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 코르소

전쟁 행군로에서 관광 중심지로

by leo



로마를 여행하느라 이곳저곳을 오가다보면 언제나 비아 델 코르소 즉 코르소 거리를 지나게 된다. 로마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중심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폭이 겨우 10m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좁지만 하루 종일 로마인은 물론 해외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길이다.


첼로를 들고 연주하는 노인, 바닥에 앉아 빵을 먹고 있는 젊은이, 남 눈 신경 안 쓰고 키스하는 데 여념이 있는 청춘남녀 등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골목에는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과 카페가 넘쳐나고, 명품은 물론 싼 옷도 살 수 있는 가게가 즐비하다. 코르소 거리를 걷다가 굳이 길을 제대로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아무 골목에나 쑥 들어가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코르소 거리는 카피톨리노 언덕 앞 베네치아 광장에서 시작해 포폴로 광장까지 이어지는 총길이 1.5㎞ 정도의 거리다. 이곳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은 많은 로마 유적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 판테온, 나보나 광장 등 유명한 관광지가 이 길을 따라 몰려 있다.


코르소 거리는 고대 로마 시대에는 비아 플라미니아 즉 플라미니아 가도였다. BC 220년 감사관이었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이 도로를 처음 만들었다. BC 1세기~서기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보의 『지리』에 그런 내용이 나와 있다.



플라미니우스는 이탈리아 북부 포 강 인근 갈리아 키살피나에 살던 리구르 족을 정벌한 뒤 로마에서 티레니아와 옴브리카를 거쳐 아리미눔까지 이르는 길을 만들었다. 이것이 비아 플라미니아였다. 로마에서 아리미눔까지 거리는 1천350스타디온이었다. 요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211~270㎞ 정도라고 한다. 비아 플라미니아는 나중에는 아퀼레이아까지 연장됐다. 로마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 군사활동을 펼치는 데 있어 비아 플라미니아는 매우 중요한 도로였다. 그래서 BC 65년 무렵에는 이 도로만 관리하는 특별 관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카피톨리노 언덕 앞쪽의 베네치아 광장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르비우스 성벽의 포르타 폰티날리스(폰티날리스 문) 앞이 비아 플라미니아의 출발점이었다. 이 길은 마르스 평원을 가로질러 현재의 포르타 델 포폴로(포폴로 문)를 지나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올라갔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시내에 무덤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도로 주변에는 많은 무덤이 만들어져 있었다.


공화정 말기부터 제정 초기에 마르스 평원 주변에도 개발 바람이 불었다. 그 덕분에 비아 플라미니아 주변은 도시로 변모했다. 또 여러 기념비적 건축물이 비아 플라미니아를 따라 세워졌다. 지금은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건물들이 도로 주변에 빼곡하게 들어찼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있지만, 제정 시대까지만 해도 많은 신전, 바실리카 등을 두루 볼 수 있었다. 주거 지역도 조성됐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역이 근대, 현대 발굴조사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집들이 아주 밀집해 있어 사람들이 적지 않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아 플라미니아에는 개선문 세 곳이 있었다. 아르쿠스 노부스, 아르쿠스 클라우디아, 아르코 디 포르토갈로였다. 각 개선문을 지날 때에는 도로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도로가 개선문의 아치 안으로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에 가장 가까웠던 개선문은 303~30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막시미아누스 황제와 함께 치른 개선식에 맞춰 제작한 아르쿠스 노부스였다. 다음에는 51~52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만든 아르쿠스 클라우디아가 서 있었다. 로마에서 가장 먼 개선문은 아르코 디 포르토갈로였다. 원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만들어져 아르쿠스 하드리아니라고 불렸다. 16세기 포르투갈 대사관이 근처에 세워졌다고 해서 아르코 디 포르토갈로 즉 포르투갈 개선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71~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야만족의 침입에 대비해 로마 주변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쌓았다. 이때부터 비아 플라미니아의 출발지는 자연스럽게 성벽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이때 길이 성벽 밖으로 나가는 곳에 성문이 하나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포르타 플라미니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중에는 포르타 포폴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로 오늘날의 포폴로 광장에 있는 플라미니아 문 즉 포폴로 문이다.


