년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가 지휘한 로마군이 학살한 유대인은 자그마치 60만~100만 명이었다. 예루살렘은 벽 하나만 남기고 완전히 폐허가 됐다. 유대인은 고향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됐다. 티투스가 죽은 뒤 동생인 도미티니아누스 황제는 개선문을 만들어 형에게 헌정했다. 유대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역사 때문에 이곳은 디아스포라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됐다.
티투스 개선문은 1948년 뜻밖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신생국가를 창설한 이스라엘 은 나라의 상징인 국장을 만들기 위해 디자인 공모전을 실시했다. 이때 메노라가 들어간 디자인이 당선됐다. 메노라는 성경에 나오는 성물인데, 가지가 7개인 촛대였다. 메노라가 들어간 국장을 기초로 해서 이스라엘 정부 각 부처의 휘장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메노라는 고대에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메노라의 정확한 모양을 알지 못했다.
세계 곳곳을 조사하던 이스라엘 정부는 티투스 개선문 부조에 메노라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대인이 로마로 끌려가면서 메노라를 운반하는 장면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부조를 바탕으로 마침내 국장을 만들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메노라는 베스파시나우스 포럼에 있었던 평화의 사원에 보관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메노라의 행방에 대해서는 세 가지 가설이 있다. 먼저 5세기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에 쳐들어와 훔쳐갔다는 주장이다. 서고트족에 이어 로마를 침공한 겐세리크의 반달족이 카르타고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으로 비잔틴제국의 명장이었던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다는 가설도 있다. 6세기 비잔틴제국 역사학자 프로코피우스는 ‘벨리사리우스가 개선식을 할 때 메노라를 함께 들고 왔다. 나중에 메노라는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담은 티투스 개선문은 중세에는 유대인 탄압의 상징이 됐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교황 바오로 4세(재임 1555~59년)는 티투스 개선문에서 충성 서약식을 열었다. 모든 로마인에게 개선문 밑을 지나가면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자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라고 했다.
유대인은 행진을 거부했다. 조상을 학살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건축물 아래를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교황은 유대인을 집단거주시설에 가두기로 했다. 그는 티베르 강변에 유대인 집단 거주 시설을 만들었다. 그곳에는 ‘쓰레기’, ‘찌꺼기’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인 게토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대인은 이후 300여 년 동안 게토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 지역은 해마다 홍수나 발생해서 많은 재산, 인명 피해가 나던 곳이었다. 로마에서 가장 지저분해서 위생에 문제가 많아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1789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을 발아래에 뒀을 때 유대인은 게토에서 나올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가 실각하자마자 교황은 유대인에게 게토로 돌아가라고 했다. 로마의 게토는 ‘유럽의 마지막 게토’로 남아 있다 1930년에야 완전히 없어졌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은 2세기 말 코모두스 황제 암살 이후 혼란에 빠진 로마 제국을 안정시킨 세베루스 황제에게 바친 건축물이었다. 이 개선문은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건축물이다. 꼭대기에 있던 동상은 모두 부서져 사라지고 부조의 색깔도 다 바랬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판노니아 지역 총독이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코모두스 암살 이후 권좌에 올랐다. 원래 장군 출신인 페르티낙스가 로마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지만 근위대에게 암살당한 게 그에게 행운이 돌아간 계기였다. 분노한 로마군을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간 세베루스는 근위대 병사를 모두 처형한 뒤 원로원 승인을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서쪽에서 들고 일어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동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페세니우스 니제르를 모두 제압하고 로마를 분열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세베루스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페세니우스를 지지했던 파르티아 왕국에 쳐들어가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원로원은 황제에게 개선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통풍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세베루스는 대신 개선문을 짓기로 했다. 개선문에는 각종 전쟁에서 거둔 승리 기록을 모두 새겨 넣었다. 개선식을 열지 못한 아쉬움이 개선문에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개선문에는 세베루스 황제는 물론 전쟁에 동행했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 세베루스가 죽은 뒤 두 아들은 공동황제가 됐지만 212년 카라칼라는 동생을 살해하고 황제 자리를 독점했다. 카라칼라는 개선문에 새겨진 게타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 개선문뿐만 아니라 로마에 있는 모든 건물이나 서류에 남아있던 동생의 기록을 다 삭제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로마 말기 사두정치의 결과물이었고 기독교 시대 개막의 상징물이었다. 사두정치를 설명하면 너무 많은 사람 이름이 오가기 때문에 꽤 복잡하다. 하지만 개선문 건립 과정을 알려면 사두정치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3세기 말 군인 황제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혼자서 다스리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영토가 너무 넓은데다 게르마니아와 아프리카, 페르시아에서 외적 침범이 이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었다. 자신은 동방 황제 자리에 앉고 동향인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서방 황제 자리를 맡겼다. 이어 부제 제도를 만들어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를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를 4명이 통치하는 사두정치가 만들어졌다.
