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광장

난파선 분수에 예술과 낭만이 흐르면

by leo


포폴로 광장에서 베네치아 광장 쪽으로 코르소 거리를 10분 정도 걷다 보면 왼쪽으로 번화한 골목이 나온다.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이며, 많은 관광객의 발걸음을 잡아당기는 곳이다. 각종 명품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밀라노의 몬테나폴레오네 거리와 함께 이탈리아 패션산업의 중심지라고 불리는 비아 콘도티(콘도티 거리)다. 로마에서 쇼핑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가볼 만한 곳은 넘쳐난다. 하지만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꼭 빼놓지 말고 가야할 곳을 고른다면 바로 이 거리다.



비아 콘도티를 따라 가면 끝부분에 너른 공간이 나타난다. 원래는 트리니타 광장으로 불렸지만 15세기 스페인 대사관이 자리 잡은 이후에는 스페인 광장으로 이름이 바뀐 곳이다. 이곳은 15~18세기에는 로마를 찾는 방문객들이 가장 먼저 가는 장소였다. 외국 여행객이나 순례자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에 오느라 오랜 시간 동안 고생했던 외지인들은 이곳에서 싸고 안락한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이곳을 ‘이방인의 지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7세기 영국 작가 존 에블린은 내전을 피해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포폴로 문을 통해 스페인 광장에 도착한 그는 일기에 기록을 남겼다. ‘1644년 11월 4일 오후 4시쯤 로마에 도착했다. 편안한 숙소를 어떻게 구할지 걱정이 됐다. 그래서 말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한 사내가 나를 스페인 광장에 있는 프랑스인 프티 씨의 집으로 안내했다. 무척 기뻤다. 주인과 협상해서 한 달에 20크라운을 주기로 했다. 방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온몸이 축 처진 나는 곧장 침대로 갔다.’


19세기 영국 소설가 겸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메이크피스 태커레이는 1855년에 출판한 『뉴컴스(신참)』라는 책에 스페인 광장에서의 경험을 적었다. ‘로마에서 벌어지는 각종 종교 행사에 참가하거나 다양한 축제를 즐기기 위해 많은 외국인이 12월~이듬해 4월에 로마를 방문했다. 이 때문에 매년 겨울 로마에는 아주 즐겁고 활기에 찬 영국인 집단 거주지가 생기기도 했다. 이들은 매일 똑같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거나, 핀키우스 언덕을 둘러보기도 하고, 종교 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스페인 광장에는 영국인 전용 서재도 있었다. 이곳에는 매주 열리는 다양한 행사를 소개하는 플래카드가 걸리기도 했다. 어떤 날은 바티칸 박물관이 문을 여는 날, 다음 날은 성 누구누구의 축제일, 수요일에는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에서 열리는 음악회나 저녁기도회 등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카이사르의 도시, 위엄 있는 교황의 성당이 넘쳐나는 도시, 훌륭한 경관과 축제의 도시는 모든 것을 영국의 이탈자들을 위해 계획되고 조정되는 곳이다.’


스페인 광장의 모양은 독특하다. 난파선 분수와 성모의 원주 사이의 한 점을 두고 이등변 삼각형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이다. 과거에는 스페인 대사관과 성모의 원주가 있는 남쪽 부분만 스페인 광장이라고 불렀다. 프랑스 대사관과 스페인 계단, 트리니타 데이 몬티(삼위일체) 성당이 있었던 북쪽 부분은 프랑스 광장이라고 불렀다. 로마를 둘러싼 두 나라의 주도권 싸움의 역사가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 광장이 지역 전체를 다 아우르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옛날 여인숙이 있던 곳은 유명 상점으로 모두 변했다. 과거 잠자리를 찾던 나그네를 끌어들이던 곳이 이제 유명 상품이나 식당을 찾는 사람을 유혹하는 장소로 바뀐 것이다. 물론 과거처럼 지금도 많은 외국 관광객은 물론 로마의 청춘 남녀들은 낭만과 여유가 흘러넘치는 이곳을 즐겨 찾는다.


