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원히 조국을 지킬 것이오
고대 로마에는 황제 일족을 묻는 공동묘지가 두 개 있었다. 제정 시대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과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하드리아누스가 건설한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이 바로 그것이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은 지금은 산탄젤로 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우솔레움은 건축물 형태의 대형 무덤이다. 왕은 물론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람의 시신이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만든 아주 큰 구조물을 의미한다. 로마에서 시작한 건축물은 아니지만 로마의 두 무덤이 워낙 유명해 대부분 사람은 마우솔레움이라고 하면 로마를 먼저 떠올린다. 로마의 마우솔레움을 들여다보면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마우솔레움은 테베레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비스듬하게 마주보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은 옛 영화를 완전히 잊은 채 거의 폐허처럼 변해버렸다. 반면 산탄젤로 성은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2세기 무렵 그리스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의 『그리스 안내』에 따르면 마우솔레움은 고대 그리스에 있던 카리아의 수도 할리카르나소스에서 유래한 건축물이다. 지금은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이다. 이 건축물은 카리아의 마우솔로스 왕이 묻힌 무덤이었다. 당시에는 ‘세계의 7대 신비’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건축물이었다.
마우솔레움은 카리아의 독창적인 창작품은 아니었다. 그들도 다른 곳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페르시아 영토였던 리키아의 크산토스에 있던 거대한 무덤 네레이드 추모탑이 원조였다. 리키아는 오늘날 터키의 페티예 지역이다.
네레이드 추모탑은 조각 부조로 장식한 기단 위에 세운 그리스 신전 모양 건축물이었다. BC 390년 아르비나스 왕을 묻기 위해 만든 무덤으로 추정된다. 외양은 그리스 신전을 닮았지만 실제로는 조로아스터 교의 기준에 따라 만든 무덤이었다. 두꺼운 석재를 사용했고, 땅에 만든 대좌 위에 건설했고, 유리창을 하나도 만들지 않은 게 조로아스터 방식이었다.
마우솔로스는 로도스 섬을 정복하는 등 활발한 영토 확장 활동을 벌였다. 수도를 할리카르나소스로 옮기기도 했다. 아나톨리아 남쪽 해안지방까지 진출했고, 리키아 영토도 침범했다. 그때 크산토스의 네레이드 추모탑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죽기 전부터 엄청난 규모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무덤을 최종적으로 완성한 사람은 그의 왕비였던 아르테미시아였다.
마우솔로스는 BC 353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정말 사랑했던 아르테미시아는 남편의 무덤을 서둘러 완공하기로 했다. 그녀는 에페소스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축한 스코파스와 당시 최고 건축가 필레우스, 사티루스를 초빙해 무덤을 만들게 했다. 또 그리스 최고 조각가로 유명했던 레오카레스, 브리아시스, 티모테우스와 손재주가 빼어났던 예술가 수백 명을 데려와 묘지를 꾸미게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마우솔로스의 무덤이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다웠던지 나중에 할리카르나소스를 점령한 로마인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로마인들은 큰 무덤을 마우솔레아라고 부르게 됐고, 이것이 나중에 마우솔레움이 됐다.
사람을 땅에 묻지 않고 건물을 지어 안치하는 방식은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타지마할, 고대 고마의 카타콤베도 고대에 가장 유명한 안치 방식의 건물이었다. 마우솔레움의 장점은 전통적 매장보다 깨끗하고 건조하게 무덤을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장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땅에 묻히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알맞은 방식이다. 가족 등 단체로 안치할 경우 매장보다 땅을 덜 차지한다는 것도 장점이다. 마우솔레움은 건물이기 때문에 유족이 언제나 손쉽게 방문할 수 있고, 날씨가 나쁠 때에도 찾아갈 수 있다. 또 공원을 만들거나 각종 편의시설을 설치할 수 있어 유족이 방문했을 때 좀 더 안락하게 둘러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마우솔레움을 영묘라고 번역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영묘를 ‘선조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라고 설명해놓았다. 그렇다면 마우솔레움을 영묘라고 번역하기는 곤란할 것 같다. 망자를 화장한 유해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한 곳이니 차라리 황제 봉안당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사실 로마에서는 아우구스투스와 하드리아누스만 마우솔레움을 만든 게 아니었다. 두 황제의 마우솔레움 외에 4세기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어머니 헬레나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헬레나 마우솔레움을 만들었다. 이 무덤은 326~330년 사이 로마 동남쪽 비아 카실리나에 지금도 남아 있다. 원래는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하려고 만들었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곳에 모셨다고 전해진다.
