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베레 강

1천200년 도시 역사 지켜온 천리 물길

by leo



로마 한가운데를 S자 모양으로 흘러가는 강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길다는 테베레 강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 강을 로마와 동일시했다. 로마가 태어나고 망할 때까지 1200년 역사를 지켜본 강이었기 때문이다.


1세기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 따르면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이네아스 일행이 이탈리아에 도착한 곳은 바로 테베레 강의 종점인 오스티아였다. 신화에 따르면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가 늑대에게 구조돼 젖을 먹은 곳이 바로 여기였고, 야만족들에 의해 여러 차례 침탈당하다 끝내 망하는 모습을 지켜본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테베레 강은 아펜니노 산맥 푸마이올로 산의 너도밤나무 숲에 있는 두 샘에서 발원해 로마를 거쳐 이탈리아 서부 오스티아를 통해 티레니아 해로 빠져 나간다. 강의 총 길이는 406㎞에 이르고 수심은 2~6m 사이다.


테베레 강이 시작하는 푸마이올로 산의 두 샘을 ‘레 베네’라고 부른다. 1930년대 파시스트 정권을 장악했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곳에 대리석 기둥을 세워 테베레 강의 발원지임을 표시했다. 기둥에는 ‘이곳은 로마의 운명에 매우 신성한 곳인 테베레 강이 태어난 곳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 꼭대기에는 로마를 상징하는 독수리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테베레라는 이름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전설이 담겨 있다. 트로이에서 탈출한 뒤 이탈리아에 정착해 알바롱가를 건국한 아이네아스의 후손 중에 티베리누스가 있었다. 그는 강을 건너다 그만 발을 헛디뎌 익사하고 말았다. 그 전에는 이 강에는 알불라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티베리누스가 빠져 죽은 이후로는 테베레라고 부르게 됐다. 티베리우스는 강에 빠져죽은 뒤 테베레 강을 지키는 신이 됐다.


이 신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나온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드』에서 이 신화를 다룬다. 티베리우스는 궁지에 빠진 아이네아스에게 여러 가지를 조언해준다. 가장 중요한 조언은 로마가 궁극적 목적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었다.


‘황금빛 물결이 흐르는 그 신은 바로 나로다

내가 가는 주변의 평원은 언제나 살지리니

흘러가는 홍수 속에서 나의 이름 티베리우스

땅에서 널리 알려지리니 모든 신들 중에 흠모 받으리

다가올 미래에 이곳이 나의 자리가 될지니

나의 물결은 로마의 벽을 씻어주리라.’


리비우스의 『로마사』에서는 아이네아스의 먼 후손으로 나오는 티베리우스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서는 아이네아스에게 길을 일러주는 신으로 등장하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로마인들에게 그런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네아스와 티베리우스가 서로 도와 로마를 건국하는 데 일조했다는 게 더 중요했다.


19~20세기 독일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은 알불라의 어원을 ‘산’을 뜻하는 리구리아어 ‘alb’에서 찾았다. 따라서 알불라는 ‘산에서 흘러온 개울’이라는 뜻이 된다. 일부에서는 알불라가 라틴어로 ‘하얗다’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강에 쌓인 침전물이 과거에는 하얗게 보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테베레 강을 카에룰레우스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청자색’이라는 뜻이다. 맑은 날 강에 비치는 하늘이 청자색처럼 고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테베레 강의 별칭은 황금색을 의미하는 플라부스였다. 강물이 늘 황토색으로 탁해서 붙인 이름으로 풀이된다.


고대 로마인들이 팔라티노 언덕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운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테베레 강도 들어 있다. 언덕에서 테베레 강을 내려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 서쪽에는 에트루리아, 동쪽에는 사비니, 남쪽에는 라틴족이 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적의 침입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로마가 초창기 혼란에서 벗어나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을 때 테베레 강의 경제적 중요성도 높아졌다. 방어벽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로마가 더 커갈 수 있는 교역로로서도 꼭 필요한 강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이곳에서 배에 물건을 실어 하류 오스티아 항을 통해 바다로 나가 다른 나라들과 교역했다. BC 5세기 무렵 발 텔레비나에서 곡물을 실어 날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몸젠은 『로마사』에서 ‘테베레 강은 라티움 지역에서 천연적인 교통의 고속도로였다’고 기술했다.


