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메(2)

지배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by leo



아그리파 욕장


로마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대형 대중욕장은 제정 시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장군이었던 아그리파가 건설한 아그리파 욕장이었다.


현재 로마의 베네치아 광장 앞을 지나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거리에는 폼페이우스 대극장과 고대 신전 유적인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가 있다. 이곳을 등지고 길 건너편의 비아 디 토레 아르젠티나 골목이나 비아 데이 체스타리 골목 안으로 200m 정도 걸어가면 판테온이 나온다. 판테온에 도착하기 전의 두 골목 사이에 세 블록에 걸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세 블록이 고대 로마 최초의 대규모 대중욕장 아그리파 욕장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BC 25년 판테온을 완공할 때와 비슷한 시기에 욕장을 지었다. 그가 죽고 난 뒤인 BC 12년 욕장은 완전 개방돼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판테온과 아그리파 욕장은 서로 붙어 있었기 때문에 재미있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원래 판테온은 아그리파 욕장의 출입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판테온을 짓고 보니 정말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돼버렸고, 욕장 출입구로 쓰기는 아까워 몇 가지 시설을 덧붙여 신전으로 축성했고, 대신 아그리파 욕장에는 출입구로 쓸 열주 회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아그리파 욕장은 개장 초창기에는 물이 부족해 건식 사우나인 라코니쿰으로 운영됐다. 욕조는 없었고 온도만 높여 수증기로 몸을 데워 살을 빼는 사우나 비슷한 곳이었다. 아그리파가 BC 19년 수로인 비르고 아쿠아를 완공한 덕분에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자 아그리파 욕장은 정식 테르메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아그리파는 욕장을 여러 가지 미술품으로 장식했다. 조각상을 갖다 놓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의 그림 등도 걸어놓았다.


아그리파 욕장의 정확한 구조는 20세기 초에 발견된 마블 플랜이라는 지도 덕분에 알려졌다. 마블 플랜은 2세기 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학자 마테오 카다리오가 만든 대리석 지도였다. 라틴어로는 포르마 우르비스 로마라고 한다.


마블 플랜은 가로 18m, 세로 13m의 초대형 대리석에 새긴 지도였다. 원래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 인근에 있는 평화의 제단 벽에 붙어 있었다. 마블 플랜은 로마를 240분의 1로 축소한 지도였다. 당시 로마에 있던 신전, 공공건물, 욕장, 인술라, 빌라 등을 모두 기록하고 있었다. 마블 플랜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와 귀족 저택을 짓는 데 사용되느라 뜯겨나갔다. 그 중 조각 1천여 개가 곳곳에서 발견돼 고대 로마 시내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다. 발견된 조각은 전체 지도의 10% 분량이라고 한다.


마블 플랜에 따르면 아그리파 욕장은 판테온을 축으로 해서 남북 방향으로 세워졌다. 남북으로 길이는 100~120m, 동서로 폭은 80~100m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나게 큰 욕장이었음에 틀림없다. 북쪽 끝은 판테온이었고 남쪽 끝은 오늘날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거리였다. 그리고 서쪽은 비아 데이 체스타리 골목, 서쪽은 비아 디 토르 아르젠티나였다.


아그리파 욕장의 중간 부분에는 지름 25m의 대형 홀이 세워져 있었다. 3세기 무렵 시리아 출신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점은 홀에 붙어 있던 아르코 델라 키암벨라라는 이름의 돔에 자오선이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3세기 무렵에 로마인은 자오선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17세기에 신분을 알 수 없는 화가가 그린 아그리파 욕장의 스케치 그림에 자오선이 그려진 돔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17세기까지도 아그리파 욕장은 나름대로 모양을 갖추고 있었고, 이후 교회나 귀족 저택을 짓느라 뜯겨나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그리파 욕장 서쪽에는 대형 인공 호수인 스타그눔과 아그리파의 개인 정원인 호르티가 건설돼 있었다. 아쿠아 비르고와 연결된 스타그눔은 욕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시설로 보인다. 스타그눔과 호르티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거리와 코르소 델 리나시멘토 거리, 비아 델 세디아리 골목, 비아 몬테로네 골목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호수, 정원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아그리파 욕장은 처음에는 판테온에 연결돼 있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가 욕장을 증축하면서 여러 홀을 새로 만들어 붙인 덕분에 결국 판테온까지 이어지게 됐다. 하드리아누스가 만든 직사각형 홀은 길이 45m, 폭 9m에 이를 정도로 웅장했다. 벽 두께만 1.75m였다. 홀에는 터키산 파보나제토 대리석과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든 기둥을 세웠다. 1~4번 기둥 사이에는 3개의 벽감이 있었는데, 두 개는 직사각형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반원형이었다.


