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폴로 광장

로마 관문 지키는 세 성당의 비밀

by leo



로마에는 건국 초기부터 성벽이 있었다. 처음에는 팔라티노 언덕만 둘러싸고 있었지만 BC 4세기 6대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때 일곱 언덕 주변으로 영역을 넓혔다. 로마의 성벽은 BC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 때 무너졌다. 나라는 성벽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이 지킨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BC 2세기 말부터 로마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속주는 물론이거니와 로마 자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3세기 말 장군 출신 황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다시 쌓았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세르비우스 성벽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포괄했다. 일곱 언덕은 물론 마르스 평원과 티베르 강변 너머 지역까지 성벽 안에 넣었다.


파란 선은 세르비우스, 빨간 선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성에는 모두 18개의 문이 달려 있었다. 대부분 로마에서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도로 즉 ‘비아’가 시작하는 지점이었다. BC 220년 감사관이었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건설한 비아 플라미니아 즉 플라미니아 가도가 시작하는 곳에도 문이 생겼다. 처음에 문을 설치할 때에는 ‘플라미니아 가도의 출발점’이라는 뜻에서 포르타 플라미니아로 불렸지만 나중에 ‘포폴로 문’이라는 뜻인 포르타 델 포폴로로 바뀌었다.


포폴로 문은 이탈리아에 철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외지인이 로마 여행을 시작하는 첫 관문이었다. 서유럽에서 온 순례자와 여행객들이 로마에 들어오려면 이 문을 거쳐야 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거쳐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도 있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에 붙잡혀 노예로 끌려갈 위험이 컸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성문에 불과했다. 오늘날처럼 모습이 바뀐 것은 15세기 교황 식스토 4세(재임 1471~84년)가 과거의 성문을 부수고 현재의 문을 새로 단 덕분이었다. 16세기에는 교황 비오 4세(재임 1559~65년)가 건축가 나니 디 바치오 비지오에게 문을 다시 고치라고 지시했다. 포폴로 광장을 통해 로마에 첫 걸음을 내디디는 순례자에게 깊은 인상을 줄 관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


포폴로 문은 1655년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가 프로테스탄트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해 로마에 망명했을 때 통과한 문이기도 했다. 당시 북유럽의 강국이었던 스웨덴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다. 크리스티나의 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는 1632년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에 참전했다가 가톨릭 병사가 쏜 흉탄을 가슴에 맞고 세상을 떠났다.


크리스티나에게 가톨릭은 사실상 원수와 같은 종교였던 셈이지만 그녀는 왕위에 오르기 이전부터 가톨릭 교리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스웨덴을 22년간 통치한 그녀는 1655년 왕위를 샤를 구스타프에게 물려주고 퇴위한 뒤 로마로 달려왔다. 프로테스탄트의 중심국가인 스웨덴 여왕이 개종을 위해 로마로 건너오자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임 1655~67년)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은 여왕을 환영하기 위해 당대 최고 건축가 베르니니에게 포폴로 문을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베르니니는 성문에 ‘Felici fausto ingressui’라는 라틴어 문구를 새겼다. 여왕을 환영한다는 뜻의 ‘행복하고 축복받은 도착을 위해’라는 내용이다. 그는 교황의 기분을 살려주기 위해 알레산데르 가문을 상징하는 참나무 가지와 스웨덴 왕가의 상징인 밀 이삭도 새겨놓았다.



비오 4세가 포폴로 문을 새로 고칠 때까지만 해도 포폴로 광장은 지금처럼 넓고 잘 정돈된 공간이 아니었다. 광장이라기보다는 비아 플라미니아가 가운데를 지나가고 주변은 좁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된 공터에 불과했다. 당시 로마 시내로 이어지는 길은 코르소 거리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좁고 더러운 골목길 수준이었다.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포폴로 광장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마르스 광장의 다른 지역은 도시 계획에 따라 나날이 변하고 있었지만 이곳만은 여전히 초라한 상태를 유지했다.


비오 5세(재임 1566~72년)와 그레고리오 13세(재임 1572~85년) 때부터 포폴로 광장은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먼저 포폴로 문 맞은편 쪽으로 세 갈래 길이 만들어졌다. 이 덕분에 광장은 규칙적이면서 대칭적인 모양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분수도 하나 만들어졌다. 1570년 아쿠아 비르고와 로마 시내를 관통하는 상수도관을 나름대로 정비한 교황청은 ‘샘 위원회’라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추기경들이 참석한 위원회의 목적은 ‘로마에 새롭게 분수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아쿠아 비르고에서 물을 공급받는 주요 지점 열 곳에 웅장한 분수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위원회가 고른 분수 건설 장소 중에서 가장 먼저 완공된 곳은 제노바 출신의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가 1572년에 완성한 포폴로 광장의 분수였다.