테베레 강을 이용해 국제무역에 나서기로 생각한 최초의 지도자는 제4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이탈리아 고고학자인 로돌포 란치아니는 『최근 발견을 통해 본 고대 로마』에서 ‘안쿠스는 도시의 안전이 확보됐다고 생각하면서 지중해로 눈을 돌렸다. 국제무역을 위해 출구를 열기로 하고 테베레 강 하구를 점령하고 식민지를 건설한 뒤 오스티아 티베리나라는 이름을 붙였다’라면서 그 과정을 설명했다.


고대 로마는 오스티아에 항구를 세웠다. 그런 생각을 가장 먼저 한 사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실제로 항구를 완성한 사람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였다. 항구는 800m 길이의 방파제 두 개로 둘러싸여 있었다. 항구의 총면적은 58만㎡에 이르렀다. 수심은 5m 정도였다. 항구를 만들기 위해 바다에서 모래 320만㎥를 퍼올려야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공사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싣고 올 때 사용한 초대형 선박을 바다에 계류시켰다. 계류 위치는 방파제를 세울 곳이었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는 배에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를 쏟아 부어 바다에 침몰시켜 방파제의 기초로 사용했다. 배의 규모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수백 톤에 이른 오벨리스크를 실어 나른 배였던 만큼 엄청나게 컸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배에 밸러스트 용으로로 렌틸콩 1000톤을 실었다고 돼 있다. 침몰한 배 주변에는 바다 위로 솟아날 때까지 돌을 쌓아 방파제를 만들었다. 방파제 위에는 60m 높이의 등대를 세웠다. 고대 7대 불가사의로 불렸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를 흉내 낸 것이었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 황제는 테베레 강에서 오스티아 항까지 운하를 건설하려고 했다.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네로는 평소 친했던 토목기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나폴리의 미세눔 항에서 로마까지 이어지는 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했다. 길이가 무려 300㎞에 이르는 이 운하는 결국 완공되지 못했는데, 그 과정에서 엉뚱한 피해를 낳고 말았다.


운하는 가에타 만 인근의 캄파니아 펠릭스에서 시작됐다.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품질이 가장 좋기로 유명한 카에쿠부스 와인을 만들어내는 포도 산지였다. 그런데 운하 공사를 하느라고 땅을 파헤치는 바람에 캄파니아 펠릭스 일대의 포도밭이 모두 망가져버렸다. 이 이후로 이곳에서는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없게 돼버렸다.


안쿠스 왕은 또 테베레 강에 사상 첫 다리를 건설했다. 왕은 여기에 폰스 수블리키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라틴어로 ‘말뚝’을 수블리카라고 부른 데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이 다리는 나무로 만들었다. 금속이나 석재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고대 로마인들은 다리를 매우 신성한 시설로 간주했다. 홍수로 다리가 파괴되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날 징조로 여겼다. 그래서 폰스 수빌리키우스 관리는 사제단이 맡았다. 라틴어로 ‘다리’를 뜻하는 폰스라는 단어에서 사제를 의미하는 ‘폰티펙스’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테베레 강에서는 홍수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다리가 부서지는 일도 잦았다. 그때마다 로마인들은 정성껏 수리해 원래 상태로 복원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작가가 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는 2세기 중엽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에 이 다리를 수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만큼 로마인들이 이 다리를 실용적 측면이 아니라 종교적 또는 역사적 측면에서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폰스 수블리키우스에는 로마의 전쟁사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리비우스의 『로마사』 등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에서 쫓겨난 로마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한 에트루리아 족 도시였던 클리시움의 왕 포르세나의 도움을 받아 로마로 쳐들어왔다. 로마는 포르세나의 군대와 맞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일부에서는 타르퀴니우스를 다시 왕으로 받아들이라는 포르세나의 제안을 수용하고 목숨이라도 건지자며 벌벌 떨었다. 로마 외곽에 살던 사람들은 집과 농장을 버리고 로마를 둘러싼 세르비우스 성벽 안으로 몰려들었다. 포르세나의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가려면 테베레 강을 건너야 했다.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은 폰스 수블리키우스 뿐이었다.


적군이 몰려오자 로마 인근 야니쿨룸 기지에 있던 로마 병사들이 기지를 버리고 다리로 도망쳐 왔다. 그들은 마치 오합지졸처럼 서둘러 로마 시내로 달아나기 바빴다. 그때 마침 용감하고 지혜롭기로 유명한 호라티우스 코클레스가 다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달아나는 로마 병사들을 붙잡고 “다리를 부수지 않으면 로마 시내로 달아나봐야 목숨을 건질 수 없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코클레스는 혼자 다리 앞에서 버티고 서서 포르세나의 병사들을 막으면서 다른 동료들에게는 다리를 부수라고 말했다. 다리가 거의 다 파괴됐을 무렵 그는 테베레 강으로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이렇게 해서 로마는 적군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고, 군대를 재조직해 맞설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됐다.