천하를 4명이 사이좋게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했다. 사두정치 붕괴의 시작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일이었다. 그 뒤를 이어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가 각각 서방과 동방의 황제로 승격했다.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서방과 동방의 부제가 됐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가 브리타니아 원정에 나섰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는 우여곡절 끝에 서방의 부제가 됐다. 세베루스는 서방 황제로 추대됐다.
이에 대해 전직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불만을 터뜨렸다. 전직 황제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부제로 승격했다면 자신도 부제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원로원을 등에 업고 황제 자리에 올랐고, 토벌군을 이끌고 온 세베루스를 없애버렸다.
천하통일의 꿈을 꾸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로마로 쳐들어갔다. 대권을 장악하려면 먼저 막센티우스를 제거해 로마 서부를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로마 외곽 밀비우스 다리 인근 평원에서 막센티우스의 16만 대군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뒀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전투를 앞두고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가 행진하던 하늘에 구름 사이로 신비한 십자가 모양 빛이 내려비쳤다. 그 아래에는 그리스어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엔 타우토 니카, 이 표식으로 승리하리라’는 글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조짐을 보고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새기게 한 덕분에 승리를 거뒀다. 물론 전투가 끝나고 세월이 흘러 먼 이후에 기독교가 만들어낸 전설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튿날 로마로 입성했다. 원로원은 그에게 개선식과 개선문의 영광을 바치기로 했다. 로마가 내전에서 동포의 가슴에 칼을 꽂은 승자에게 개선식을 베풀어주고 개선문을 만들어준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처음이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개선식이 거행되는 경로인 비아 트리암팔리스와 콜로세움, 그리고 베누스-로마 신전 사이에 세워졌다. 높이는 20m, 폭은 25m, 두께는 7m 정도다. 아치 중앙 부분의 높이는 12m다. 개선문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원로원이 그에게 얼마나 머리를 조아리고 아부했는지 잘 드러나는 글이다.
‘경건하고 행운이 넘치는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신의 영감과 위대한 정신으로 그리고 정당한 수단으로
독재자와 그의 당파에게
정의로운 전투에서 공화국의 복수를 했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은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며 개선문을 지어 바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는 많은 부조가 붙어 있다. 상당수는 오현제 시대 여러 황제가 건설한 개선문이나 다른 건축물에서 떼어내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에 맞춰 적당히 재배열해 붙인 것이다. 다른 곳에서 뜯어온 부조 등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선하는 모습, 로마 시민에게 돈을 나눠주는 모습, 황제 앞에 끌려나온 적장 모습 등으로 바꿔 놓았다. 미술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조각과 다른 건축물에서 뜯어내 붙인 장식물을 예술 정신의 부족, 로마 말기 경제적 쇠락을 상징한다고 혹평했다.
개선문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개선문 건축 기간이 너무 짧아 각종 장식물을 제대로 만들 시간이 부족했다. 당시 로마의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도 다른 까닭이었다. 또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은 로마의 전성기를 구가한 오현제를 합친 것보다 크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서둘러 만든 건축물이지만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외관은 상당히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다른 여러 나라의 개선문과 건축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앞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이 대표적이다. 독일 뮌헨의 지게스토르(승리의 문), 미국 워싱턴의 유니언 스테이션 건물도 기본적으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