아그리파 욕장은 80년 티투스 황제 시대에 발생한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티투스는 물론 그의 뒤를 이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사비를 들여 복원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시설이 낙후되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정비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아그리파가 처음 만든 판테온도 완전히 새로 지었으니, 이렇게 보면 아그리파 건축의 계승자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비아 디 토레 아르젠티나 옆 골목인 비아 몬테로네에는 치에사 디 산타 마리아 인 몬테로네 교회가 있다. 이 교회 인근에서 ‘오래돼 낡은 욕장’이라고 쓰인 명판이 발견됐다. 로마 후기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 형제가 아그리파 욕장을 수리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아그리파 욕장의 흔적을 찾으러 가 보자. 앞부분에서 설명했듯이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에서 비아 데이 체스타리 골목이나 비아 디 토르 아르젠티나 골목 안으로 들어가 걷다 보면 두 골목을 연결하는 첫 골목이 나타난다. 비아 델 아르코 델라 키암벨라이다.


이곳이 바로 자오선이 그려진 돔을 가진 홀, 아르코 델라 키암벨라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아그리파 욕장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구글맵에서 살펴보면 아그리파 욕장(Terme di Agrippa)과 아르코 델라 키암벨라(Arco della Ciambella)라는 유적 표시가 나온다.


네로 욕장


아그리파 욕장은 로마 시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통 큰 사회 기부에 매우 감사했다.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암살한 덕에 제위에 오른 네로 황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시민의 지지와 애정이었다. 그는 아그리파를 본받아 욕장을 만들어 시민들의 호의를 얻어내려 했다.


네로는 아그리파 욕장이 만들어져 있던 판테온 근처에 로마의 두 번째 공공욕장을 만들었다. 아그리파 욕장처럼 아쿠아 비르고에서 물을 공급받기 위해 그곳을 욕장 위치로 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네로 욕장은 아그리파 욕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인공호수 스타그눔 인근에 있었다. 지금 스타그눔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비아 세디아리 골목 바로 옆에는 산티보 알라 사피엔자 성당이 있다. 성당 다음 골목으로 건너가면 이탈리아 상원인 팔라초 마다마가 나온다. 성당과 상원 건물 사이의 조그마한 광장에 작은 분수가 나타난다.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성 에우스타체 광장 분수다. 네로 황제가 만든 대중욕장에 달려 있었다고 하는 분수다.


네로 욕장은 판테온과 스타디움 도미티아니(도미티아누스 경기장, 지금의 나보나 광장) 사이에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다. 가로 190m, 세로 120m여서 면적만 놓고 보면 아그리파 욕장보다 약간 더 컸다. 성 히에로니무스가 쓴 『연대기』에 따르면 네로 욕장은 64년에 완공됐다. 네로 욕장은 227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거의 새로 짓다시피 개축됐다. 이후 이 욕장은 공식적으로는 알렉산데르 욕장이라고 불리게 됐다.



네로 욕장은 중세 시대에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중앙 홀에 있던 적색 화강암 기둥 4개는 17세기 교황 알렉산데르 7세 시대에 판테온을 수리하기 위해 뜯겨 나갔다. 하얀색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머리, 터키산 대리석 파보나제토와 적색 화강암 등으로 만든 다른 열주 기둥, 지름이 6.70m나 됐다는 세숫대야 모양의 초대형 분수 등도 모두 중세 시대에 뜯겨 나가 여러 교회를 짓는 데 사용됐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열탕인 칼다리움의 기반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완전히 파괴돼버린 탓에 팔라초 마다마의 벽 부분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게 없다.


