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비 분수

사랑의 물, 분수의 어머니

by leo



물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도시에 꼭 필요한 재화였다. 기본적으로 물은 생활필수품이었다. 마셔야 살 수 있었고, 빨래를 할 때도 음식을 할 때도 없어서는 안 되는 물질이었다. 이런 점은 고대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더해 로마인들은 목욕을 매우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목욕에는 많은 물이 반드시 필요했다.


로마인들은 물을 매우 소중한 물질로 생각했다. 특히 우물, 샘은 신성하게 여길 정도였다. 우물, 샘을 신이 내려준 선물이자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는 약이라고 믿었다. 건국 초창기에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장소는 테베레 강 말고는 우물과 샘뿐이었다. 테베레 강의 물은 수질이 나빴던 반면 우물과 샘의 물은 깨끗하고 맑고 맛있었다. 우물, 샘을 성스럽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인들은 우물, 샘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전설,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로마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긴 샘은 첼리오 언덕에 있던 에게리아 샘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신성하면서 치료 효과를 가진 물을 다스리는 님프인 에게리아는 로마의 두 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절친한 친구였다. 누마는 틈나는 대로 첼리오 언덕의 작은 숲에 들어가 에게리아를 만나 신탁을 들었다. 그녀에게서 법은 물론 각종 종교 의례를 배웠다. 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에게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로마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흘린 눈물은 고여 샘을 이루었다. 이곳이 바로 에게리아 샘이었다.


로마인들이 숭배한 샘은 이곳 말고도 더 있었다. 포로 로마노 한복판에 있던 유투르나 샘, 세르비우스 성벽의 포르타 카페나 밖에 있는 카메나 샘이 대표적이었다. 유투르나는 우물과 샘, 분수의 여신이었다. 카메나 신은 원래 출산의 여신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우물과 분수의 여신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성수를 사용하듯이 로마인들은 우물, 샘에서 길어온 성스러운 물을 이용해 여러 가지 세례 의식을 거행했다. 먼저 루스트라티오라는 세례 의식이 있었다. 월계수나 올리브나무 가지로 사람에게 물을 뿌려 부정을 씻어내는 종교 의식이었다. 때로는 정교하게 만든 성수채로 물을 뿌리기도 했다. 대개 부정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정화 의식의 대상이었다.


로마에 엄청난 재앙이 생겼을 때에는 공동체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로마 전체 또는 로마인 전체를 대상으로 정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장례식에 다녀오면 역시 월계수나 올리브 나무 가지로 물을 뿌려 정화하기도 했고, 집안을 물로 깨끗이 청소하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한 샘을 보호하기 위해 화려한 대리석 건물을 세우곤 했다. 샘에 지붕을 씌우고 난간도 설치했다. 어떤 샘에는 대리석 부조로 장식한 낮은 벽을 두르기도 했다. 샘에는 바위를 깎아 물 저장소를 만들었다. 샘이 바위에서 솟아나는 게 아닐 경우 벽돌로 쌓아 저장소를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샘뿐 아니라 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크든 작든 꼭 분수를 건설했다. 고대는 물론 중세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에는 분수가 정말 많다. 크고 작은 걸 다 합치면 무려 2천 개를 넘는다. 다른 나라의 많은 도시를 둘러봐도 로마만큼 많은 분수를 가진 곳은 없다. 유명한 곳만 해도 나보나 광장의 4대강 분수, 무어인의 분수와 스페인 광장의 난파선의 분수를 손꼽을 수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판테온 앞 광장에도 어김없이 분수가 있다.


이처럼 헤아릴 수도 없는 로마의 분수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곳은 단연 트레비 분수다. 로마인들은 물론 외국인들도 이곳을 ‘분수의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다. 트레비 분수가 이런 별명을 갖게 된 것은 단순히 웅장하고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로마의 수로는 물론 중세의 분수 건설 역사를 한꺼번에 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마음은 급해지고 발걸음은 빨라진다. 영화가 절정을 향해갈 때 퍼져 나오는 음악처럼 가슴의 두근거림은 점점 강해진다. 골목을 막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웅장한 신비가 펼쳐진다.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물은 허공에 점점이 무지개를 뿌린다. 칠색 아치를 타고 바다의 제왕 오케아노스가 날아오른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사람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포효에 잠시 움찔한다.