테베레 강은 로마의 식수원이었지만 물이 깨끗하지는 않았다. 로마인들은 마지못해 강물을 마셨을 뿐이었다. 테베레 강이 깨끗하지 못했던 것은 물에 모래, 황토 등 각종 이물질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정부가 1871년 3월~1872년 2월 1년 동안 테베레 강 수질 조사를 실시한 결과 강 하류인 오스티아에 퇴적한 모래는 연간 858만t이나 됐다.


이 때문에 로마인들은 로마 바깥에서 수원을 발굴한 뒤 수로를 만들어 시내로 운송했다. 중세 시대에 수로가 파괴되는 바람에 물 부족 현상이 심각해지자 역대 교황이 테베레 강 물을 마시는 대신 로마 시대 수로 복원 작업에 나선 것은 이 때문이었다.


테베레 강의 활용 방법은 다른 데에도 있었다. 국가적 반역자 등 중범죄자들의 시체를 버리는 곳이었다. 로마인들로부터 미움을 많이 받은 사람은 처형당한 뒤 무덤을 얻지 못하고 강에 던져졌다. 로마인들은 망자에게 적당한 장례를 치러주고 무덤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저승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장례와 무덤을 얻지 못한 망자는 저승 입장을 거부당해 연옥을 떠돌아다니며 영원히 고통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로마인들은 어지간하면 죽은 사람에게 무덤은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테베레 강에 시체를 버렸다는 것은 무덤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로마인들로부터 미움을 샀다는 이야기다.


강에 시체가 버려진 대표적 인물은 BC 1세기 토지개혁을 통한 사회 변혁 운동에 나선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였다. 그는 원로원의 반발을 무시하고 개혁을 추진하다 목숨까지 잃었다. 원로원은 그에게 무덤에 묻힐 한 평의 땅도 줄 수 없다며 시체를 테베레 강에 던져 물고기 밥으로 만들고 말았다.


테베레 강은 매우 사나운 강이었다. 홍수가 자주 발생해 로마에 큰 피해를 수시로 입혔다. 로마에 홍수가 났다는 기록만 132차례가 될 정도였다. 홍수를 막기 위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강을 뚫어 운하를 만들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이 계획은 이뤄지지 못했다.


공화정 시대에 테베레 강 치수 업무는 감찰관이 담당했다. BC 2세기 무렵에는 강물 범람을 막기 위해 높은 제방을 쌓기도 했다. 두 차례 집정관을 역임한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등이 BC 54년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제방 말단석 흔적 19곳이 지금도 남아 있다.


로마인들은 끝내 테베레 강의 홍수를 막지 못했다. 홍수 방지를 위한 치수 사업에 성공한 것은 19세기였다. 1876년에 시작한 제방 건축 공사 덕분에 강물 범람을 막을 수 있었다. 강을 따라 높게 쌓은 제방을 이탈리아어로 ‘강을 따라서’라는 뜻인 룽고테베리라고 부른다.



테베레 강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테베레에서 헤엄치다’라는 문장이다. 중세 시대에 종교 갈등이 첨예할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경우 이 표현을 사용했다. 테베레 강은 로마와 동일시되는 단어였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개신교 신도가 로마로 가려면 반드시 강을 건너야 했다. 물론 강에는 다리가 많았기 때문에 헤엄을 칠 필요는 없었지만 상징적으로 물에 몸을 담갔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지금도 ‘테레베에서 헤엄친다’는 표현을 가톨릭에서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에서 ‘swimming the tiber’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놀라울 만큼 많은 결과가 나타난다. 거꾸로 가톨릭 신도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면 ‘템스 강에서 헤엄쳤다’라는 표현을 썼다.


인술라 티베리나


테베레 강에는 작은 섬이 하나 있다. 길이가 269m에 불과하고 폭은 67m밖에 안 되니 정말 작은 섬이다. 걸어서 다녀도 10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다. 섬의 원래 이름은 인술라 티베리나였다. 현재 공식 명칭은 이솔라 디 바르톨로미오아이다. 인술라는 라틴어고, 이솔라는 이탈리아어이다. 둘 다 ‘섬’이라는 뜻이다.


