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이해할 수 있는 로마 욕탕 문화
고대 로마인들은 중세 기독교도들과는 달리 목욕을 매우 좋아했다. 목욕의 민족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노예 무역상이었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쿤두스의 묘비에는 ‘목욕, 와인, 섹스는 몸을 망친다. 하지만 인생을 살 가치가 있게 만들어주기도 한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로마인에게 목욕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로마에 언제부터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는 관습이 도입됐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리스에서 목욕 문화가 넘어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는 로마 건국 이전부터 그리스와 문화적, 종교적으로 깊은 유대 관계를 갖고 있었다. 특히 로마는 그리스 문화에 맹목적일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욕 문화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목욕에 질병 치료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온천이 나오는 샘물 등에 욕장을 만들어 몸이 아플 때마다 찾아갔다. 목욕과 관련해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그리스의 고고학적 유적들은 BC 24~8세기의 것들이다.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파이스토스의 궁전에서 목욕시설로 보이는 방이 발굴됐다. 산토리니섬의 아크로티리에서는 석고 목욕통이 발굴됐다.
그리스인들은 BC 6세기 무렵에는 도시 안에 욕장을 짓기 시작했다. 개인욕장뿐만 아니라 대중욕장도 건설됐다. 대중욕장은 체육관 인근에 만들어 운동을 마친 사람들이 몸을 씻을 수 있게 했다. 욕장은 지붕이 없는 야외시설이었으며, 때로는 단순히 샤워만 하거나 족욕만 할 수 있게 만든 곳도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온욕뿐만 아니라 냉욕도 즐겼다. 호메로스의 시를 보면 냉탕을 즐기고 온탕에 들어갔다고 한다. 목욕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애용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은 작품에 주인공들이 목욕을 했다는 기록을 많이 남겼다.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원정대 총사령관이었던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전쟁을 마치고 귀국한 뒤 목욕을 하다 암살당했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섬을 떠나기 전날 마지막 목욕을 즐겼다.
로마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청결을 매우 중시했다. 이때는 사정상 자주 목욕을 할 수는 없었다. 1세기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에 따르면 건국 초기 로마인은 외출하고 돌아오면 팔다리를 깨끗이 씻었고 1주일에 한 번은 꼭 목욕을 했다.
로마에서 언제부터 목욕이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문화현상으로 확산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로마를 한니발의 침략으로부터 구한 구국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은퇴한 뒤 마르스 평원에 있던 빌라에서 따뜻한 목욕을 즐겼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BC 3세기 무렵 이미 로마에는 온욕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스키피오의 온욕은 우리나라 온돌처럼 바닥을 가열해서 물을 데운 뒤 빌라에 붙어 있는 연통을 통해 수증기가 욕실로 들어가게 하는 이른바 히포카우스트 방식으로 이뤄졌다. 현대의 사우나와 비슷한 방식이다.
BC 1세기 중엽 대중욕장 또는 개인욕장은 로마에 널리 퍼진 일반적 문화현상이 돼 있었다. 당시 철학자 키케로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로마에는 아주 작은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욕장이 즐비하다네’라고 적었다. 로마인들은 얼마나 목욕을 좋아했으며, 그들의 목욕 문화는 어떠했을까? 그것을 알아보려면 그들의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로마에서 개인목욕탕은 발네아, 대중목욕탕(욕장)은 테르메라고 불렀다. 발네아는 목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발라네이온에서, 테르메는 역시 뜨겁다는 뜻인 그리스어 테르모스에서 온 말이다. 고대 기록을 살펴보면 BC 33년 로마에는 대중욕장과 개인목욕탕을 합쳐 모두 170곳의 욕장이 있었다. 4세기 무렵에는 하루 2천~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테르메 11곳, 발네아 926곳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제정 시대 초창기에 만들어진 아그리파 욕장과 네로 욕장, 카라칼라 욕장,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었다.