돌이 어떻게 물과 이런 절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물을 뿜어내는 시설에 불과한 분수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것일까? 많은 관광객은 그저 정신을 잃은 채 분수를 바라보며 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물 부족 도시의 수로


로마인들은 건국 후 400여 년 동안은 테베레 강과 우물, 샘에서 퍼온 물을 이용하는 데 만족했다. 테베레 강은 수량이 충분치 않았고 수질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지만 건국 초기에는 인구가 많지 않아서 물이 모자라지 않았다.


BC 4세기 무렵부터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이민자가 크게 늘고 외국 상인이나 노예도 로마에 정착하면서 인구가 급증한 탓에 물 수요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강물이나 개울, 우물, 샘으로는 수요를 도저히 맞출 수 없었다. 목욕탕이 늘어나면서 물 부족은 더 심해졌다.


공화정 시대에는 물 부족 때문에 난리가 날 정도였다. 다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강에 물을 뜨러 가야 했다. 이런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집정관은 강의 수질을 보호하기 위해 강둑에서 일정한 거리 안에는 집을 짓지 못하게 법을 만들 정도였다. 누구나 이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건축 금지 구역 주변에 돌을 세워 표시하기도 했다. 지금도 테베레강 주변 곳곳에서는 당시 세워진 돌이 발굴되곤 한다.


로마는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공화정 시대부터 도시 외곽에서 수원을 발굴하고 수로 즉 아쿠아를 건설해 물을 시내로 공급하려고 애썼다. 로마인들이 처음 만든 수로는 아쿠아 아피아였다. BC 312년 재무감사관을 지낸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크라수스가 만든 것이었다. 그는 로마의 첫 ‘고속도로’인 아피아 가도를 만든 사람이었다. 이 수로의 수원은 프라에스테 인근이었다. 로마까지 길이는 16.57㎞였다.


40년 뒤인 BC 275년에는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가 그리스 에페소스의 왕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으로 아니오 강에서 로마까지 물을 운반하는 63.6㎞의 수로 아쿠아 마니우스를 건설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쿠아 아피아와 아쿠아 마니우스는 노후해졌다. 원로원은 BC 147년 법무관 마르키우스에게 새 수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는 새 수원을 찾아내 아쿠아 마르키우스를 건설했다. 수로의 총길이는 91㎞에 이르렀다. 수도교인 지상 구간만 80㎞였다.


BC 3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다시 물 부족 사태가 심각해졌다. 제국의 전성기를 맞아 각종 건물이 늘어나고 로마로 몰려오는 사람이 증가한 게 원인이었다. 황제는 친구이자 장군이며 사위였던 아그리파에게 새로운 수로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아그리파가 처음에 만든 수로는 아쿠아 율리아였다. 그는 새 수로를 기존 수로인 아쿠아 테풀라와 연결해 로마로 물을 운송했다.


아그리파는 15년 뒤에는 대중목욕탕에 물을 공급할 수로를 하나 더 건설했다. 이것이 오늘날 트레비 분수에 물을 공급하는 아쿠아 비르고였다. 총 길이 20㎞인 아쿠아 비르고는 매일 로마에 10만㎡의 물을 공급했다. 물이 아주 깨끗해 목욕탕 용수는 물론 식수로도 호평을 받았다. 이 수로와 관련해 재미있는 전설이 전한다.


전쟁에 나선 로마 병사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몹시 목이 말랐다(아그리파가 샘을 찾으라고 보낸 병사라는 말도 있다). 그들은 물을 찾아 돌아다니다 양치기 소녀를 만났다. 병사들은 “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소녀는 물이 풍부한 온천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양치기들이 사용하던 곳이었다.


로마에 돌아온 병사들은 정부에 온천 이야기를 전했다. 가뜩이나 물이 부족한 로마 시내에 식수를 공급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아그리파는 손뼉을 쳤다. 그는 당장 수로 시설을 설치해 물을 시내에 공급했다. 온천 위치를 가르쳐준 사람이 소녀였다는 점에 착안해 그 수로를 ‘처녀의 물’이라는 뜻인 아쿠아 비르고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인들은 아쿠아 비르고의 종점에 만들어진 분수를 ‘사랑의 물’이라는 뜻인 아쿠아 델 아모르라고 불렀다. 이 이름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전설이 전한다.