분수는 바티칸과 트라스테베레에 있던 중세 때의 분수를 흉내 내어 만들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분수 수조가 너무 작은 탓에 너른 광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대리석으로 만든 트리톤과 조개껍질 같은 장식용 조각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비오 5세와 그레고리오 13세가 시작한 변화의 시도를 이어받아 포폴로 광장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탈바꿈시킨 인물은 식스토 5세(재임 1585~90년)였다. 그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있던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파내 광장으로 옮겨 세웠다. 원래 BC 10년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 정벌을 기념하는 뜻에서 로마로 가져와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워놓았던 것이었다. 로마 멸망 이후에 쓰러져 당시에는 지하에 파묻혀 있었다.


식스토 5세는 분수의 방향도 180도 바꿔 포폴로 문 대신 삼거리를 바라보게 했다. 분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광장 규모에 비해 너무 작은 분수를 새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분수 주변에는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사자 조각상 네 개를 세우려고 했다. 사자는 그의 가문의 문장에 등장하는 동물이었다.


새 분수와 사자 조각상 계획은 식스토 5세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무산되는 듯했지만 19세기에 들어서 현실로 이뤄졌다. 건축가 주세베 발라디에르가 기존의 분수 앞쪽에 둥근 새 수조를 설치하고 주변에 사자 조각상 네 마리를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그는 또 광장 동쪽과 서쪽에 벽을 세워 광장 모양을 장방형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관광객들이 로마에 가면 볼 수 있는 포폴로 광장의 전체 구조가 완성된 것이었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포폴로 광장이라는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서 유래한다. 포폴로 문을 마주보고 섰을 때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다. 성당에 포폴로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나온다. 하나는 포폴로라는 단어는 ‘백성’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성당이 지어진 뒤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거지가 형성됐다. 그래서 포폴로라는 이름이 성당에 붙었다는 게 첫 번째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포플러 나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전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당 자리는 제정 시대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의 무덤이었다고 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고 전설에 따른 것이다. 16세기 말 수사였던 지아코로 알베리치가 글로 써서 남긴 것을 17세기 수사 암브로기오 란두치가 책에 기록한 내용이다.


네로는 68년 에스파냐에서 갈바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로마에서 달아났다. 원로원도 그에게 등을 돌려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데다 근위대도 갈바를 지지하기로 뜻을 모은 상황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6㎞ 정도 떨어진 외곽 지역에 숨었다. 하지만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살하고 말았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에 묻어주려 하지 않았다. 자칫하다가는 테베레 강에 내버려질 판이었다. 그의 어릴 적 유모가 시신을 수습해서 화장해 네로가 속한 도미티아누스 씨족의 묘지에 매장했다. 그의 묘지가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르스 평원을 내려다보는 핀키오 언덕이었다는 사실만 알려졌다. 오늘날 포폴로 광장 왼쪽의 높은 언덕이다.


네로가 죽은 이후 광장 한쪽 구석에서 포플러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나무가 자라면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네로가 묻힌 곳은 포플러나무 자리이며, 이 나무는 네로의 정령이라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밤에 또는 혼자서 포폴로 광장에 다니기를 꺼렸다. 네로의 정령이 다른 악마들을 모아 광장에 나타나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죽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포폴로 광장의 통행이 끊어지자 로마 시내에 어려움이 닥쳤다. 로마 외곽에서 생산한 농산물이나 각종 물자를 이곳을 통해 수송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교황 파스칼 2세(재임 1099~1118년)는 신도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사흘간 단식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날 지쳐 쓰러진 그의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네로의 정령과 악마로부터 포폴로 광장을 구하는 상세한 방법을 일러 주었다.


1099년 사순절의 세 번째 일요일 다음 화요일에 교황은 모든 사제와 신도들을 모아 행진을 시작했다. 머리 위로 십자가를 높이 올려들고 비아 플라미니아를 따라 포폴로 광장까지 걸어갔다. 그는 광장에서 퇴마 의식을 거행했다. 십자가로 포플러나무를 뿌리까지 흔들릴 정도로 세게 내리쳤다.