로마의 귀족이나 부자도 마우솔레움을 만들었다. 로마 지하철 역 중에 피라미데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가면 케스티우스의 피라미드라는 건축물을 볼 수 있다. BC 1세기 행정관이었던 가이우스 케스티우스의 무덤이다. 이곳도 일종의 마우솔레움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로마 시내에서 곳곳으로 뻗어나가는 도로 주변의 공동묘지에는 작은 마우솔레움이 수없이 세워져 있었다. 지금도 로마 남쪽으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 일부 지역에서는 개인용 마우솔레움 유적을 볼 수 있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연합군을 누른 아우구스투스는 귀국한 직후 놀라운 말을 꺼냈다. 마르스 평원에 대형 무덤인 마우솔레움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공사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겨우 서른두 살 때였다. 완성한 것은 황제로 즉위하기 한 해 전인 BC 28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 때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무려 42년 전이었다.
로마에는 죽기 전부터 무덤을 만드는 관습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우구스투스는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서둘러 무덤을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일까? 거기에는 정치적 배경이 깊이 깔려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내전 상태에 빠져 혼란스러운 로마를 통일하고 평화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팍스 로마나’라고 불렀다. 그는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이나 이후에 늘 스스로를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 즉 원로원 의원 중에서 1인자일 뿐이라고 말하며 겸손을 떨었다. 로마의 다른 지도자나 원로원 의원보다 큰 특혜나 실권을 갖고 있지 않다며 머리를 숙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이처럼 겸허해하며 황제 티를 내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로마인들은 BC 509년 왕정을 폐지할 때 다시는 왕을 모시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이 이런 맹세를 한 것은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가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왕을 쫓아내고 첫 집정관이 됐을 때였다.
두 사람은 로마를 정화하는 의례를 치른 데 이어 신성한 맹세 의례를 거행했다. 두 사람은 로마를 정화하는 의례를 치른 데 이어 신성한 맹세 의례를 거행했다. 두 사람이 유피테르 신 등에게 바친 희생물 옆에서 먼저 “우리는 추방한 타르퀴니우스는 물론 그의 아들이나 후손도 절대 왕으로 복귀시키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어느 누구도 왕으로 받들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왕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맹세는 우리는 물론 우리의 아이, 후손에게까지 영원히 이어져 지켜질 것이다”라고 맹세했다. 다른 로마인들도 그들을 따라 신에게 맹세했다.
두 사람이 희생물 옆에서 먼저 맹세하자 모든 로마 시민도 그들을 따라 “우리는 추방한 타르퀴니우스는 물론 그의 아들이나 후손도 절대 왕으로 복귀시키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어느 누구도 왕으로 받들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왕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맹세는 우리는 물론 우리의 아이, 후손에게까지 영원히 이어져 지켜질 것이다”라고 맹세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왜 암살당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다가는 황제 자리에 오르기는커녕 카이사르처럼 목숨을 잃거나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겸손을 앞세워 고개를 깊숙이 숙인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로마에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주었고 특히 새로운 지도자의 계보를 시작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덧붙여 ‘나의 혈통만이 로마에 영원한 평화와 부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로마인들에게 납득시키려 애썼다. 이런 생각을 로마인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은 물론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다양한 선전 또는 홍보 도구를 사용했다. 여기에는 건축물도 있었고 문학도 있었다.
