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탄젤로 성

황제의 무덤, 천사의 성

by leo


아우구스투스가 제정로마를 창시한 초대 황제였다면 하드리아누스는 제정로마를 전성기로 이끈 황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아주 검소하고 실용적인 인물이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아주 역동적이고 화려하고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트라야누스에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는 선임 황제와 가족을 신격화하는 게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황실 관련 인물이 죽으면 모두 곧바로 신격화시켰다. 먼저 양아버지 트라야누스가 세상을 떠나자 유해를 트라야누스 포룸에 있는 트라야누스 원주에 모신 다음 신전을 만들어 헌정했다. 트라야누스 신전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스 평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친하게 지냈던 장모 마티디아와 어머니 마르키아가 세상을 떠나자 둘도 신격화시킨 뒤 신전을 만들었다. 그가 즉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트라야누스의 부인 플로티나가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역사상 여성을 신격화해서 신전을 바친 것은 이 세 명이 처음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가족을 신격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후계자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매형 세르비아누스와 조카 페다니우스 푸스쿠스를 반역죄로 처형한 직후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로 떠오른 콤모두스는 이름을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었다.


하드리아누스는 137년 아일리우스를 판노니아 속주의 부다페스트로 파견했다. 황제가 되기 전에 군대 생활을 경험하라는 것이었다. 아일리우스는 부다페스트에 가자마자 건강이 나빠져 곧바로 로마로 돌아오더니 설상가상으로 그해 마지막 날 죽고 말았다. 하드리아누스는 아일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에 묻기로 했다. 그런데 네르바 황제가 묻힌 뒤 빈자리가 없어 그곳에는 더 이상 유해를 모실 수 없는 상태였다. 황제가 죽더라도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미 염두에 두고 있던 새 마우솔레움을 앞당겨 짓기로 했다. 그는 새 마우솔레움 건설 부지를 직접 골랐다. 모든 로마인과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처럼 그도 마르스 평원을 선택할 것이라고 봤다. 정작 그가 고른 곳은 뜻밖에도 테베레 강 건너편이었다. 당시에는 아게르 바티카누스(바티카누스 평원)로 불리던 곳이었다. 이곳은 로마의 종교적 경계였던 포메리움 밖이었다.


고대 로마가 대부분의 건축물을 일곱 언덕으로 구성된 로마 시내나 마르스 평원에 지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당시 그곳에는 네로의 전차경주장 외에 건축물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당시로서는 로마에서 꽤 멀리 떨어진 외곽에 마우솔레움을 지은 것이다. 그는 왜 이곳에 마우솔레움을 건설했을까?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자리에 앉은 뒤 로마를 거의 떠나지 않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20년 재위 기간 중 12년을 외국에서 보냈다. 평생 로마제국 속주 곳곳을 순행하고 다닌 것이다. 물론 여행만 한 것은 아니고, 속주나 식민지 곳곳을 둘러보며 문제점을 개선하거나 현지 병사, 주민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황제가 로마를 장기간 떠나 있는 모습을 로마인들과 원로원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2대 황제로 취임한 티베리우스가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있었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드리아누스가 죽자 원로원이 기록 말살을 의결해 하드리아누스의 모든 기록을 없애려고 할 정도였다. 황제도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평생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게 위해 애쓰는 황제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뒤에서 욕만 하는 로마인, 원로원과 죽어서나마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다른 이유를 제시한 역사학자도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에서 선을 그으면 판테온을 거쳐 트라야누스 원주까지 직선으로 이어진다. 하드리아누스가 원했던 것은 로마인에게 그가 재건한 판테온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트라야누스의 후계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자리는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었다. 주변에 높은 언덕도 없어 마우솔레움 꼭대기로 올라가면 로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여기서는 판테온, 원주는 물론 포로 로마노의 유피테르 신전, 키르쿠스 막시무스도 다 볼 수 있었다. 그는 살아서 통치했던 로마를 죽은 뒤에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원기둥 무덤


마우솔레움은 하드리아누스가 살아 있을 때에는 시절에 완공되지 못했다. 그가 죽고 1년 뒤인 139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곳에는 하드리아누스와 부인 사비나 황후, 아일리우스가 묻혔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의 부인 파우스티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시리아 출신 부인인 율리아 돔나,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도 묻혔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터는 한 변의 길이가 89m인 직사각형 모양이다. 가운데에는 지름 64m인 원통 모양 마우솔레움이 만들어져 있다. 땅의 직사각형 네 모퉁이에는 탑이 세워져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든 게 아니라 나중에 마우솔레움을 성으로 바꿀 때 추가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은 역대 교황이 수시로 개축했기 때문에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고대 역사학자들이 남긴 기록에서 겨우 그 흔적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원래의 마우솔레움은 전체적으로 정사각형 기단 건물과 빵처럼 부풀어 오른 것 같은 원통 본체, 그리고 꼭대기의 구조물로 이뤄졌다고 한다. 원통 본체는 흙과 식물로 만든 언덕으로 덮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주장도 있다. 기단이 기본 구조였던 것은 맞지만, 위에는 3단 원형 케이크 같은 건물이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의 외부 기단은 그리스 파로스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기단 위에 세워진 원통형 마우솔레움 본체 건물은 석회암으로 지었다. 1층 면적은 84㎡였고 높이는 10m 정도였다. 벽은 석회암이었지만 표면에는 대리석을 붙여놓았다. 벽 뒤에는 다시 두께 60㎝ 정도의 내벽이 있었다. 상층부에는 역시 대리석으로 만든 사람과 말 석상 여러 개가 설치됐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마우솔레움 꼭대기에는 사두마차를 모는 하드리아누스 청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원통 본체에도 여러 인물 석상과 말 석상이 세워졌다.