BC 1세기 중엽 대중욕장 또는 개인욕장은 로마에 널리 퍼진 일반적 문화현상이 돼 있었다. 당시 철학자 키케로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로마에는 아주 작은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욕장이 즐비하다네’라고 적었다.
귀족이나 부자는 집에 발네아를 한두 개씩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집에서 목욕을 하는 대신 평민, 심지어는 노예까지 모이던 대중욕장인 테르메에 갔다. 로마에서의 목욕은 단순히 몸을 청결하게 씻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개인적 이야기는 물론 정치적, 사회적, 사업적 대화를 나누는 사교 행위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로마의 각 가정에서 물을 사용하려면 아쿠아 비르고 등 로마 시내를 지나다니는 여러 수로에 관을 연결해야 했다. 이 수도관을 이용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물을 식수나 음식조리용 말고는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대중욕장이 많아져 누구나 손쉽게 목욕을 즐기게 되기 전까지는 일부 정치인은 인기를 얻을 목적으로 공짜 목욕 쿠폰을 뿌리기도 했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검투사 경기 대회를 열면서 관중에게 온욕권과 오일 세트를 선물했다. 또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파우스투스와 비슷한 시기에 온욕권과 이발권을 로마 시민에게 나누어주었다.
대중욕장은 대개 해가 뜨면 문을 열었고 해가 지면 문을 닫았다. BC 1세기 로마의 건축가 겸 토목전문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에 따르면 개장 시간은 대개 정오에서 일몰 때까지였다. 3세기 초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는 밤늦게까지 문을 열었다는 기록도 있다. 평균적으로 문을 여는 시간은 8번째 시간이었다.
1세기 로마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자연의 역사』에 ‘보통 여름에는 10번째, 겨울에는 9번째 시간에 욕장에 들어갔다’고 기록에 남겼다. 정오 이전에는 욕장에 들어갈 수 없는 게 원칙이었지만, 병약자나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은 예외였다.
여기서 로마인의 시간 계산법을 잠시 보자. 당연히 현대와는 매우 달랐다. 로마인은 낮을 12시간으로 나눴다. 여름과 겨울에 따라 시간은 달랐다. 어떤 때는 길어졌고 어떤 때는 짧아졌다. 여름 하지를 기준으로 하면 로마의 첫 번째 시간은 오늘날 오전 4시 27분이었다.
욕장이 문을 여는 8번째 시간은 오후 1시 15분 무렵이었다. 열두 번째 시간은 오후 6시 17분이었고, 하루가 끝나는 시간은 오후 7시 33분이었다. 겨울의 첫 번째 시간은 오전 7시 33분이었다. 플리니우스가 겨울에 욕장에 간 9번째 시간은 오후 1시 29분이었다. 열두 번째 시간은 오후 3시 42분, 하루가 끝나는 시간은 오후 4시 27분이었다. 아무래도 해가 지면 더 이상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두울 때의 시간을 재는 것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로마인이 어떻게 목욕을 즐겼는지를 살펴보자. 로마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오전에 사업을 챙겼다. 오후 2~3시 무렵이면 욕장으로 가서 피로를 풀었다. 해가 저물면 욕장 문을 닫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하루를 건너뛸 수도 있었다. 밤을 밝힐 등잔 기름이 비싼 시절에 넓은 욕장을 환하게 만들 만큼 등잔불을 밝힐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욕장 입장료는 놀랄 만큼 싸거나 무료였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목욕을 즐길 기회를 줌으로써 불만을 해소할 수 있게 하려는 게 로마 정부의 생각이었다. 귀족이나 평민, 부자나 빈자 할 것 없이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벌거벗고 욕장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로마 제국이라는 대의, 또는 공동체 의식을 가장 잘 실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욕장이었다.
욕장 물이 충분히 준비되고 입장할 시간이 되면 문지기가 종을 울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일대에서 ‘피르미 발네아토리스(FIRMI BALNEATORIS)’라는 글자가 새겨진 종이 발견됐다. 피르미는 굳세다, 힘이 넘친다는 의미의 라틴어이고, 발네아토리스는 욕장 주인을 뜻하는 라틴어다. 욕장에 들어가는 사람은 입구에 서 있는 문지기에게 돈을 주어야 했다. 일정 연령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입장료를 면제했다. 외국인도 욕장에 갈 수 있었지만 지정된 일부 시설에만 가야 했다. 특이하게도 외국인의 입장료도 무료였다.