고대 로마 시대에 한 청년이 게르마니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가하게 됐다. 그는 북쪽으로 이어지는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부대와 함께 행진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아쿠아 비르고의 종점에 있는 분수를 지나게 돼 있었다. 로마군이 전쟁터로 나갈 때면 병사들의 가족, 친척이나 연인이 나와 무사히 돌아오라며 축복 인사를 건네는 게 일상적이었다.


청년이 지나갈 때 결혼을 약속한 처녀가 분수에서 떠온 물을 담은 잔을 건네주었다. 잔을 돌려받은 처녀는 바닥에 던지면서 “당신이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할게요. 그때까지 마음을 변치 않고 기다릴게요”라고 말했다. 두 연인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이후 로마군이 플라미니아 가도를 행군해 트레비 분수를 지나갈 때면 병사들에게 너나할 것 없이 물 잔을 건네주는 풍습이 생겼다. 이곳의 물을 마시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으며, 영원히 사랑을 지킬 수 있다는 이야기도 만들어졌다.



제정 말기까지 로마가 만든 아쿠아는 모두 14개였다. 일부에서는 19~20개였다고 말한다. 1세기 로마 시대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자연의 역사』에서 ‘목욕탕, 저수지, 가정용, 해자, 정원, 교외 빌라에 물을 대는 수로의 수와 그 수로가 지나가는 산과 계곡, 아치의 거리를 계산한다면 세상에 이렇게 놀라운 일은 따로 없을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수로를 격찬했다.


역사학자들이 로마의 수로 건설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게 된 것은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수로 관리 책임자였던 율리우스 프론티누스가 쓴 『로마의 수로』라는 책 덕분이다. 책을 펴냈을 정도였으니 로마인이 물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수원을 발견하는 방법, 장소의 성격에 따른 물의 다양한 성질 등은 물론 수로를 건설하는 방법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로마인들은 수로를 만들 때 굳이 지하에 관을 묻는 방식에 집착하지 않았다. 때로는 지상으로 웅장한 아치형 수도교를 건설했다.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토목, 건설 기술과 자재 동원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비용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웅장한 시설을 만드는 데에서 만족을 구했다. 수도교 같은 엄청난 건축물은 로마 제국이 가진 힘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다. 이른바 야만족은 로마가 건설한 수도교를 보고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수로 건설비는 대부분 국비로 충당했지만, 일부 수로는 개인이 건설하기도 했다. 수로를 유지, 보수하기 위해 역대 황제는 노고와 비용 지출을 아끼지 않았다.


아치형 수도교에서 물이 흘러가는 부분을 스페쿠스, 또는 카날리스라고 불렀다. 벽돌이나 돌로 길게 만든 여물통 모양을 하고 있었다. 스페쿠스 안에는 시멘트를 발랐고, 갓돌로 위를 덮었다. 물이 흘러넘치지 않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햇빛이 많이 비쳐 수질을 떨어뜨리거나, 비나 다른 오염물질이 들어가 물을 더럽히는 걸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수로 곳곳에는 공기구멍을 만들어 지붕이 수압 때문에 터지지 않게 배려했다. 물은 항상 스페쿠스를 통해 흘렀고, 때로는 스페쿠스를 따라 파이프를 설치하기도 했다. 수도교가 지나는 언덕이 바위로 돼 있다면 표면을 파내 스페쿠스를 만들었고, 표면이 흙이나 모래였다면 돌을 사용해 따로 만들었다. 수로의 기울기는 61m당 15㎝ 정도였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수로가 끝나는 지점 인근 지역에는 저수지인 카스텔룸을 만들어 침전물을 걸러냈다. 물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면 역시 카스텔룸이라고 부른 거대한 저수조에 보관했다. 카스텔룸은 단순히 크게만 지은 물 창고가 아니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만든 아테네의 카스텔룸은 화려한 장식과 이오니아식 기둥을 덧붙인 멋진 건물이었다. 에보라의 카스텔룸은 둥근 신전 모양이었다. 지금 남아 있지는 않지만 로마의 저수조도 마찬가지로 매우 화려했을 것이다.