모두가 네로 욕장을 잊고 있던 1871년 판테온 인근 마다마 궁전에서 우리나라의 온돌 비슷하게 바닥을 가열해서 열을 내는 시설인 히포카우스트가 발견됐다. 이곳에 사용된 벽돌에는 123년에 만들었다는 상표가 찍혀 있었다. 1907년에는 인근에서 164년, 364년, 371년, 404년 상표가 찍힌 벽돌들이 발굴됐다. 네로 욕장이 첫 건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되거나 증축됐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판테온에서 나보나광장으로 가는 골목인 살리타 데이 크레센치에 있는 네로 시대의 벽에서는 수도관도 발견됐다.


카라칼라 욕장


카라칼라는 오현제 시대 마지막 황제인 코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제위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198~211년 사이 아버지와 함께 로마를 공동 통치했다. 세베루스가 212년 브리타니아 원정 도중 눈을 감자 동생 게타를 살해하고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다. 폭정을 펼쳐 인기가 없었던 그는 불과 5년 뒤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 암살당하고 말았다.


카라칼라는 재위 기간이 짧다 보니 남긴 업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평가를 받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로마 시민권을 개방해 로마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난에 시달린다. 다른 하나는 카라칼라 욕장이다. 현재 위치로 설명하면 지하철 치르코 맛시모 역 바로 인근에 있다. 콜로세움에서 걷는다면 팔라티노 언덕 앞 도로를 10분 정도만 가면 된다.


아그리파 욕장과 네로 욕장은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반면 카라칼라 욕장은 원형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다. 추정컨대 아그리파 욕장과 네로 욕장은 로마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고, 카라칼라 욕장은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게 다른 결과를 낳은 이유가 아닐까?


카라칼라 욕장은 로마의 첫 고속도로였던 아피아 가도 인근에 만들어졌다. 면적은 121만㎡에 이른다. 5년 동안 매일 9천여 명을 동원해 공사를 진행한 끝에 카라칼라 암살 전후에 완공됐다. 원래 이곳에는 낮은 언덕이 있었다. 카라칼라는 언덕의 높은 부분을 깎아내고 낮은 다른 쪽에는 흙을 쌓는 방법으로 땅을 평평하게 만들어 공사를 진행했다. 이 욕장은 아쿠아 마르키아의 지류 격인 아쿠아 안토니니아나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따로 저수조를 만들지 않고 욕장 안으로 바로 물을 받아들였다.


카라칼라 욕장은 네로 욕장처럼 우리나라의 온돌인 히포카우스트 방식으로 열을 올려 실내를 데웠다. 욕장이 깔끔한 상태였을 때를 그린 그림을 보면 우리나라의 사우나가 금세 떠오른다. 욕탕 안에 벽돌을 쌓아 관중석처럼 만들어놓은 실내 공간에 사람이 앉아 화덕에서 나온 뜨거운 수증기와 열로 땀을 뺐다. 바닥을 데운 열은 욕실 벽에 만들어놓은 빈 공간을 타고 올라가면서 실내를 데웠다. 열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카라칼라 욕장에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조각이 특히 많았다. 원래는 욕실이나 벽 곳곳에 마련된 벽감에 설치돼 있었다. 조각은 단순히 장식용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분수로도 사용했다. 조각에 수도관이 설치돼 있어 물이 흐르게 돼 있었다. 조각은 대부분 대리석으로 만들어 색칠했거나, 아니면 청동으로 만들기도 했다.


석재로 만든 카라칼라 욕장의 조각은 로마 멸망 이후 중세에 이를 때까지 대부분 부서졌고, 청동으로 만든 조각은 녹여져 다른 용도로 재활용됐다. 부서지거나 녹은 것은 조각뿐만이 아니었다. 카라칼라 욕장 벽이나 천장, 담장을 꾸몄던 많은 장식도 마찬가지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테베레강 건너편 트라스테베레 지역의 산타마리아 성당에는 대리석 기둥 네 개가 있는데, 1140년 무렵 교황 이노센트 2세의 명령에 따라 카라칼라 욕장에서 뜯어간 것이다.