현대인은 아무리 잦아도 하루 한 차례 정도만 욕장을 이용하지만, 고대 로마인은 달랐다. 처음에는 그들도 하루 한 차례만 욕장에 갔지만, 제정 로마 전성기에는 하루 서너 번, 어떤 사람은 열 차례나 욕장에 가기도 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코모두스 황제는 하루에 7~8회 욕장에 갔고,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는 여름에는 일곱 차례, 겨울에는 두 차례 목욕을 즐겼다. 코모두스는 하루 세 끼 식사를 거의 욕장에서 먹다시피 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생활 방식이 황제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먼저 제정 황금기에는 엄청난 부가 로마로 몰려왔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람은 하루 종일 일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 로마에 개인욕장은 물론 대중욕장이 그만큼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대중욕장 관리는 조영관이 담당했다. 그들은 욕장을 보수, 유지하는 일은 물론 욕실을 청소하고 욕실 온도를 제대로 조절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로마 외에 속주에서는 욕장 관리를 재무관에게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의 욕장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나오는 시설은 아포디테리움이었다. ‘옷을 벗는다’는 뜻인 그리스어 아포디오에서 나온 단어다. 말 그대로 아포디테리움은 탈의실이었다. 이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개인 사물보관함이 설치돼 있었고, 바구니도 엄청나게 비치돼 있었다. 보관함에 옷을 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벽에 걸어놓는 옷걸이도 있었다. 아포디테리움에는 손님들이 앉아서 옷을 벗을 수 있게 긴 벤치가 놓여 있었다.
당연히 여기서 옷을 훔쳐가거나 옷에 들어있는 돈이나 귀중품을 빼가는 절도범이 설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부자는 집에서 부리는 노예를 데리고 가 목욕을 하는 동안 옷을 지키게 했다. 고대 로마의 아포디테이룸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우리나라 욕장과 똑같은 구조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욕장에는 야외 운동공간인 팔라스타라가 있었다. 대부분 사람은 본격적인 목욕에 앞서 이곳에서 운동부터 했다. 대개 체조와 가벼운 몸 풀기, 오락 경기였다. 물론 건강을 위해서였다. 로마 사람들은 가장 이상적인 운동의 양을 땀을 약간 흘릴 정도라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로마인들은 운동할 때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이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가 네로 욕장 인근에 살 때 욕장에서 매일 들리는 괴상한 소리에 대한 불평을 담은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고 하니 욕장 소음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도대체 어떤 소리를 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역사 기록에 그런 내용까지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을 마친 로마 인은 나타티오라는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로마인들은 수영을 할 때도 이상한 소음을 냈다고 세네카는 불평했다.
운동에 이어 수영까지 끝낸 뒤에는 이제 드디어 본격적인 목욕에 나선다. 목욕은 단순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거나, 샤워기로 몸을 간단히 씻는 정도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로마의 목욕 문화가 상세한 기록에 담겨 현대까지 전해질 이유가 없다.
로마의 욕탕은 냉탕인 프리기다리움, 온탕인 테피다리움, 열탕인 칼다리움, 건식 사우나인 라코니쿰, 습식 사우나인 수다토리움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쬐며 일광욕을 하는 헬리오카미누스도 있었다. 스트리길이라는 쇠로 만든 도구를 이용해 몸의 때를 밀기도 했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에 따라 욕탕을 이용하는 순서가 달랐다. 냉탕부터 가고 온탕에 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목욕부터 즐기고 맨 나중에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욕 전후에 오일을 바르는 사람도 많았다. 신경쇠약에 시달린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목욕에 앞서 항상 오일을 발랐다.