카스텔룸 안에는 기둥으로 받친 돔 모양 지붕을 한 커다란 물 저장실이 있었다. 수로에서 이곳으로 들어온 물은 파이프를 통해 세 개의 작은 저장실로 분산됐다. 두 개의 저장실에 보관한 물은 공공목욕탕과 각 가정에, 나머지 저장실에 보관한 물은 여러 분수로 공급했다. 만약 어느 한쪽 저장실 물이 모자랄 경우 다른 쪽 저장실 물을 돌려씀으로써 힘들고 비싸게 운송해 온 물이 낭비되지 않도록 했다.


로마인들은 수로를 통해 이송한 물을 시내 곳곳에 만든 분수로 배분했다. 아쿠아마다 물 공급 구역은 달랐다. 아쿠아 아피아는 7개 구, 아쿠아 마르키아는 10개 구, 아쿠아 테풀라는 4개 구, 아쿠아 비르고는 3개 구에 각각 물을 공급했다. 분수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었다. 오늘날처럼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았다. 대개 돌을 깎아 만든 지름 10m 정도 분수였다. 평범한 화병 모양이 일반적이었다. 삼각대 모양도 있었다. 청동 조각상을 분수로 사용하기도 했다.주로 소년의 모습을 많이 담았지만 신화에 나오는 트리톤이나 네레이드, 사티르의 모습도 담았다.


1875년 존 머리가 발간한 『그리스‧로마 고고학 사전』에 따르면 당시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 곳곳에는 담쟁이가 우거진 낡은 수도교 아치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중 세 곳은 그때까지도 상수도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로마인은 수로를 통해 얼마나 많은 물을 공급했을까? 역사학자마다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하루 1억 3천만~1억 6천만 리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로마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 공급량을 인구로 나누면 1인당 하루 1천300~1천600리터에 해당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인구가 150만 명 정도였고 1인당 하루 물 공급량은 830~1천60리터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400리터라고 하니 로마 시대 물 공급량이 얼마나 많았는지 잘 알 수 있다.


수로는 로마에만 건설된 것은 아니었다. 그 놀라운 건축 기술은 오늘날 남아 있는 수도교 형식으로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수도교가 세워진 도시는 그리스의 아테네와 코린트, 이탈리아 카타니아와 살로나 및 시라쿠스, 비티나의 수도 니코메디아, 옛 그리스였지만 지금은 터키인 에페소스와 스미르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프랑스의 메츠와 클레르몽, 님스, 리용, 포르투갈의 에보라, 스페인의 메리다와 세고비아 등이었다. 세고비아의 수도교는 스페인의 모든 수도교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유럽에 남아 있는 수도교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웅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되살아난 아쿠아 비르고


로마의 쇠퇴와 함께 수로는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5세기 무렵에는 알라리크가 이끈 서고트족의 로마 포위 때 큰 피해를 입었다. 알라리크는 성문을 닫아걸고 버틴 로마를 굴복시키기 위해 물 공급을 끊었다. 테베레 강을 막는 한편 수로도 파괴해버렸다. 알라리크가 물러간 뒤 부분적으로 복원된 수로는 토틸라가 이끈 동고트족의 공격 때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비잔틴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 때문에 6세기 무렵에는 대부분 수로가 기능을 상실했다. 아무도 수로를 유지, 보수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1천 년 동안 로마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건국 초창기의 고대 로마인들처럼 테베레 강이나 도시 인근 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사정은 16세기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 물 문제는 역대 교황의 고민거리가 됐다.


성 베드로 대성당도 물 부족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8세기 무렵 수리한 아쿠아 트라야나로부터 성 베드로 대광장의 두 분수에 아주 적은 양의 물을 공급받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으로는 턱없이 모자라 야니쿨룸 언덕이나 바티칸 언덕 주변에 흩어져 있던 작은 샘에서 물을 매일 길어 와야 했다.