나무에서 엄청난 괴음이 터져 나오더니 많은 악마가 튀어나와 곳곳으로 달아났다. 교황은 사람들에게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파게 했다. 땅 밑에는 네로로 추정되는 유해가 묻혀 있었다. 교황은 유해를 테베레 강에 버리라고 했다. 교황은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는 큰 돌을 하나 가져다 놓고 예배를 드렸다. 돌은 임시로 만든 예배당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는 첫 예배를 드린 지 사흘 만에 간이 예배당을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했다. 이후 포폴로 광장에 네로 정령이 나타나거나 악마를 데리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성모 마리아의 성소가 선 자리에 악마가 함부로 나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은 123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재임 1227~41년) 때 봉헌됐다. 그는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던 성모 마리아 그림을 이곳으로 옮겼다. 지금은 성당의 제단 위에 걸려 있다. 이 그림에도 흥미로운 전설이 전한다.


1230년 로마에 대홍수가 발생한 직후 엄청난 역병이 번지게 됐다. 역병을 퇴치할 방안을 고민하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41년)의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라테라노 대성당의 산크타 산크토룸 예배당에 있는 나의 그림을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광장으로 옮겨라.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황은 다음 날 바로 추기경들은 물론 모든 성직자, 그리고 모든 로마 시민을 라테라노 대성당에 모았다. 신성한 예배의식을 거행한 뒤 성모 마리아의 그림을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로 옮겼다. 추기경 등 모든 성직자, 로마 시민은 그림 뒤를 따라가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성모 마리아 그림이 새 보금자리에 안착하자마자 기적처럼 로마에서 역병은 사라졌다.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순례자가 이 그림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는 놀랍게도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들이 만든 눈부신 미술 작품 여러 점이 숨겨져 있다. 카라바지오가 그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성 베드로’, 베르니니가 만든 조각상 ‘다니엘’ 등이다. 지금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 있는 라파엘로의 ‘교황 율리우스 2세 초상화’도 원래 이 성당에 걸기 위해 그린 것이었다.


이 성당에서 가장 훌륭한 예술품은 치기 예배당이다. 16세기 은행가 아고스티노 치기가 당시 최고 건축가이자 화가였던 라파엘로에게 부탁해 만든 ‘천지창조’ 모자이크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는 또 르네상스 시대 유명 조각가 로렌제토가 만든 『구약성서』의 선지자 요나와 엘리야의 조각상도 있다.


성당 바닥에는 많은 묘지가 만들어져 있다. 복도에는 훌륭한 장례 미술품들이 가득 차 있다. 1099년부터 시작해 이 성당은 교황청 사제, 귀족은 물론 르네상스 시대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당대 유명 인사의 안식처로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15~19세기 빼어난 장례 미술품과 무덤이 교회를 가득 메우게 된 것이다.


쌍둥이 성당


포폴로 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쌍둥이 성당이다. 두 곳을 마주보고 섰을 때 오른쪽이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고 왼쪽은 바실리카 디 산타 마리아 인 몬테산토(몬테산토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다. 나란히 서 있지만 두 성당의 주소는 다르다. 미라콜리 성당 주소는 캄포 마르지오 리오네 비아 델 코르소 528이다. 몬테산토 성당은 캄포 마르지오 리오네 비아 델 바부이노 197이다. 몬테산토 성당은 로마의 ‘예술인 성당’이다.


1655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임 1655~67년)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오기로 한 크리스티나 여왕을 환영하기 위해 포폴로 문을 보수했다. 여왕을 영접하러 포폴로 광장에 직접 나간 교황은 너무 썰렁한 광장 풍경을 보고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오벨리스크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황량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데르 7세는 공터를 그야말로 광장의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코르소 거리로 들어오는 지점에 쌍둥이 성당을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포폴로 문을 지나 로마에 들어오는 사람을 환영하는 뜻에서 광장에 기념이 될 만한 배경 건물을 세우자는 게 그의 뜻이었다. 그렇게 하면 광장의 경치가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공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지지부진하던 쌍둥이 성당 건설 공사가 갑자기 급속도로 진행된 과정을 둘러싸고 아름다운 전설이 등장한다. 포폴로 광장 인근에는 빈민이 살던 거주지가 밀집해 있었다. 이곳에 가난하지만 신심이 깊은 여인이 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대했던 쌍둥이 성당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그녀는 깊이 상심했다. 여인은 스스로 성당 건설 공사비를 마련하겠다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된 여인은 저축한 돈을 들고 교황청을 찾아갔다. 그녀는 “제가 평생 모은 재산입니다. 겨우 150스쿠디에 불과한 적은 돈이지만 성당 공사비에 보태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한 추기경 가스탈디는 교황 클레멘스 10세(재임 1670~76년)를 찾아갔다. 그는 사재를 털어 성당 공사를 진행해서 1675년 성년이 되기 전에 사업을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교황은 추기경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가스탈디는 그때부터 모든 재산을 투자해 공사를 진행했다. 두 성당은 1678년에 완성됐고 1681년에는 봉헌식을 치를 수 있었다.