일반적으로 로마인들이 가장 먼저 간 곳은 욕장 입구에 있는 냉탕인 프리기다리움이었다. 운동을 할 때 배어나온 땀을 식히는 게 목적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프리기다리움은 매우 웅장했다. 대리석 기둥 여덟 개가 이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천장 높이는 무려 30m에 이르렀다.
프리기다리움에서 나온 로마인들을 기다린 다음 방은 온탕인 테피다리움이었다. 뜨거운 탕에 들어가기에 앞서 몸을 준비시키는 공간이었다. 찬물에 익숙해진 몸을 갑자기 열탕에 담그면 심장마비나 고혈압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다. 다음 단계는 열탕이 있는 칼다리움이었다. 이곳에는 반원형 벽감인 엑세드라가 여러 곳 설치돼 있었다. 목욕을 하다가 지인을 만나면 이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오랫동안 목욕을 즐기는 사람은 책을 읽기도 했다.
칼다리움에서 나온 뒤에는 다시 프리기다리움에 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욕장에 가면 뜨거운 한증실에서 나온 뒤 찬물이 담긴 냉탕에 풍덩 뛰어들듯이 로마인들도 프리기다리움에 몸을 던졌다. 그 사이사이에 사우나를 즐기기도 했다.
욕장에서 운동으로 땀을 빼고 목욕을 즐긴 뒤에는 식사를 하는 게 일상적이었다. 식사를 한 다음에는 소화를 시키기 위해 다시 운동을 하거나 욕조에 몸을 담그기도 했다. 욕장에서 음악 공연이나 광대 쇼가 펼쳐지기도 했다. 이러니 오후 시간을 욕장에서 계속 보내도 지겹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가지고 온 음식이나 욕장에서 파는 음식을 사서 욕실 안에서 먹기도 했다. 욕장에는 많은 가게가 설치돼 있어 음식은 물론 목욕 등에 필요한 각종 물건을 팔았다. 어떤 대형 욕장에는 욕실에서 흘러나온 물로 물레방아를 돌려 밀을 간 뒤 빵을 즉석에서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1세기 중반 네로 황제 시대에 궁전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일을 맡았던 작가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가 남긴 글을 보면 로마인들이 어떻게 욕장을 이용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먼저 테피다리움에 가서 땀을 흘린 뒤 프리기다리움에서 열을 식혔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트리말키오를 발견했다. 그의 피부는 향기로운 오일을 발라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노예의 도움을 받아 때를 밀고 있었다. 단순한 아마사 직물이 아니라 아주 부드럽고 순수한 양털로 짠 옷감을 이용해서였다. 그는 우아한 보라색 옷을 입더니 화장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제정 시대에는 일부 황제도 황궁의 목욕탕 대신 대중욕장에서 일반 시민과 함께 어울려 목욕을 즐기게 됐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저자가 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는 ‘(3세기 황제)갈리에누스는 여름이면 매일 6~7차례 욕장에 갔다. 겨울에는 두세 번에 그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의 욕장은 남성만 가는 게 아니었다. 여성도 목욕을 즐겼다. 테르메에는 벽을 사이에 두고 남탕과 여탕이 붙어 있기도 했다. 같은 화로에서 데운 물을 서로 나눠 쓰게 돼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에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가 대중욕장에 갔다는 기록이 수에토니우스의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 나온다.
‘아티아는 한밤중에 아폴로신전에 성스러운 예배를 드리러 갔다. 그녀는 쓰레기를 신전에 내려놓고 잠시 잠이 들었다. 함께 간 다른 부인들도 잠이 들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큰 뱀 한 마리가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티아가 잠에서 깨었을 때 마치 남편이 그녀를 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몸에 마치 뱀 같은 흔적이 생겼다. 아무리 씻어도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티아는 할 수 없이 욕장에 가야 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여성 욕장이 아무래도 남성 욕장보다는 작거나 불편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여성은 남성보다 입장료를 더 비싸게 냈다. 게다가 여성이 들어가는 욕장 개장시간은 남성 욕장보다 짧았다. 그래서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욕장을 둘러싸고 쌓인 여성의 불만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2세기 로마 문법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의 『아티카의 밤』에 나오는 내용이다.