건축물로는 평화를 이룬 황제에게 바친 제단인 아라 파키스(평화의 제단), 황제의 업적을 기록한 대형 명판인 레스 게스타(업적록), 해시계인 호롤로기움 아우구스티 등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인 9월 23일이 되면 호롤로기움은 정확하게 아라 파키스 중앙을 가리키게 돼 있었다.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필수불가결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로마인들에게 널리 알리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황제의 위대성을 홍보하는 데 앞장선 문필가로는 베르길리우스가 있었다. 그는 『아이네이드』에서 아우구스투스를 ‘운명으로 정해진 로마의 구세주’라고 묘사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필수불가결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었던 것’이라는 게 그가 남긴 글의 내용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30대 중반에 서둘러 마우솔레움을 건설한 것도 선전 작업 중의 하나였다. 마우솔레움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생각해낸 새로운 방안이었다. 정적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당시에는 유력인사의 유언장은 베스타 신전에 보관했다. 베스탈 신녀가 아무도 볼 수 없게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볼 수 없게’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이었고, 권력자가 비밀리에 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가 죽기 전에 이미 그의 유언장 내용을 알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죽은 뒤 이집트에, 그것도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안토니우스가 BC 30년 이집트에서 자살하자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유언장을 즉각 공개했다. 그를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나는 안토니우스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할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겨우 서른다섯 살에 자신의 무덤인 마우솔레움을 완공한 것은 죽음조차도 선전 도구로 활용한 결과물이었다. 그가 로마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나는 살아서도 물론이거니와 죽어서도 로마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와 가족이 묻힐 마우솔레움을 지금 미리 만들었다”라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스 평원을 마우솔레움 건설지로 골랐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당시 로마에서는 저명한 인사가 세상을 떠나면 원로원이 결의안을 통과시켜 마르스 평원에 무덤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게 관례였다. 이곳에는 많은 열주 회랑뿐만 아니라 대극장, 경기장,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장소에 무덤을 만듦으로써 로마의 전통을 따르는 지도자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다.
다른 하나는 마르스 평원이 로마 초기부터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외국으로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 병사를 집결시키는 장소였다는 점이다. 이런 곳에 무덤을 만들면 로마인들과 원로원은 늘 공간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확보한 군사적 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에서 최고 지도자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로마의 신성한 경계선 포메리움을 벗어나서 행사할 수 있는 군사권인 임페리움 밀리티아이였다. 다른 하나는 로마 안에서 행사할 수 있는 행정권인 임페리움 도미였다. 마우솔레움이 완성될 무렵 아우구스투스가 100% 확실하게 행사할 수 있었던 권리는 임페리움 밀리티아이 뿐이었다. 임페리움 도미는 5년 뒤에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마우솔레움을 건설한 아우구스투스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로마를 배신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나를 로마의 구세주로 부각시킨다. 군사력을 과시해 다른 정적이 감히 반란을 일으킬 꿈도 못 꾸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이제부터 로마에서는 새로운 혈통의 가문이 영원한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은 지름 87m, 높이 42m에 이르는 원형 묘지였다. 지붕은 돔 모양이었으며 그 아래에 유해 안치 공간이 설치돼 있었다. 입구는 남쪽으로 난 조그만 방이었다. 창문을 통해 그곳으로 빛이 들어오게 돼 있었다. 입구에는 기둥 두 개가 있었다. 여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새긴 청동판이 붙어 있었다. 이 청동판을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이라고 불렀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중 반지 모양의 밀폐된 방을 지나게 된다. 이어 두 개의 문이 있는 벽으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복도를 빙 돌아가면 마우솔레움의 중심지, 즉 안치실이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 꼭대기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족, 친척, 가까운 친구의 유해가 놓여 있었다. 황제와 가족이 숨지면 바깥에서 화장한 뒤 재를 황금 항아리에 담아 이곳에 보관했다.
마우솔레움 외벽은 둥근 강철 담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담장 안에는 검은 포플러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주변에는 나무를 빼곡하게 심어 공원을 조성했다. 입구 앞에는 오벨리스크 두 개가 서 있었다. 나중에 하나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북서쪽에 있는 에스퀼리노 광장으로, 다른 하나는 퀴리날레 분수로 옮겨졌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이 만들어지는 도중에, 또는 다 만들어진 이후에 그가 황제 후계자로 생각했던 이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마우솔레움에 가장 먼저 묻힌 사람은 BC 23년에 숨을 거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19세이던 누나의 아들 마르켈루스가 적당한 나이로 성장하면 후계자로 삼아 대권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마르켈루스의 죽음을 둘러싼 상세한 내용은 디오 카시우스가 쓴 『로마사』에 나온다.