비아 플라미니아는 4세기 무렵부터는 ‘넓은 길’이라는 뜻인 비아 라타로 불렸다. 정확히 설명하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쪽의 길 즉 오늘날의 코르소 거리 구간만 이렇게 불렀다. 코르소 거리의 평균 폭은 10m여서 현대적인 도로 기준에 비춰보면 좁은 골목길 수준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다른 길에 비해 매우 넓은 도로였기 때문이었다.


고대 로마가 오도아케르에게 멸망당하고 100여 년이 지난 600년 무렵 비아 라타에는 빈민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복지센터와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가 세워졌다. 15세기부터는 새로 지은 교회나 리모델링한 교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살기 위한 궁전도 연이어 만들어졌다. 이때 건물을 짓는 데 사용했던 건축자재는 인근 포로 로마노나 팔라티노 언덕 등에서 뜯어온 것이었다.


코르소라는 거리 이름은 이 무렵에 만들어졌다. 15세기 무렵부터 비아 라타에서는 기수 없는 말 경주가 열렸다. 이 경주를 코르사 데이 바르베리라고 불렀다. 코르소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나왔다.


코르소 거리를 채운 건물은 계획에 따라 규칙적, 계획적으로 건설된 게 아니었다. 그래서 17세기 무렵에는 여러 건축기법으로 만들어진 건물 때문에 코르소 거리는 조화롭지 못하고 불규칙하고 지저분한 길로 전락해 버렸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67년)는 코르소 거리를 재정비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절도 있는 개발을 촉구했다. 하지만 귀족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따르지 않는 바람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교황은 거리에 질서와 균형감을 주기 위해 지나치게 튀어나왔거나 높은 건물을 부수거나 잘라냈다. 너무 작거나 뒤로 물러난 건물에는 부속 시설을 덧붙이기도 했다. 길을 시원하게 뚫기 위해 아르코 디 포르토갈로 등 여러 건축물을 아예 뭉개버리기도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


코르소 거리의 중심은 콜로나 광장이다. 이 광장은 콜로나 리오네(구)에 자리 잡고 있다. 콜로나 리오네는 코르소 거리를 중심으로 해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뉜다. 길 오른쪽은 몬스 핀키우스라고 불린 핀키오 언덕 방향이며, 왼쪽은 평지인 마르스 평원이다. 언덕 쪽에는 귀족들이 도무스라는 호화 저택을 짓고 살았다. 콜로나 리오네의 왼쪽 끝은 판테온이며, 오른쪽 끝은 베르니니 분수가 있는 바르베리니 광장이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이후 로마의 중앙 부분인 콜로나 리오네에는 개발 바람이 불었다. 특히 도무스가 많았던 북쪽이 집중적으로 개발됐다. 그 결과 북쪽은 콜로나 리오네에서 떨어져 나가 루도비시 루오네로 독립했다.


콜로나 광장은 거의 직사각형이다. 북쪽에는 치기 궁전이 있다.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관으로 이용됐으며, 지금은 이탈리아 정부 건물이다. 동쪽에는 19세기에 만든 쇼핑 건물인 갤러리아 콜로나가 있다. 2003년 이후 갤러리아 알베르토 소르디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쪽은 페라졸리 궁전 측면이다. 이전에는 교황청 우체국이 있던 건물이다. 서쪽은 베데킨드 궁전이다. 베이이에서 가져온 기둥으로 만든 열주 회랑이 있는 건물이다.