과거 로마인들은 이곳을 단순히 인술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시대에 따라 이름이 늘 달라지기도 했다. 인테르 두오스 폰테스, 인술라 아에스쿨라피, 인술라 세르펜티스 에피다우리 등 이름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중세 시대에는 인술라 리카오니아로 불리기도 했다.


인술라 티베리나는 원래 카피톨리노 언덕의 끝자락에 붙어 있었다. 강물이 거세게 흘러드는 바람에 언덕에서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섬의 성분이 단단한 석회 퇴적암이어서 거세기로 유명한 테베레 강도 섬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강이 섬을 양쪽으로 갈라져버렸다.


인술라는 로마의 건국 신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형인 누미토르로부터 알바롱가의 왕 자리를 찬탈한 아물리우스는 조카 레이 실비아가 낳은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테베레 강에 버렸다. 두 형제를 담은 바구니는 강이 꺾어지던 여울에 닿았다. 그곳이 바로 인술라 인근이었다. 이곳에서 늑대 루파가 형제를 건져내 젖을 먹였다.


인술라가 만들어진 유래와 관련한 전설도 전한다. 할리카르나수스의 디오니시우스가 쓴 『로마사』 등에 그 이야기가 전한다. 고대 로마 왕정의 마지막이자 제7대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수페브루스가 로마인들에게 쫓겨났을 때의 일이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마르스 평원은 국가 재산으로 압수됐다. 당시 마르스 평원에는 옥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타르퀴니우스를 내치는 데 앞장서 공화정의 영웅이 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옥수수를 갖고 가지 못하게 했다. 그는 백인대 투표를 실시해 베어낸 옥수수 짚단을 테베레 강에 버리기로 했다.


로마인이 옥수수를 강에 버렸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짚단이 엉키는 바람에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고 강바닥에 그대로 달라붙어 마치 섬처럼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게다가 상류에서 떠내려 온 토사와 쓰레기 등이 같이 쌓여 섬은 날이 갈수록 점점 커져갔다. 세월이 흘러 옥수수 짚단으로 된 섬에는 더 많은 토사가 쌓여 진짜 섬으로 변해 버렸다. 그것이 오늘날 인술라 티베리나가 됐다.



인술라 티베리나에는 의술의 신인 아에스클라피우스의 전설도 전한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스클레피오스가 바로 그다. BC 293년 로마에 매우 심각한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로마인들은 예언서인 ‘시빌 신탁서’를 보고는 그리스 에피다우루스에 사절단을 보내 아스클레피오스의 동상을 배에 싣고 오게 했다. 이듬해 아스클레피오스의 동상을 실은 배가 로마로 들어왔다.


아스클레피오스를 묘사한 조각상이나 그림을 보면 그는 뱀이 휘감고 있는 지팡이를 상징으로 들고 다닌다. 배가 테베레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을 때 뱀이 동상의 지팡이에서 빠져나가더니 배에서 내려 인술라 티베리아로 헤엄쳐 들어갔다. 뱀은 치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던 동물이었다. 이 모습을 본 로마인들은 섬에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시는 신전을 지어 바쳤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이후 이름이 바뀌어 아에스클라피우스가 됐다.


로마인들은 인술라 티베리아를 아에스클라피우스가 타고 온 배 모양으로 꾸몄다. 섬 한쪽에 부두를 만들었고, 주변에는 배 옆모양을 닮은 벽을 쌓았다. 섬에는 또 작은 오벨리크를 세웠다. 마치 배의 돛대처럼 보이게 할 의도에서였다. 이 오벨리스크는 지금은 나폴리의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지금도 섬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배 모양처럼 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에스클라피우스 신전이 생긴 이후 섬에는 요양원도 들어섰다. 의술의 신이 사는 섬인 만큼 환자를 치료하는 요양원이 들어선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신전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러 기록을 검토해볼 때 998~1001년 사이에 만들어진 성 바르톨로미오 교회 자리가 신전이 있었던 곳이었을 것이라고 고고학자들은 추정한다. 교회 신도석에 설치된 기둥 중 일부가 고대 신전의 열주 회랑에 있던 기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인술라 티베리나 왼쪽 제방에는 아에스클라피우스 신화가 들어올 무렵 다리 역할을 하는 나무 구조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중에 섬을 배처럼 개발할 때에는 석조 다리가 두 개 만들어졌다. 폰스 파브리키우스와 폰스 케스티우스였다. 폰스 파브리키우스는 중세시대 유대인들이 갇혀 살던 게토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폰스 유대오룸으로 불리기도 했다. 두 다리는 지금도 볼 수 있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치기는 했지만 로마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고대 로마 시대 다리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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