스페인 대사관


이슬람세력을 그라나다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직전인 1478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2세 국왕과 이사벨라 여왕은 종교재판을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가톨릭 정통주의를 유지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종교재판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면 교황청과의 긴밀한 관계가 필수적이었다.


스페인은 교황청과의 외교적 활동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페인은 1480년 곤살로 데 베데타를 외교관으로 임명해 로마에 보냈다. 이렇게 해서 베데타는 세계 최초의 상주 외교관, 교황청 주재 스페인 대사관은 세계 최초의 대사관이라는 명예를 얻게 됐다.


베데타는 산티아고 기사단 소속 종교인이었다. 이 기사단은 12세기에 창설된 종교, 군사 조직이었다. 이름은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산티아고(성 야고보)에서 따온 것이다. 이름에 걸맞게 기사단의 주요 활동은 산티아고로 순례를 가는 기독교도를 보호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1493년 기사단 단장인 알론소 카르데나스가 사망하자 페르디난드 2세 국왕과 이사벨라 여왕은 기사단을 스페인 왕실 산하 단체로 편입시켰다.


베데타는 스페인과 교황청 사이에서 중요한 협력 사업을 여러 개 일궈냈다. 교황청은 그라나다 전쟁,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세계 영토 분쟁에서 스페인을 지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또 스페인과 교황청은 신성동맹을 창설해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동방의 오랜 강국인 오스만 투르크를 누르고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스페인이 ‘교황청의 맏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중요한 나라가 되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는 스페인에 교황청 외교 대표관을 파견했다. 1506년에는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13년)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 주재 대사관을 새로 짓기도 했다.


스페인은 1622년 대사관 관저로 사용하기 위해 트리니타 광장에 있는 모날데시 가문의 대저택을 임대했다. 모날데시 가문은 원래 이탈리아 중부 도시인 오르비에토의 전통적인 귀족 가문이었다. 스페인이 임대할 무렵에는 상당히 쇠락한 상태였다.


25년 뒤인 1647년에 부임한 교황청 주재 스페인 대사 이니고 벨레스 구에바라는 이탈리아 중개인 베르나르디노 바르베르를 활용해 모날데시 가문의 저택을 사기로 했다. 외국인인 그가 저택을 바로 구입하면 바가지를 쓸 수 있기 때문에 중간에 바르베르를 끼워 넣은 것이었다.


구에바라는 먼저 교황청에서 저택 구매 허가를 얻어냈다. 당시에는 로마의 중요한 건축물을 사려면 누구라도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는 이어 바르베르에게 2만 2천 스쿠도를 주고 궁전을 사게 한 뒤 곧바로 금액을 조금 더 붙여 자신에게 팔게 했다. 구에바라는 나중에는 저택 주변에 붙은 건물 4개를 더 사들여 궁전을 확장했다.



7년 뒤에는 스페인 정부가 구에바라 소유로 돼 있던 건물을 사들였다. 펠리페 2세는 금화 1만 9천 듀캇(금 6.7㎏)을 들여 건물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했다. 이 건물을 영원히 스페인 대사관 건물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의 뜻대로 지금도 이 건물에는 바티칸 주재 스페인 대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 대사관이 안주한 역사는 벌써 50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이탈리아 주재 스페인 대사관은 보르게세 궁전에 들어가 있다.


스페인 대사관이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주변 지역은 트리니타 광장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 스페인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게 됐다. 스페인 대사의 후원 덕분에 대사관을 중심으로 광장 일대에서 각종 행사가 펼쳐진 덕분에 17~18세기에 로마에서 가장 호화로운 축제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대사관은 고대 로마와 기독교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고블랭 직물로 짠 17세기의 테피스트리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원래 볼로냐의 갈리에라 궁전에 살던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이 갖고 있던 테피스트리였다. 대사관 홀에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유권을 갖고 있는 페데리코 마드라조, 비센테 로페스 등의 유명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 조각 중에서는 1619년 지안로렌조 베르니니가 만든 ‘엘 알마 베아타’와 ‘엘 알마 콘데나다’가 눈에 띈다.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


15세기 이탈리아에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은둔 수도승 ‘파올라의 프란시스’가 있었다. 그가 이룬 기적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온 유럽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프란시스는 1464년 시칠리의 메시나로 건너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했다. 선장은 태워주지 않겠다며 탑승을 거부했다. 프란시스는 외투를 벗어 바닷물 위에 놓더니 소매 한쪽을 지팡이 끝에 묶어 마치 돛처럼 만들었다. 그가 올라타자 외투는 작은 돛단배가 되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다.