‘아우구스투스는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함께 11번째 집정관이 됐을 때 큰 병에 걸려 드러누웠다. 모두 회생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반지를 건네주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안토니우스 무사가 냉욕과 차가운 약물이라는 처방을 내려 기적적으로 황제를 살렸다. 아우구스투스가 회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마르켈루스가 병석에 누웠다. 무사가 비슷한 처방을 시도했지만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BC 12년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지이며 장군이었던 아그리파가 세상을 떠났다. 아우구스투스는 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몰렸을 때 제위를 상징하는 반지를 넘겨줄 정도로 아그리파를 신뢰했다. 그런데 무인 출신이어서 건강할 것으로 기대했던 아그리파가 오히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가 죽은 이야기도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에 나온다.
‘아우구스투스는 5년 기한으로 호민관 권한을 수여함으로써 아그리파의 권력을 강화시켜준 뒤 반란이 일어난 판노니아로 보냈다.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아그리파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다. 깜짝 놀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떠나 아그리파를 문병하러 갔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는 벌써 눈을 감은 뒤였다. 그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고 마우솔레움에 묻어주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재혼한 아내 리비아의 둘째아들이었던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도 급사했다. 그는 게르만 족을 제압했다고 해서 ‘게르마니쿠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다. 겨울에 갈리아의 숙영지로 돌아가다 실수로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늘 표정이 어두웠던 리비아의 큰아들 티베리우스에게는 큰 애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성격이 좋았던 둘째아들 드루수스는 매우 아꼈다. 누나의 딸인 안토니아를 드루수스와 결혼시킬 정도였다. 속으로는 그를 차기 제위 계승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일부 역사학자는 주장한다.
아우구스투스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딸 율리아가 아그리파와 결혼해 낳은 두 아들, 즉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손자이자 양아들이었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할아버지보다 10년 정도 일찍 사망해 나란히 마우솔레움에 들어간 것이었다.
후계자로 생각했던 조카, 친구, 손자 등이 일찍 죽는 비극을 맛본 아우구스투스는 마지못해 티베리우스에게 권좌를 물려준 뒤 서기 11년 로마 남쪽의 놀라에서 7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는 “흙으로 만든 로마를 물려받아 대리석으로 만든 로마를 남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부에서는 티베리우스가 황제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다른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병들었을 때 티베리우스는 계속 곁에 있었으며,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받아 집행했다’면서 독살설이나 반란설을 반박한다. 디오 카시우스는 『로마사』에서 ‘아들을 황제로 앉히고 싶어 했던 아우구스투스의 부인 리비아가 독살에 가담했다는 의혹도 나왔다’고 주장했다. 많은 역사학자가 이 주장에 견해를 같이한다.
아우구스투스의 장례식은 포로 로마노에서 시작했다. 관에 담긴 그의 시신은 상아와 황금으로 만든 마차에 실렸다. 마차 앞에는 개선장군 복장을 한 아우구스투스의 밀랍인형이 세워졌다. 황금으로 만든 아우구스투스 조각상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조상들의 초상이 밀랍인형과 황금 조각상 뒤를 따라갔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초상은 없었다. 그는 이미 신격화돼 아우구스투스보다 한 단계 높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티베리우스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나라의 지도자이자 로마의 국부로 추앙했습니다. 원로원은 많은 존경의 표시와 수많은 집정관직 헌정으로 그의 영광을 드높였습니다. 마침내는 그를 신격화된 통치자로 만들고 불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투스를 잃었다고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그의 영혼을 신의 영혼으로 영원히 찬미해야 합니다.”
포로 로마노의 로스트라 앞에서 유족이나 지인 중 한 명이 추도사를 읽는 것도 고대 로마의 관습이었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건설한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장례식 때 처음 도입된 관습이었다. 당시 그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콜라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유명한 여성 장례식에서도 추도사를 낭독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부인이었던 고모가 세상을 떠나자 직접 추도사를 읽었다.