콜로나 광장 한가운데에는 원형 기둥이 하나 서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다. 2세기 후반 로마 제정 오현제 시대 마지막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가 마르코마니, 콰디, 사르마티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원주는 트라야누스 기둥을 모델로 해서 제작했다. 나선형 부조가 도리아 양식의 기둥을 감싸고 있는 형태다. 콜로나라는 이름은 이 원주에서 유래했다. 이탈리아어로 ‘기둥’을 콜로나라고 한다. 콜로나 리오네의 문장은 은색 원주 3개로 이뤄져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를 뜻하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에는 기둥을 세운 유래, 연도 등을 새긴 헌정사가 새겨져 있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기에 헌정사는 파괴돼 버렸다. 그래서 이 기둥이 황제 재임 기간 중에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그가 죽은 180년 이후에 건설됐는지는 불분명하다. 원주 인근에서 발견된 명문에는 ‘원주가 193년에 완성됐다’고 적혀 있다. 역사학자들은 원주 건설 시기를 176~193년 사이로 추정한다.


원래 원주 꼭대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조각상은 16세기에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성 베드로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재임 1585~90년)의 지시로 만든 동상이었다. 트라야누스 기둥 꼭대기에 세운 성 베드로 청동상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세운 것이었다.


원주가 세워진 곳은 제정 시대에 아우구스투스 등 여러 황제를 화장하던 장소 근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신전과 하드리아누스 신전 사이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신전은 황제의 아들이었던 코모두스가 신으로 승격된 아버지에게 바친 성소였다.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광장 서쪽을 차지하고 있는 베데킨드 궁전 자리가 신전 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 몸체의 높이는 29,6m다. 기단 부분은 10.1m다. 그래서 원주의 총 높이는 39.7m다. 기단 부분 3m는 땅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1589년 복원공사 때 땅위로 다시 올라왔다. 원주는 지름 3.7m의 카라라 대리석 27~28개로 만들었다.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 190~200개를 설치하려고 가운데 부분은 파냈다. 기둥 바깥에 붙은 부조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계단으로 빛이 들어가게 했다. 중세 시대에는 돈을 내면 기둥에 올라갈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제법 인기를 끌었는지 기둥 입장 관리권을 경매로 팔기도 했다. 지금은 기둥에 올라갈 수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는 선황이었던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에서 승리한 뒤 만든 트라야누스 원주를 모방해 만들었다. 부조의 조각은 트라야누스 원주보다 섬세하지 못해서 햇빛으로 명암이 생길 때에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원주의 나선형 부조는 황제가 치른 전쟁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카르눈툼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다뉴브 강을 건너는 장면으로 부조는 시작한다. 카르눈툼은 로마 군단의 성채가 있던 곳이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페트로넬 카르눈툼과 바트 도이치 알텐부르크 인근이다. 카르눈툼 고고학 공원에 당시 유적이 남아 있다.


원주 앞에는 자그마한 분수가 있다. 1575~77년 유명한 분수 건축가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가 설계하고 로코 로시가 만든 피아자 콜로나 분수다.



교황 비오 4세(재임 1559~65년)와 비오 5세(재임 1566~72년)는 고대 로마 시대 수로 아쿠아 비르고를 복원해 아쿠아 베르지네를 완성했다. 두 교황의 의지와 노력 덕분에 로마 전역에 아쿠아 비르고와 연결되는 소규모 지하 수도관이 만들어져 시내 곳곳의 분수에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아쿠아 베르지네를 정비한 교황청은 1570년 11월 4일 ‘샘 위원회’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아쿠아 베르지네를 이용해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로마의 주요 지점에 새로운 공공 분수를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이때 피아자 콜로나 분수도 만들어졌다. 원래 계획은 분수에 작은 동굴을 조성해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든 바다의 신 마르포리오의 조각상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실제 만들어진 분수는 단순했다. 팔각형 수조는 그리스 키오스 섬에서 가져온 분홍색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분수를 만든 건축가 지아코모는 수조 주변에 사자 머리 16개를 붙였다. 가운데 발판에는 둥근 석재 물통을 설치했다. 물은 이 물통을 지나 수조로 들어갔다. 1830년 건축가 알레산드로 스토키는 원래 중앙에 있던 물통을 제거하고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현재 수조를 새로 설치했다. 그는 여기에 조개껍질로 꼬리를 둘러싼 돌고래가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조각을 수조 끝에 덧붙였다.