대충 보면 미라콜리 성당과 몬테산테 성당은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차이점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먼저 미라콜리 성당은 원형이지만 몬테산테 성당은 타원형이다. 미라콜리 성당은 열쇠구멍을 닮았다. U자 모양 애프스를 가지고 있는데다 네 개의 측면 예배당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두 개는 세로로, 나머지 둘은 가로로 놓여 있다.


두 성당의 정면 모양은 거의 똑같다. 그래서 두 성당이 똑같이 생겼다는 착각을 주는 것이다. 두 성당의 정면에는 열주가 세워져 있다. 정면 위에는 삼각형 페디먼트가 달려 있다. 전설에 따르면 두 성당에 사용된 열주는 원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지을 계획이었던 종탑에 사용하려고 준비했던 것이라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 종탑 계획이 무산되자 이곳에 세웠다는 이야기다.


두 성당의 돔 모양도 다르다. 미라콜리 성당의 돔은 8각형인데 몬테산테 성당의 돔은 12각형이다. 대충 보면 돔이 같은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잘 세어보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두 성당 뒤쪽에 서 있는 종탑은 바로크 양식을 잘 보여준다. 형태는 꽤 다르다. 미라콜리 성당의 디자인은 17세기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스타일이다.


미라콜리 성당은 제단 위에 걸린 그림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해서 ‘기적의 성모 마리아’라는 이름을 얻었다. 포폴로 광장의 서쪽 지역인 테베레 강 근처에 아치형 벽감(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었다. 지금의 비아 안젤로 브루네티 거리였다고 전해진다. 미라콜리 성당을 마주보고 섰을 때 오른쪽 골목인 비아 디 리페타 거리로 들어가 100m 정도 걸어가면 직각으로 꺾어지는 비아 안젤로 브루네티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이곳에 성모 마리아 그림이 걸려 있었다. 누가 언제 그렸고, 왜 거기에 걸어놓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325년 한 여인이 실수로 강에 아기를 떨어뜨렸다. 여인은 성모 마리아 그림으로 달려가 울부짖으며 기도를 드렸다. “성모 마리아님! 저는 수영을 못 합니다. 물에 빠진 아기를 구해주십시오.” 여인이 기도를 마치자마자 놀랍게 아기는 강변으로 밀려나와 목숨을 건졌다. 고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테베레 강에 떠내려가다 강변으로 밀려나와 목숨을 건진 일과 똑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여인은 살아난 아기를 안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성모 마리아 그림에 기도를 드렸더니 강에 빠진 아기를 구해주셨어요”라며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은 삽시간에 로마 전역에 퍼져나갔다. 이후 아기를 낳고 싶어 하는 여인, 병에서 낫기를 바라는 환자, 큰돈을 벌려는 사업가, 관직에 오르려는 청년 등 많은 로마인이 예배당에 몰렸다. 다들 성모 마리아 그림 앞에서 기도를 드리면서 소원을 빌었다. 사람들이 하도 몰려드는 바람에 벽감 자리에 예배당이 건설됐다.


1530년 테베레 강이 범람해 예배당은 물바다로 변했다. 성모 마리아 그림은 인근의 산 자코모 성당으로 옮겨졌고, 원래 자리에는 모작품이 걸렸다. 이 때문에 성모 마리아 그림은 두 개가 됐다. 하나는 미라콜리 성당에, 다른 하나는 산 자코모 성당에 걸려 있다.


미라콜리 성당의 돔 주변에는 석상 10개가 세워져 있다. 8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성인 8명을 새긴 석상이다. 성모 마리아 그림이 있던 예배당을 관리했던 성 프란체스코 제3수도회 관련 성인들이다. 성당 내부 주 제단 위에 걸린 그림이 바로 테베레 강에 빠진 아기를 살린 성모 마리아다. 그림은 애디쿨레라고 불리는 작은 건조물 안에 들어가 있다. 애디쿨레는 검은색 코린트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 4개로 이뤄져 있다.


몬테산토 성당 건설은 16세기 카르멜라이트 수도회 개혁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카르멜라이트 수도회는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12세기 무렵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로마 가톨릭 은둔자 모임이었다. 이들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인 카르멜 산(가르멜 산)에 살았다. 아랍어로는 마르 엘리아스 산이었다. 그래서 카르멜라이트 수도회라는 이름을 얻었다.