카라칼라 욕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각은 파르네스 헤라클레스다. 16세기 중엽 파르네스 가문 출신인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는 오래 된 가문 저택인 파르네스 궁전을 화려하게 꾸미기로 했다. 그는 카라칼라 욕장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게 헤라클레스 석상이었다. 지금은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바오로 3세는 석상을 찾아내 가져가거나 여러 가지 장식을 뜯어가는 것 말고 카라칼라 욕장을 재건하거나 유지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발굴조사 이후에는 다시는 욕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욕장은 17~18세기에는 경작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카라칼라 욕장은 19세기에 복원을 빙자해서 실시된 발굴조사 때문에 한 번 더 망가졌다. 그때도 교회나 귀족은 여전히 욕장의 대리석이나 여러 장식품을 떼 가는 게 일상적이었다. 한쪽에서는 욕장을 복원한다면서 땅을 파 발굴조사를 벌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발굴조사에서 찾아낸 장식품을 가져가는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당시 카라칼라 욕장에서 뜯어간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식품은 모자이크였다. 원래 카라칼라 욕장의 모자이크는 개장 당시부터 매우 화려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모자이크의 모양과 무늬는 장소에 따라 다양했다. 바닥에 깔린 모자이크가 있는가 하면 벽을 장식한 모자이크도 있었고, 천장을 예쁘게 꾸민 모자이크도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모자이크는 팔라스트라 바닥을 장식한 운동선수 모자이크였다. 1824년 발굴조사 도중 발견된 이 모자이크는 바로 뜯겨 나가 라테라노 대성당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1960년대에는 바티칸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 바티칸 박물관에 가면 운동선수 또는 운동과 관련된 내용의 모자이크를 볼 수 있는데, 카라칼라 욕장에서 뜯어온 것이다.


20세기 중반 카라칼라 욕장은 음악 공연 등을 개최하는 장소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마치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고성처럼 현대의 로마인은 카라칼라 욕장이 주는 폐허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로마인은 문화유적 보존에 무관심했다. 오페라 공연을 한다면서 카라칼라 욕장에 코끼리를 입장시켜 일부 시설에 피해를 주는 일도 있었다. 그나마 완전히 붕괴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살아남은 게 카라칼라 욕장으로서는 다행인 셈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건국 초기부터 목욕을 즐겼던 로마인들에게도 충격적일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목욕시설이었다. 욕장과 운동시설만 있는 게 아니라 거대한 도서관과 너른 정원까지 갖춰 책을 읽고 토론을 하거나 산책까지 하면서 육체건강은 물론 정신건강도 지킬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공사를 시작한 사람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친구로 사두정치 시대에 동방 지역 황제를 맡았던 막시미아누스였다. 298년 시작한 공사는 305~306년 사이에 끝났다. 욕장 곳곳에서 발견된 명문에는 막시미아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욕장을 헌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비미날레 언덕 꼭대기에 건설됐다. 당시에는 땅값이 상당히 비싼 고급주택지였다. 포로 로마노 같은 시내 한복판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었지만 아그리파 욕장이나 네로 욕장보다는 시내에 가까웠다. 현재 지도로 위치를 살펴보면 테르미니 역 바로 인근에 있는 원형의 레푸블리카 광장을 중심으로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에 데이 마르티리 성당과 성당 뒤에 있는 국립로마박물관, 성당 맞은편에서 반원형으로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두 건물이 모두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규모는 카라칼라 욕장과 비슷했다. 아그리파 욕장, 네로 욕장보다는 훨씬 컸다. 대충 가로 356m, 세로 316m였다. 본 건물 크기만 가로 280m, 세로 160m에 이를 정도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 생긴 이후 로마인들은 매일 이곳에 들러 시원하게 목욕을 즐기는 게 일상이 됐다. 단 하루도 가지 않는 날은 드물었다. 로마인들은 번잡한 포로 로마노 등 로마 시내에서 벗어나 한가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욕장 남쪽에 있는 반원형 테라스에 서면 로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에서 얻는 감각적 즐거움이 얼마나 짜릿했던지 이곳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은 반드시 그 다음날 다시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마약 같은 시설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아그리파, 네로와 달리 당시로서는 시내에 가까운 비미날레 언덕에 초대형 욕장을 만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로마 시민들이 수시로 욕장에 들러 건물 정면에 붙은 디오클레티아누스라는 이름을 보면서 황제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느끼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로마에 상주하지 않은 그로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로마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신이 창안한 사두정치의 안정을 유지하는 지름길이었다.