도리아 팜필리 궁전


포폴로 광장에서 시작한 코르소 거리가 베네치아 광장으로 빠져나오면 플레비시트 거리와 직각으로 만나게 된다. 두 거리의 모퉁이에 큰 저택이 있다. 지금은 도리아 팜필리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는 도리아 팜필리 궁전이다. 로마의 개인 갤러리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이곳의 전시품 중 최고 걸작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인노첸시오 10세 초상화’다. 도리아 팜필리 궁전이 생기기 전에 그린 것이다. 넓게 보면 그림에서 궁전의 역사가 시작한다.


초상화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임 1644~55년)의 심복이자 연인으로 알려진 올림피아 마이달키니가 벨라스케스에 의뢰해 만든 것이다. 올림피아는 원래 인노첸시오 10세의 형수였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인노첸시오 10세에게는 조카인 카밀로 팜필리였다. 그는 어머니와 삼촌의 불륜 관계를 증오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1647년 알도브란디니 가문의 딸인 올림피아 보르게세와 결혼했다. 카밀로는 첫 번째, 올림피아 보르게세는 두 번째 결혼이었다.


올림피아 보르게세는 카밀로와 결혼하면서 지참금으로 많은 그림과 여러 채의 저택, 광활한 토지, 그리고 알도브란디니 궁전을 가져갔다. 그녀의 재산은 이후 상속을 통해 팜필리 가문으로 넘어가게 됐다. 카밀로 부부는 알도브란디니 궁전에서 살았다. 그들은 저택을 대규모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웃에 있던 집들과 수도원을 사들여 부수고 새 건물을 늘렸다. 예수회 측이 불쾌한 뜻을 전했지만 교황의 조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팜필리 가문은 아들을 낳지 못해 대가 끊기고 말았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은 카밀로와 올림피아 보르게세의 막내딸인 안나 팜필리 그리고 제노바 출신의 귀족인 남편 지오반니 안드레아 4세 도리아 란디 왕자였다. 지오반니는 대가 끊긴 처가의 명맥을 이어주기로 하고 그의 성에 팜필리 가문의 성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도리아 팜필리 란디라는 새로운 가문의 이름이 탄생했다.


도리아 팜필리 궁전은 1767년 안드레아 도리아 팜필리와 사르디니아 왕조의 후손인 카르기나노 왕자 루이 빅토르의 결혼을 앞두고 재건축됐다. 궁전에는 많은 미술품이 보관돼 있었다. 도리아 가문, 팜필리 가문, 란디 가문, 알도브란디니 가문이 결혼이나 상속 등을 통해 모은 그림, 가구, 조각상 등이었다. 인노첸시오 10세가 조카에게 물려준 그림과 가구도 있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외에 티티아노, 라파엘로, 카르바지오 등 대가들의 작품도 적지 않다.



도리아 팜필리 궁전을 갤러리로 바꾼 사람은 도리아 팜필리 가문의 피를 물려받은 유일한 후손이었던 오리에타 포그손 도리아 팜필리였다. 오리에타는 필리포 도리아 팜필리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간호사였다. 필리포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던 도중 사고로 다쳤을 때 간호해준 여인이었다.


필리포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가 무솔리니 지지 깃발을 흔들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파시스트 지지 군중이 궁전에 몰려와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오리에타는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히기도 했다.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는 아픔도 맛봤다.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한 이후에야 겨우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혁명을 꿈꾸던 노동자 계급이 로마를 휩쓸고 다니던 때여서 오리에타는 금발을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어머니와 함께 트라스테베레에 숨어 지내야 했다.