당시 부분적으로나마 기능을 발휘하던 수로는 아쿠아 비르고 하나밖에 없었다. 로마에 촉촉한 젖줄 노릇을 하던 아쿠아 비르고는 퀴리날레 언덕 아래 삼거리까지만 이어져 있었다. 수로의 종점을 라틴어로 트리비움 또는 트레이오라고 불렀다. 아쿠아 비르고를 통해 로마로 들어온 물은 자그마한 분수에 연결됐다. 특별한 장식 없이 평범하게 생긴 둥근 수조 3개에 물이 고이는 분수였다.


아쿠아 비르고 정비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교황은 니콜라오 5세(재임 1447~55년)였다. 식수난 해결을 위해 고민하던 그는 아쿠아 비르고의 분수를 보수하고 새 시설 몇 개를 덧붙였다. 이름은 아쿠아 베르지네로 바꾸었다. 베르지네는 ‘처녀’를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라틴어인 아쿠아 비르고를 이탈리아어로 바꾼 데 불과했다.


당시 아쿠아 비르고에 물을 공급하고 있던 수원은 고대 로마 시대 아그리파가 발견해 연결했던 양치기 소녀의 샘이 아니었다. 고대에 비해 물맛이 나빴고 수질도 좋지 않았다.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는 이 점을 고려해 아쿠아 비르고를 옛 샘과 다시 연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교황청과 로마 시청의 관료주의 때문에, 나중에는 서로 헐뜯기 바빴던 건축가들 때문에 사업이 막혀버렸다. 교황이 생각했던 계획은 그가 죽은 뒤에도 무려 30년 동안이나 책상 서랍 속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바오로 3세의 뒤를 이은 비오 4세(재임 1559~65년)와 비오 5세(재임 1566~72년) 때에야 비로소 아쿠아 비르고 복원 작업이 진행될 수 있었다. 두 교황의 의지와 노력 덕분에 수로는 옛 샘과 다시 연결돼 원래 수질을 되찾게 됐다. 또 아쿠아 비르고와 연결되는 지하 수도관이 만들어져 시내 곳곳의 분수에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해서 로마 시내에 깔리게 된 새 수도관은 특이하게도 시내 주요 거리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포폴로 광장에 이르기까지 로마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코르소 거리 중간쯤에 골목길이 하나 있다. 스페인 광장으로 연결되는 비아 데이 콘도티(콘도티 거리)다. 이 거리의 이름은 ‘수도관 거리’라는 뜻이다. 지금은 각종 명품 가게가 즐비한 거리다.


트레비 분수


아쿠아 비르고와 수도관을 나름대로 정비한 교황청은 1570년 11월 4일 ‘샘 위원회’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추기경들이 참석한 위원회의 목적은 하나였다. 아쿠아 비르고에서 물을 공급받는 주요 지점에 웅장한 분수를 새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위원회가 고른 분수 건설 장소는 포폴로 광장, 콜로나 광장 등 열 곳이었다. 주로 로마의 북서쪽이었다. 고대 로마에는 마르스 평원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당시에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로마에서는 분수 건설 바람이 불었다. 궁전 소유자나 시 행정관, 교황, 그리고 재산을 제법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수를 짓고 싶어 했다. 덕분에 예술과 과학을 접목한 분수 건설 기술도 발달하게 됐다. 그 결과 아름다우면서 실용적인 분수가 나올 수 있었다. 특정 건축가 한 명이 아니라 조각가, 공예가 등 다양한 예술가가 협업을 통해 분수를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건축가는 분수 건설 의뢰를 받으면 기본 설계안을 만든 뒤 모양과 비용을 건축주와 상의한 뒤 최종 결정을 내렸다. 분수 건설에 필요한 석재는 먼 산의 채석장에서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이나 시내에 산재한 고대 로마 공중목욕탕에서 뜯어오는 게 더 간편하고 쉬웠다.


물론 위원회에서 계획했던 분수가 모두 예정대로 건설된 것은 아니었다. 수도관 수압이 낮아 분수를 짓기로 했던 장소까지 물이 운반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공간이 너무 좁아 분수를 세우기에는 부적합한 경우도 있었다. 위원회에서 계획했던 분수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곳은 1572년 포폴로 광장의 분수였다. 2년 뒤에는 나보나 광장에도 분수가 건설됐다.