캄파니아의 작은 도시인 테아눔에서 집정관의 부인이 욕장에 갔다. 작은 도시의 작은 욕장이었기 때문에 여성 전용 탕은 매우 좁았다. 화가 난 부인은 그 도시의 재무관을 불러 “남탕을 모두 비우도록 해요. 그곳에 가서 목욕하고 싶군요”라고 말했다. 과연 어떻게 됐을까? 재무관은 부인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에게는 욕장에서 꼭 지켜야 할 규칙, 관습도 많았다.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성을 이해할 나이가 되면 아버지와 함께 욕장에 가는 일은 삼가야 했다. 장인과 사위가 함께 욕장에 가는 일도 드물었다’고 적었다.
로마가 점점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목욕 문화는 달라졌다. 아그리파 욕장을 시작으로 해서 테르메라고 부른 대욕장이 생긴 이후로는 더 그랬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몰려가 함께 목욕을 즐기기도 했고, 심지어는 남녀가 같은 욕실에서 난잡하게 목욕하기도 했다. 남성과 여성이 같은 욕실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욕장 측이 허용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 욕장에는 남녀 공용 욕실만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녀 혼욕 관습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금지시킬 때까지 이어졌다.
로마의 욕장은 그다지 청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을 자주 갈지 않은데다 오일이나 때는 물론 심지어 대변 배설물까지 섞여 들어간 물을 다시 데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질병 감염 우려가 높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욕장이 너무 지저분하다고 자주 불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니 얼마나 청결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의학서적 『데 메디시나』로 유명한 1세기 학자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켈수스가 ‘목욕을 하면 치료 효과가 있다. 하지만 몸에 새로 생긴 상처가 있으면 가지 마라. 감염될 우려가 크다’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로마에 불운한 일이 생기면 모든 신전의 문을 닫았던 것처럼 욕장도 문을 닫았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한가하게 목욕이나 즐기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칼리굴라는 ‘종교적 행사가 열리는 기간 중에 목욕이라는 사치스러운 일에 빠지는 것은 중대한 범죄’라고 말하기도 했다.
로마의 목욕 문화는 정복 전쟁을 수행하러 유럽과 오리엔트 곳곳으로 파견된 군대에 의해 외국에도 퍼져 나갔다. 군인들은 고향에서 하던 대로 목욕을 즐기기 위해 주둔지에 욕장을 세웠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하루 종일 피 튀기는 싸움에 시달리고, 휴전 중에는 도로나 건물을 짓느라 전쟁 때보다 더 힘든 노역에 시달린 로마 병사에게 저녁에 즐길 수 있는 목욕은 하루의 피와 고통을 모두 씻어내는 일종의 종교적 제의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로마인 덕분에 온천도시로 발전한 곳도 여러 곳 있다. 영국의 배스와 벅스톤, 프랑스의 엑스와 비시, 독일의 아헨과 비스바덴, 오스트리아의 바덴 등이다.
서구인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로마의 목욕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황제나 원로원 의원이 평민, 노예와 같은 욕장에서 벌거벗은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서로 땀을 흘리고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는 것을 퇴폐한 로마 사회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집안을 지켜야 하는 여성이 옷을 다 벗은 채 서로 깔깔 웃고 장난을 치는 모습도 이해하지 못한다.
로마를 연구하는 많은 유럽, 미국 역사학자, 고고학자도 표면적으로는 로마 목욕 문화를 이해하는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생활을 매우 중시한 서구인에게 목욕은 그 중에서도 특히 은밀한 사생활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만약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의 욕장에 들어가 본다면 다들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목욕탕, 사우나와 똑같은 풍경이 이미 2천 년 전 로마에서 태연하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다녀온 뒤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게 일상적인 한국인이 로마인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면 다른 서구인보다 훨씬 더 말이 잘 통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