마차는 개선문 한가운데를 지나갔고, 시신은 마르스 평원에 마련된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놓였다. 대제관인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포함한 모든 제관이 장작더미를 둥글게 에워쌌다. 그 뒤로 원로원과 기사계급이 원 모양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대 로마 초창기에는 망자의 시신을 매장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공화정 말기부터는 화장이 대세를 이뤘다. BC 2세기 북부에서 쳐들어온 갈리아 군대를 물리쳐 평민의 영웅이 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매장됐다. 반면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마리우스의 앙숙인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화장됐다. 화장 문화는 4세기 기독교 시대부터 점점 사라졌다.
원로원 규정에 따라 백인대장이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불은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타올라갔다. 불길이 정점에 이르자 묶여 있던 독수리 한 마리가 방사됐다. 아우구스투스의 영혼이 독수리의 등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기원하는 뜻에서였다. 유해는 다른 가족처럼 마우솔레움에 안치됐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모든 속주에서 흙을 담은 항아리 한 개씩을 가져오게 해서 마우솔레움 위에 뿌리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생전에 이룩한 제국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무덤에서라도 지켜보면서 영면에 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에는 아우구스투스와 부인 리비아는 물론 조카인 마르켈루스, 친구이자 장군 아그리파, 의붓아들 드루수스, 누나 옥타비아, 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의 큰아들 게르마니쿠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 자리에 올랐던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르바 등 20명의 유해가 안치됐다.
고대 로마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시작한 황제였지만 아우구스투스도 역사의 거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로마의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웅장하기 이를 데 없었던 그의 무덤은 황폐해지고 유해는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410년 알라리크가 이끈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 때 서고트족 병사들은 마우솔레움에 쳐들어가 황금 항아리를 훔쳐갔다. 안에 들어 있던 아우구스투스 등 여러 황제의 유해는 아무데나 버리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유해는 졸지에 사라져 버렸다. 서고트족은 돈이 되지 않는 건물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한 이후인 10세기 무렵에는 돌보는 이가 없었던 탓에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의 상당부분은 흙에 파묻히고 말았다. 주변에 나무가 웃자라 마우솔레움을 거의 덮다시피 하는 바람에 당시 로마인들은 이곳을 몬스 아우구스투스 즉 ‘아우구스투스 언덕’이라고 불렀다. 꼭대기에는 미카엘 대천사에게 헌정하는 작은 예배당이 세워지기도 했다.
12세기 무렵에는 콜로나 가문이 마우솔레움을 점유했다. 이 가문은 마우솔레움을 성으로 고쳐 사용했다. 1167년 로마 꼬뮤네가 투스쿨룸 공작과의 전투에서 패한 뒤 콜로나 가문이 몰락하는 바람에 성으로 사용되던 마우솔레움은 큰 피해를 입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마우솔레움의 소유권은 여러 귀족 가문의 손을 거쳤다. 이들은 마우솔레움을 주로 정원으로 사용했다. 19세기 초에는 소규모 경기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들어 마우솔레움 내부는 아우구스테오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콘서트홀로 활용됐다.
마우솔레움이 되살아날 계기를 마련한 것은 20세기 초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 덕분이었다. 그는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한 각종 재건 사업을 벌이면서 마우솔레움도 옛날 모습대로 복원하라고 지시했다. 자신을 고대 로마의 후예라고 생각했던 그는 여러 가지 정치적 활동을 아우구스투스의 업적과 연관시키려고 애썼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마우솔레움을 되살리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은 최근 80년 동안 대중에게 문을 닫고 있었다. 이른바 뉴 밀레니엄인 2000년에 잠시 문을 연 게 고작이었다. 21세기 들어 이탈리아 정부는 무솔리니 이래 전혀 손을 보지 않아 매우 황폐해졌던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을 리모델링해 아우구스투스 사망 2천 년인 2014년에 재개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산 부족 때문에 리모델링 사업은 계속 늦어졌다.
2017년 통신회사인 텔레콤 이탈리아가 600만 유로를 기부한 덕에 대대적 보수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원래 2020년 봄에 공사를 마치고 재개장식을 열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