지금은 안을 볼 수 없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처음에는 낮은 청동 철책 담장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입구에는 청동으로 만든 문이 달렸다. 문에는 석회암 기둥 네 개가 세워져 있었는데, 기둥 위에는 금박을 입힌 청동으로 만든 공작새 조각이 달려 있었다. 그 중 일부는 뜯겨져 지금은 바티칸박물관 솔방울정원에 있는 솔방울 조각을 장식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마우솔레움 앞에 다리를 하나 놓았다. 이름은 폰스 아일리우스 즉 ‘아일리우스 다리’였다.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가문 이름이었다. 원래의 폰스 아일리우스는 지금의 다리와는 많이 달랐다. 기록에 따르면 교각은 지름 18.38m의 대형 아치 3개와 지름 3~7.59m인 왼쪽의 소형 아치 3개, 지름 3.75~7.59m인 오른쪽의 소형 아치 두 개로 이뤄져 있었다. 각 아치는 8개의 판돌이 받치고 있었다. 대형 아치 3개는 중앙에 몰려 있었는데 이를 사이에 두고 다리는 양쪽으로 15도 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다리의 폭은 11m 정도였다. 다리 재질은 회색 응회암을 섞은 석회암이었다.


다리는 15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건재했지만 1450년 갑자기 밀려든 수많은 순례자 때문에 큰 손상을 입고 말았다. 당시 교황이던 니콜라오 5세(재임 1447~55년)가 긴급히 수리해 다리를 살릴 수 있었다. 이후 1527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재임 1523~34년)는 다리에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석상을 세웠다. 이어 교황 클레멘스 9세(재임 1667~69년)는 베르니니에게 지시해 다리에 천사 석상 10개를 만들어 세우게 했다. 지금 폰스 아일리우스에 붙어 있는 조각상은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이 다리는 지금은 폰테 산탄젤로(산탄젤로 다리)로 불린다.


무너진 성벽


3세기 무렵 군인황제 시대에 로마제국은 야만족의 거듭된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허물어버린 성벽을 로마에 다시 건설하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었다. 황제가 생각한 성벽에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도 포함됐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세르비우스 성벽보다 훨씬 범위가 넓었다. 그는 성벽을 쌓으면서 마르스 평원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위치가 좋았던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을 성채로 사용하기로 했다. 마우솔레움의 구조를 성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여러 조각품과 석상을 뜯어내거나 부숴 버렸다.


마우솔레움을 성채로 바꿨다고 로마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왕정 시대에 쌓은 세르비우스 성벽을 BC 1세기 중엽에 없애면서 “로마를 지키는 것은 성벽이 아니라 시민의 마음”이라고 했다. 이 말은 5세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었다.


나라를 지킬 용기와 의지를 잃어버린 로마에 야만족이 쳐들어왔다. 410년 알라리크가 이끈 서고트족이 시작이었다. BC 390년 갈리아의 ‘로마 약탈’ 이래 800년 만에 로마는 야만족의 발에 짓밟히고 말았다. 서고트족은 마우솔레움에 안치돼 있던 유해 항아리를 모두 부숴버렸다. 유해는 모두 테베레 강에 버렸다.


537년에는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족이 다시 침입했다. 마우솔레움에 틀어박혀 싸우던 로마인은 동고트족 병사들과 싸우면서 성 안에 있던 모든 돌과 석재 제품을 모두 성 아래로 집어던졌다. 이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조각들마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남았던 여러 조각이나 장식은 중세에 교회 등을 꾸미기 위해 뜯겨 나갔다. 하드리아누스의 유해를 모신 것으로 알려진 석관은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옮겨져 12세기 교황 이노센트 12세의 관으로 사용됐다. 관 뚜껑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모신 동로마제국 황제 오토 2세의 관에 사용됐다고 한다. 이 뚜껑은 나중에는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교회 예배당 공사에 재료로 이용돼 아예 사라져버렸다.