로마인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을 애용하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욕장에서는 보기 힘든 엄청난 양의 물 순환 시설, 현대 욕장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수온 및 물 배송 시스템은 놀라울 정도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물은 아쿠아 마르키아에서 공급받았다. 물은 별도의 저수조에 담아놓았다. 저수조의 위치는 현재 테르미니 역 근처였다. 테르미니 역과 레푸블리카 광장 사이에 시티투어 등 대형 관광버스가 주차하는 구역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저수조 자리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먼저 만들어진 카라칼라 욕장에서 많은 부분을 모방했다. 건축가들은 공간감각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각 욕실 천장은 매우 높게 만들어졌고, 거대한 기둥이 연이어 세워졌다. 벽을 따라 수많은 벽감(움푹 들어간 부분)이 만들어져 마치 욕실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주 건물 주변에는 너른 정원이 조성됐으며, 정원 주변을 부속 건물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건물은 주로 벽돌로 만들었지만, 외벽은 소석회 등 화장도료로 덮는 스투코 기법으로 마감해 마치 석재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에는 대형 도서관도 있었다. 본관의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건물이 도서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서관의 규모나 정확한 기능은 분명하게 규명돼 있지 않은 상태다. 고대 서적이나 각종 기술 관련 서적을 많이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나온다.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반원형 담화공간인 엑세드라에 둘러앉아 다양한 아이디어를 서로 교환하기도 했다. 욕장 본관과 도서관은 조용한 정원으로 나뉘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고대 로마가 멸망한 이후인 537년 로마로 쳐들어온 토틸라의 동고트족이 아쿠아 마르키아를 파괴하면서부터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중세시대에 고대 로마를 지켜온 대부분 건축물이 파괴돼버렸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 그나마 과거 모습을 일부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판테온이 그랬던 것처럼 교회로 바뀐 덕분이었다.


1561년 교황 비오 4세(재임 1559~65년)는 카르투시오 수도회에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을 보호하면서 교회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이 사업을 책임지게 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 최고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였다. 그는 욕장을 바실리카 데 산타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 에 데이 마르티리라는 긴 이름의 교회로 리모델링했다. 그는 욕장 부분을 수도사 숙소와 회랑으로, 다른 공간은 여러 종교 활동을 진행할 수 있는 행사장으로 바꾸었다.


교황이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에 교회를 세우려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기독교를 탄압한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목욕장을 건설할 때 기독교도 4만 명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했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실제 그 정도 규모는 아니었지만 일부 기독교도가 강제로 목욕장 공사에 끌려간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성모 마리아와 천사와 순교자의 교회’다.


‘성모 마리아와 천사와 순교자의 교회’는 활처럼 휘어진 모양이다. 욕장의 열탕과 온탕을 구분했던 벽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교회 안은 과거 온탕이다. 본체는 과거 냉탕 구역이다. 교회는 가로로 긴 십자가 모양이다. 교회 설계를 맡은 미켈란젤로가 원래 상태를 많이 남기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오늘날에는 국립로마박물관, 레푸블리카 광장, ‘성모 마리아와 천사와 순교자의 교회’, 에스드라 광장으로 바뀌었다.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살았던 베니스 출신의 화가 지아코모 라우로는 당시 남아 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전경을 그림에 담았다. 물론 그의 그림은 고대 로마 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원래 모습은 아니다. 그 이후에 덧붙여진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을 보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만든 욕장이 얼마나 굉장했을지 상상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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