프란시스의 이종사촌 동생이 어린 나이에 눈을 감았다. 슬픔에 잠긴 이모는 조카에게 눈물을 쏟아내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동생의 시체 곁에서 여러 날 동안 밤낮 없이 기도를 드렸다. 며칠 뒤 놀랍게도 동생은 되살아나 엄마의 품에 돌아갈 수 있었다.


프란시스는 동물을 사람처럼 매우 아끼며 사랑했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안토넬라라는 이름을 가진 송어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송어를 아낀다는 사실을 몰랐던 신부가 연못에 있던 송어를 잡아 구워버렸다. 프란시스는 다른 수사를 보내 송어를 받아오게 했다. 신부는 화가 나서 구운 송어를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수사는 땅에 흩어진 송어의 살점과 뼈를 주워 돌아갔다. 프란시스는 송어의 살점, 뼈 조각을 연못에 넣고 ‘안토넬라, 자비의 이름으로 기도하느니, 다시 생명을 얻도록 하거라’고 기도했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 송어의 살점과 뼈 조각이 한 곳에 모이더니 물고기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신나게 헤엄쳤다.


1483년 프랑스의 루이 11세 국왕이 중병에 걸렸다. 교황 식스토 4세(재임 1471~84년)는 프란시스를 프랑스에 보내 그의 병을 돌보게 했다. 프란시스는 국왕의 병을 치료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루이 11세는 그를 무척 존경하게 됐다. 아들 샤를 8세도 마찬가지였다. 종교인은 아주 검소하고 궁핍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아주 엄격한 고행을 직접 실천한 프란시스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프란시스는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국왕 자리에 오른 샤를 8세는 물론 그의 뒤를 이은 루이 12세도 그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은 프란시스를 자문 겸 영적 스승으로 삼아 파리에 붙들어두었다. 결국 프란시스는 살아서 귀국하지 못하고 1507년 프랑스의 라리쉬에서 눈을 감았다.


프란시스는 살아 있을 때 로마의 핀키오 언덕에 있던 땅을 교황청 학자인 에라몰라오 바르바로에게서 매입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가 직접 산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수도사에게 땅을 살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샤를 8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자 존경하는 수도사를 위해 스페인 광장 언덕의 포도밭을 대신 사 준 것이었다. 프란시스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로부터 허가를 받아 1492년 포도밭을 허물고 대신 미니마이트 수도회를 위한 수도원을 지었다. 이 자리가 종교적 목적으로 활용된 최초의 일이었다.


샤를 8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이 된 루이 12세는 1501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나폴리 왕국을 손에 넣었다. 그는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미니마이트 수도원에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고딕 첨탑을 갖춘 프랑스 양식의 건물이었다. 나폴리 침공에 반대한 다른 나라의 반발 때문에 프랑스 군대가 로마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성당 공사는 곧바로 중단되고 말았다.


좀체 완성되지 못하던 성당은 80여 년이 지난 1585년에야 겨우 봉헌식을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스페인 광장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이다. 이곳에는 뾰족한 탑이 두 개 서 있다. 이전에는 두 첨탑에 시계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시간을,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시간을 안내하는 시계였다. 지금은 시계가 하나만 남아 있다. 물론 이탈리아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다.


로마의 어지간한 장소에 가면 다 그렇듯이 이 성당 앞에도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름은 오벨리스크 살루스티아노다. 이 오벨리스크는 다른 것들처럼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은 아니다.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흉내 내 고대 로마시대에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살루스티아노 정원에 세워져 있었지만 1789년 교회 앞으로 옮겼다. 이 오벨리스크에 있는 상형문자는 포폴로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의 상형문자를 베낀 것이라고 한다.