산탄젤로 성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은 급기야 이름마저 잃어버리게 됐다. 기독교와 페스트 때문이었다. 이것과 관련해서 교황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재임 590~604년)가 등장하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교황이 취임한 첫 해인 590년의 일이었다. 고대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아직 르네상스가 오기까지는 먼 시간이 필요한 시대였다. 로마에 페스트가 번져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로마 시내 곳곳에는 병에 걸려 숨진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병에 걸릴까 겁나 시체를 치울 생각조차 못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던 대 그레고리오 1세는 하느님의 힘을 빌려 전염병을 몰아내기로 했다. 그는 성모자를 그린 성화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를 들고 아가타 수부라라고 불리던 로마의 끝 부분에 있는 교회까지 행진하기로 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는 『누가복음』을 쓴 성 누가의 작품이라고 로마인들은 믿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자 성모 마리아는 개인 소지품 몇 가지를 챙겨 사도 요한의 집에 갔다. 성모 마리아는 그곳에 있던 성 누가에게 초상화를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성 누가는 탁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성모 마리아가 들려주는 예수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나중에 『누가복음』에 담았다. 4세기 무렵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갔다 성화를 발견했다. 그녀는 성화를 콘스탄티노플로 가지고 돌아갔다. 나중에 로마에 올 때 그림을 가져왔다.


아가타 수부라의 교회에는 이교도는 물론 일부 기독교도들까지 신봉하는 이교도의 우상이 있었다. 기독교도들도 머리를 숙인 덕분에 우상은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교황은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우상에게 걸어가 “악마의 상징아! 로마에서 떠나도록 하라!”고 외쳤다. 우상은 천둥 같은 큰 소리를 내더니 곧바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앞에 있는 폰스 아일리우스 다리를 건너게 됐다. 그는 다리 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대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묻혀 있는 마우솔레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돌보지 않아 무척 황폐해진 상태였다.


갑자기 피가 철철 흐르는 길고 가느다란 칼을 든 미카엘 대천사가 마우솔레움 꼭대기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교황은 고개를 숙였다. 미카엘은 망토로 칼에 묻은 피를 닦고 칼집에 넣은 뒤 사라져버렸다. 교황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이 드디어 분노를 푸셨다. 더 이상 희생을 원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교황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짓말같이 로마에서 페스트는 사라져버렸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돌아간 대 그레고리오 1세는 마우솔레움 꼭대기에 세워져 있던 하드리아누스의 사두마차 석상을 없애고 미카엘 대천사 석상을 만들어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이교도의 흔적이라고 부르면서 모두 파괴하라고 덧붙였다. 그래야 로마에 하느님의 분노가 재발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로마인들은 대 그레고리오 1세가 로마의 비밀 우상 숭배를 막은 덕분에 페스트를 사라지게 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대천사가 나타난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을 ‘천사의 성’이라는 뜻인 산탄젤로 성으로 부르기로 했다.


산탄젤로 성 꼭대기에 세워진 미카엘 석상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바뀌었다. 16세기 들어 교황 레오 10세(재임 1513~21년)는 건축가 겸 조각가 몬테풀로에게 산탄젤로 성에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예배당을 지으라고 하면서 미카엘 대천사를 상징하는 대리석 조각상을 만들어 꼭대기에 세우게 했다. 17세기에는 벨기에 출신 조각가 베르샤펠트가 청동으로 미카엘 조각상을 새로 만들어 세웠다. 이 바람에 몬테풀로가 만든 조각상은 산탄젤로 성 내부정원 한쪽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16세기 중엽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는 산탄젤로 성에 고급 숙박시설을 건설했다. 그는 선임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재임 1523~34년)가 로마를 침탈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때문에 교황청에서 달아나 산탄젤로 성에 갇혀 고생한 일을 지켜본 바 있었다. 앞으로 똑같은 일이 생길 경우 성에서 편하게 지내려면 숙박시설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펼쳐 신도를 고난에서 구해내는 것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게 당시 로마 교황의 실상이었다.


산탄젤로 성은 감독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무한 우주론과 지동설을 펼치다 교황청과 갈등을 빚은 조르다노 브루노가 갇힌 곳이 바로 여기였다. 범죄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16세기 조각가 겸 금 세공사였던 벤베누토 첼리니도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산탄젤로 성에 들어가면 먼저 엄청난 크기의 전실이 나온다. 과거에는 대리석으로 덮여 있던 곳이다. 큰 벽감이 보인다. 이곳에는 한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대형 석상이 서 있었다. 거대한 경사로를 따라 위로 올라간다. 분명히 위로 올라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주 깊은 지하세계로 걸어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마침내 산탄젤로 성의 핵심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유해를 담은 항아리가 있던 방이다.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


‘작은 영혼이여 가여운 나그네여

갈 곳 없는 떠돌이여

이제는 어디에 머물려 하는가

모든 게 암울하고 모든 게 외롭구나

언제나 즐거움 가득했던

인생길 끝자락에 서니’

(하드리아누스의 시 ‘작은 영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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