오리에타는 헤어졌던 아버지를 트라스테베레에서 우연히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필리포는 당시 독일의 나치가 사령부로 사용하던 트라스테베레의 빌라 도리아 팜필리를 폭파시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독일이 전쟁에서 항복하는 바람에 이 저택은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필리포 가족은 전쟁이 끝난 뒤 도리아 팜필리 궁전에서 다시 살 수 있게 됐다. 이 궁전은 다행히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멀쩡한 상태였다.


아직 로마의 상황이 불안한 시대여서 오리에타는 안전을 위해 아드리아 해의 도시 안코나에 가서 살았다. 그녀는 당시 해군 장교였으며 미래의 남편인 영국인 프랑크 포그슨을 만났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 석유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오리에타가 누구인지,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오리에타는 크리스마스 이브 때 포그슨을 로마의 궁전으로 초대했다.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고 ‘코르소 거리 304번지’라는 주소만 적어 주었다. 로마에 간 포그슨이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가문도 영국에서 부자였지만 도리아 팜필리 가문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4년 뒤였다. 오리에타가 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고생하던 아버지를 돌봐야했기 때문이었다. 필리포가 세상을 떠난 후인 1958년 포그슨과 오리에타는 결혼했다. 포그슨은 장인의 유언을 받아들여 성에 도리아 팜필리를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이름은 프랑크 포그슨 도리아 팜필리가 됐다.


오리에타는 작고한 부친에게서 모든 재산과 작위를 물려받았다. 코르소 거리의 도리아 팜필리 궁전과 나보나 광장의 성 아그네스 성당, 제노바의 여러 저택은 물론 아풀리아에 있는 성, 포르토피노에 있는 13세기 궁전 등이었다. 부부는 상속세 등을 해결하느라 나보나 광장의 성당 등은 팔아야 했다. 트라스테베레의 야니쿨룸 언덕에 있는 22만 평 규모의 빌라 도리아 팜필리도 이탈리아 정부에 넘겨줬다.


부부는 이후 조상의 유산을 지키면서 복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수십 년 동안 대대적 복구 작업을 벌여 도리아 팜필리 궁전의 많은 방을 덮고 있던 먼지 종이를 치워버렸다. 1996년에는 궁전을 대중에게 개방했다. 도리아 팜필리 궁전의 방은 무려 1천 개를 넘는다. 로마에서 규모로는 3대 궁전에 포함될 정도다. 면적만 놓고 보면 성 베드로 대성당의 3분의 2에 이르고 콜로세움 면적과 비슷하다. 이곳에서는 입장료를 내면 갤러리를 둘러볼 수 있다. 국립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게 단점이다. 갤러리에서는 화려한 미술품을 배경으로 바로크와 르네상스 음악 연주회, 그리고 패션쇼도 수시로 열린다.


부부는 1960년대 영국 고아 두 명을 입양했다. 조너선 도리아 팜필리와 게신느 도리아 팜필리였다. 1998년 포그슨, 2000년 오리에타가 죽은 뒤 모든 재산은 두 남매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두 입양아는 재산 분쟁을 빚었다. 게신느는 이탈리아 예술 전문가와 결혼해 네 딸을 두었다. 조너선은 동성애자였다. 그는 정식결혼하지 않고 대리모를 통해 두 아이를 낳았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이탈리아에서 대리모 출산은 불법이었다. 게신느는 조나선의 두 아이에게 상속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소송을 진행했다. 분쟁의 대상이 된 재산은 15억 달러 정도였다. 게신느는 “대리모가 언젠가 두 아이를 이용해 재산을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나선은 “고아였던 우리가 도리아 팜필리 가문에 입양돼 엄청난 행운을 누렸듯 두 아이도 똑같은 운명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도리아 팜필리 가문의 정식적 유산이다”라고 맞섰다. 법원은 조너선의 손을 들어줬다. 두 사람은 법원 판결에 승복했다. 하지만 앞으로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또다시 점화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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