트리니타 데이 몬티 교회는 2005년까지만 해도 프랑스 종교단체였던 ‘신성한 심장의 재단’에서 위탁 운영했다. 이 단체는 교회를 젊은 여성 교육을 위해 활용했다. 2006년 9월부터는 교황청과 프랑스 정부의 합의에 따라 교회를 ‘예루살렘 수도사회’에서 맡게 됐다. 도시에서 수도사 정신을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프랑스 종교단체라고 한다.


스페인 계단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에서 스페인 광장으로 가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이 일대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페인 계단이다. 특히 아젤리아가 많이 피는 5월에 가장 풍광이 멋지다. 여름철이면 수많은 여행객이 계단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때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오드리 헵번이 이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를 본 청춘남녀들이 너나할 것 없이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바람에 인근 거리가 너무 지저분해졌다. 그래서 로마 시청은 이후 스페인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이나 음식을 먹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스페인 계단이 만들어진 것은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 때문이었다. 교회가 생긴 이후 언덕 아래쪽 스페인 광장과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스페인 광장 인근에 교황청이 있었다. 교황청 관계자들은 성당에 갈 때마다 미끄러운 언덕 때문에 불편을 겪었다.


추기경 마자린이 교황청과 프랑스 정부 사이에서 중재를 섰다. 그는 교황청에 “루이 14세 국왕 동상을 세우게 해주면 프랑스 정부가 돈을 내 교회와 스페인 광장을 연결하는 계단을 만들어 주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교황은 “교황청보다 높은 언덕에 프랑스 국왕의 동상을 세울 수 없다”며 반대했다.


얼마 후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자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프랑스 귀족인 에티엔 귀피에가 공사비를 기증한 것이었다. 스페인 계단 입구에는 낮은 기둥과 공 모양 장식품이 있다. 여기에는 프랑스 왕가 문양과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13세(재임 1721~24년)를 상징하는 사자상이 새겨졌다. 프랑스와 교황의 화해를 이런 식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계단은 프랑스 사람이 돈을 내 만들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스페인 계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이름이 왜 이렇게 붙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아래쪽이 스페인 광장이어서 사람들이 착각해 스페인 계단으로 불렀다는 게 일반적인 추정이다.


스페인 계단은 워낙 세계적인 명소여서 여러 가지 해프닝이 자주 일어나고 각종 기념행사도 많이 열린다. 2008년 1월에는 이탈리아 예술가 그라지아노 세치니가 버마의 소수민족인 카렌족이 겪는 차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스페인 계단에 수십만 개의 컬러 공을 설치하는 이벤트를 펼쳤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이었던 2009년 11월에는 베를린 장벽 복제품이 설치되기도 했다.


스페인 계단에 앉아서 스페인 광장을 내려다보면 바로 눈앞에 유명한 ‘난파선의 분수’가 보인다. 처음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를 만든 로렌조 베르니니가 제작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나중에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가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아버지가 대부분을 제작했고, 아들 베르니니는 마무리 손질만 했다는 것이다.


베르니니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지시를 받아 고대 로마의 수도인 아쿠아 비르고에서 공급받은 물을 로마 곳곳에 배분하는 분수 설치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스페인 광장의 분수였다. 지금도 분수의 물은 마실 수 있다. 관광객들은 여기서 손을 씻기고 하고 뿜어져 나오는 물을 직접 먹기도 한다.



분수는 다 부서진 배 모양을 하고 있어서 ‘난파선의 분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렇게 만들도록 지시한 사람은 교황 우르바노 8세(재임 1623~44년)였다. 거기에는 사연이 담겨 있다.