분수 건설에서 가장 명성을 날린 사람은 제노바 출신의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였다. 그는 16세기 후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공사를 총괄 감독해 돔을 완성하기도 했고, 로마 곳곳에 수많은 교회, 저택, 궁전을 지은 건축가였다. 얼마나 많은 분수를 건설했던지 포르타는 ‘공식 분수 건축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혼자서 분수를 14개나 만들었다. 포폴로 광장, 콜로나 광장, 나보나 광장, 로톤다 광장, 산 마르코 광장, 캄페 델 피오리, 마테이 광장, 마도나 데이 몬티 광장, 기우디아 광장, 몬타나라 광장, 캄피텔리 광장에 있는 분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 미켈란젤로가 새로 조성한 캄피돌리움 광장의 분수 두 개도 그가 제작한 것이었다.


아쿠아 비르고의 종점인 트리비움에 새 분수를 만들기 위한 사업도 추진됐다.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교황은 우르바노 8세(재임 1623~44년)였다. 그는 트리비움 분수를 새롭게 건축하기로 하고 평소 아끼던 건축가 지안로렌조 베르니니에게 일을 맡겼다. 베르니니는 먼저 폴리 궁전 앞의 좁은 광장을 크게 넓혀 분수 조성 공간부터 확보했다. 이어 분수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단순하던 분수의 수조도 없애버렸다. 대신 아주 큰 수조 두 개를 새로 설치했다. 하지만 교황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후원자가 없어져 분수 조성 사업은 중단돼 버렸다.


이후 다섯 교황이 차례로 들어섰지만 누구도 트리비움 분수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노첸시오 13세(재임 1721~24년)는 아예 트리비움 분수 계획을 매우 싫어했다. 그의 가문이 분수 인근에 있던 폴리 궁전과 대형 저택 여러 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수를 새로 만들려면 폴리 궁전을 상당히 부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이렇게 하면서까지 분수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오랫동안 미뤄지던 분수 사업에 마침내 손을 댄 사람은 교황 클레멘스 12세(재임 1730~40년)였다. 그에게도 공사를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공사를 어느 건축가에게 맡기느냐를 두고 교황과 로마인들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클레멘스 12세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고향 출신 건축가 겸 조각가 알레산드로 갈릴레이를 로마로 불러 라테라노 대성당에 메디치 가문의 예배당인 카펠라 코르시니를 만들게 했다. 갈릴레이를 좋아한 교황은 더 많은 일을 주고 싶었다. 그는 공모전이라는 형식을 빌리기로 했다. 그래서 1732년 두 차례 공모전을 개최했다. 하나는 라테라노 대성당 정면 개축공사였고, 다른 하나는 트레비 분수 건설공사였다.


갈릴레이는 첫 공사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했다. 건축계에서는 로마 출신인 살비의 설계안이 더 훌륭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심사위원단이 1등으로 뽑았으니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트레비 분수를 건설하기 위한 두 번째 공모전에서도 갈릴레이가 1등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더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교황은 이번에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살비는 공모전에서 2등으로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건축을 맡아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스페인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진행하기 위해 무대장치를 만들어본 게 고작이었다. 그는 원래 수학, 철학을 공부하다 나중에 건축가로 변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건축가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 로마에서는 건축 바람이 시들기 시작했다. 살비가 얻을 수 있는 일거리는 많지 않았다. 그가 남긴 작품이 많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트레비 분수 공사는 1732년에 시작됐다. 클레멘스 12세는 3년 안에 공사를 마무리 짓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열정에 차 있었다. 그러나 사업비가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공사는 계속 미뤄져 30년 뒤에야 겨우 마무리될 수 있었다. 공기 지연 때문에 그는 건축이 끝나기 전에 눈을 감고 말았다. 1762년 5월 22일에 열린 분수 개통식의 영광은 후임 교황인 클레멘스 13세(재임 1758~69년)가 차지했다.