가톨릭쉐어닷컴이라는 종교 사이트에 따르면 카르멜라이트 수도회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수도한 데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엘리야의 삶에서 영감을 얻은 사람들이 이 산에서 기도와 명상의 삶을 이어갔다. 이들은 산의 여러 동굴에 살면서 스스로 ‘은둔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은둔자들은 카르멜 산에 예배당을 하나 지었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첫 예배당이었다.


은둔자들을 모아 수도회를 만든 것은 13세기 초였다. 당시 이탈리아에 알베르투스라는 사제가 있었다. 그는 종교법학자이면서 보비오와 베르첼리 주교였으며, 교황 클레멘스 3세(재임 1187~91년)의 외교관 역할도 맡았다. 나중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재임 1198~1216년)는 그를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임명해 교황 대리인 역할을 맡게 했다. 알베르투스는 1209년 카르멜 산에서 살던 수도사들을 이끌어 카르멜라이트 수도회 창립에 앞장섰다. 그는 ‘성 알베르투스의 카르멜라이트 규칙’이라고 불리는 수도회 규정도 만들었다.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손에 들어가자 카르멜라이트 수도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탈리아 등 유럽 도시를 떠돌면서 탁발 수도사로 변신했다. 처음에는 엄격한 옛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문명화된 도시에서 살기에는 규정이 너무 엄격했다. 수도회는 1432년 이전의 생활방식 규정을 완화하기로 하고 교황의 승인까지 얻었다.


규정 완화는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원래의 엄격한 방식을 지켜야 한다는 수도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단체는 1560년 스페인에서 탄생한 ‘맨발의 카르멜라이트 회’였다. 그들은 나중에는 별개의 수도회로 발전했다. 다른 곳에서도 크고 작은 개혁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특히 이탈리아 북부의 만투아, 시칠리아의 몬테산토에서 그런 움직임이 돋보였다.


1618년 칸타니아 출신의 수사 데시데리오 플라카가 새로운 카르멜라이트 수도회를 만들었다. 성 알베르투스가 만든 원래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수도원을 차렸다. 플라카가 만든 수도회는 ‘몬테산토의 카르멜라이트‘ 또는 ‘카르멜리타니 델 프리모 이스티투토’라고 불렸다.



수도회는 1640년 교황으로부터 로마에 수도원을 세워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들은 포폴로 문 근처에 정착했다. 현재 몬테산토 성당 자리 또는 그 근처였다. 처음에는 세든 집의 방 하나를 작은 예배당으로 만들어 수도원을 시작했다. 이곳이 발전해 추기경 가스탈디가 지은 성당으로 변한 것이었다.


몬테산토 성당 설계에는 당대 최고 건축가 겸 조각가 베르니니가 깊이 관여했다. 원래 몬테산토 성당은 미라콜리 성당처럼 원형으로 지으려고 했다. 이때 베르니니가 타원형을 제안했다. 성당 부지가 미라콜리 성당보다 좁아 원형으로 짓기는 어렵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부지가 좁았던 것이 정말 성당 모양을 바꾼 이유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일부 역사학자는 다른 이유 두 가지를 내세운다.


먼저 타원형으로 지으면 예배당을 두 개 더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수도사들이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 제단이 총 7개로 늘어나게 되기 때문에 타원형을 골랐다는 이야기다. 또 베르니니는 똑같은 원형 성당 두 개를 나란히 지으면 재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래서 하나는 원형, 나머지 하나는 타원형으로 건설하는 게 나을 거라고 봤다는 것이다.


몬테산토 성당에서 출발하는 비아 델 바부이노 거리는 18세기 스페인계단이 만들어진 뒤에는 많은 예술가가 모여 활동하는 구역으로 발전했다. 19세기에는 예술가 거리로 명성을 높이게 됐다. 성공을 꿈꾸는 예술가들은 스페인계단을 야외 전시관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어 후원자를 얻기를 기대했다.


스페인계단 일대에는 성당이 하나뿐이었다. 산타타나시오 아 비아 델 바부이노 성당이었다. 이곳은 그리스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 예술가들은 몬테산토 성당에 모이게 됐다. 유명한 예술평론가 몬시뇨르 에니오 프란시아는 1953년 매주 일요일 이 성당에서 ‘예술인들을 위한 미사’를 시작했다. 이 전통은 한동안 이어졌다. 성당은 ‘예술인의 성당’이라는 뜻인 치에사 데글리 아티스티라는 이름을 얻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