살비가 생각한 트레비 분수의 주제는 ‘바다 길들이기’였다. 폴리 궁전 정면 벽 아래쪽에 붙은 긴 바위의 개선문 아래로 물을 상징하는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가 등장한다. 그는 히포캄스(말) 두 마리가 이끄는 조개 모양 전차를 타고 있다. 손에는 모든 물을 다스린다는 뜻을 담은 홀을 들고 있다. 왼쪽 히포캄스는 광폭하게 날뛴다. 반대쪽 히포캄스는 거꾸로 아주 온순하다. 바다는 때로는 폭풍이 휘몰아치며 난폭한 곳이지만 때로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온한 곳이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오케아노스의 양쪽에는 석상이 두 개 있다. 왼쪽 석상은 풍요를, 오른쪽 석상은 건강을 나타낸다. 풍요롭고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에 걸쳐 인간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오케아노스 뒤편에는 양각 부조가 두 개 붙어 있다. 하나는 아쿠아 비르고를 만든 아그리파의 모습을, 다른 하나는 병사들에게 온천을 가르쳐준 양치기 소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양각 부조 뒤에는 코르시니, 루도비시, 케이롤로, 핀첼로티가 각각 만든 조각 네 개가 세워져 있다. 사계절과 물의 이점을 상징하는 조각이다.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풍성한 과일, 비옥한 들판, 가을의 선물, 편리한 초지와 정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분수 꼭대기에는 완공 당시 교황 클레멘스 13세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트레비 분수의 오른쪽 벽에는 화분처럼 생긴 조각 ‘아소 디 코페’가 세워져 있다. 이 조각이 설치된 이유를 놓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살비는 분수 건설 공사를 관리하면서 하루 종일 공사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식사도 공사장에서 했고, 때로는 잠도 여기서 잤다. 이발은 공사장 주변의 이발소에서 해결했다. 그가 이발소에 갈 때마다 주인 이발사가 트레비 분수의 설계와 조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 데 없는 말을 했다. 한두 번은 참았지만 나중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살비는 이발소 출입을 중지한 것은 물론 이발사가 가게 안에서 분수 공사장을 볼 수 없게 하려고 조각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아소 디 코페였다.


트레비 분수라는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두고 두 가지 가설이 전해진다. 분수는 세 개의 수조로 이뤄져 있었다. 그래서 ‘3’을 뜻하는 트레비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는 주장이 있다. 분수가 있던 장소는 ‘삼거리’라는 의미의 트레비움이었다. 여기에서 트레비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동전 던지기


트레비 분수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뒤로 돌아 동전 던지기다. 이 이벤트의 유래를 놓고 여러 가지 견해가 나온다. 먼저 1954년 아카데미영화제 주제곡상을 받은 영화 ‘분수와 동전 3개’라는 영화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영화에는 ‘동전 한 개를 던지면 로마로 돌아오고, 두 개를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며, 세 개를 던지면 그 사람과 결혼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부터 동전 던지기가 시작됐다고 상당수 여행 가이드는 주장한다.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풍습은 19세기 한 독일인 때문에 생겼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는 유럽 중산층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여행지였다.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유물 상인이었던 볼프강 헬비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헬비그는 1862년 독일고고학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로마에 갔다가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아예 눌러 살게 됐다. 그곳에서 만난 러시아 공주 나디야 샤코브스코이와 결혼한 덕분에 더 이상 일을 안 해도 될 정도로 부자가 됐다. 그는 부인 덕분에 상류층과 어울리게 됐고, 그들을 위해 큰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어느 날 헬비그는 트레비 분수 앞에서 축제를 진행하던 도중 “고대 로마인은 분수와 다리의 신에게 희생물을 바쳤다”면서 분수에 동전을 던졌다. 그의 행동을 본 여러 사람이 여행 서적이나 편지에 그 내용을 담아 유럽 곳곳에 퍼뜨렸다. 이후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을 던지는 관습이 생겨나게 됐다.


실제 고대 로마 시대에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서 온 여행자가 로마 인근에 도착했을 때 개울을 다스리는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헬비그와 같은 시대에 독일에서 온 여행자 중에는 조상의 관습을 따라 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유래가 어떻든 동전 던지기는 재미있는 관습이다. 그렇다면 트레비 분수에 고대 로마의 동전인 세스테르티우스를 던지면 어떨까? 금화인 아우레우스를 던질 수는 없고…. 그렇게 하면 옛날로 돌아가 화려했던 고대 로마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상상은 늘 여행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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