테베레 강에 홍수가 발생했을 때 물이 스페인 광장까지 흘러들어와 광장도 1m 이상이나 물에 잠겼다. 시간이 흘러 물이 다 빠졌을 때 광장에는 다 부서진 배 한 척이 남아 있었다. 홍수 피해 현장을 둘러보던 교황은 강물에 떠내려 온 난파선을 보고 감동을 받아 분수 제작을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난파선의 분수’에는 빛나는 태양이 조각으로 장식돼 있다. 태양은 우르바노 8세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포폴로 광장에서 비아 델 바부이노 거리를 거쳐 스페인계단으로 이르는 공간은 18세기에 많은 예술가가 모여 활동하는 구역이었다. 성공을 꿈꾸는 예술가들은 스페인계단을 야외 전시관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어 후원자를 얻기를 기대했다. 스페인계단은 이런 예술가들이 고용해주기를 바라는 모델들이 대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로마를 여행했던 찰스 디킨스가 그들을 목격한 여행기를 남겼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그들의 얼굴이 왜 익숙하게 느껴지는지, 왜 모든 행동과 옷차림으로 나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지 알지 못했다. 머지않아 다양한 미술관의 벽에서 그들의 얼굴을 보았음을 알게 됐다. 한 늙은 신사가 있다. 길고 하얀 머리카락과 아주 짙은 수엽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로얄 아카데미의 카탈로그를 절반 정도는 독차지하고 있다. 그는 아주 우아하고 귀족스러운 모델이다. 늘 긴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푸른 코트를 입은 다른 사내도 있다. 항상 태양 아래 잠들어 있는 척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깨어 있다. 그리고 다리의 모양에 매우 신경을 쓴다. 무위의 즐거움을 잘 표현하는 모델이다. 갈색 코트를 입고 벽에 기대 서 있는 다른 사내도 있다. 언제나 팔짱을 끼고, 눈을 지그시 뜨고 있다. 구부정하고 창이 넓은 모자 아래로 눈이 보인다. 그는 암살자 모델이다.’


스페인계단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키츠-셸리기념관이다. 로마에서 세상을 떠난 영국 시인 존 키츠와 퍼시 셸리의 인생과 말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1821년 결핵으로 고생하던 키츠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로마에 건너와 스페인 계단 바로 앞의 집에 세를 얻었다. 그는 스페인 광장에 있는 난파선의 분수를 매우 좋아했지만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공동묘지에 있는 그의 비석에는 ‘여기 물에 이름을 새긴 사나이가 누워있다’고 새겨져 있다. 물은 난파선의 분수를 뜻한다.


당시 이탈리아 피사에는 키츠와 비슷한 나이인 셸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절친했던 키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도네이스』라는 애도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셸리는 키츠가 죽은 다음해인 1822년 7월 8일 배를 타고 가다 갑작스런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익사하고 말았다. 그의 무덤도 키츠와 같은 공동묘지에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80여 년이 흐른 1903년 로마를 여행하던 미국 시인 로버트 언더우드 존슨이 스페인 계단을 둘러보다 키츠가 살았던 집에 들어가게 됐다. 집의 사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미국과 유럽에 사는 지인들을 모아 ‘키츠-셸리기념협회’를 만들었다. 그는 집을 사서 기념관으로 만들기로 하고 협회를 중심으로 기금 모금 운동을 벌였다. 소식을 들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에드워드 7세 국왕도 지갑을 풀었다.


존슨과 협회의 노력은 3년 만에 열매를 맺었다. 이들은 1906년 12월 30일 성금 1만 4천 달러와 은행 대출금 8천 달러 등 2만 2천 달러를 주고 집을 매입했다. 이어 대대적인 수리를 실시한 뒤 ‘키츠-셸리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대중에게 개방했다. 셸리는 이 집에서 살지 않았지만, 키츠의 절친한 친구인데다 키츠와 같은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기념관 헌정식은 1909년 4월 3일 당시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등 유럽의 많은 유명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키츠‧셸리기념관은 키츠-셸리기념협회가 관리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키츠, 셸리와 관련된 여러 자료는 물론 바이런, 워즈워드, 로버트 브라우닝, 오스카 와일드 등 유명 시인들의 작품과 그림도 다수 소장돼 있다. 기념협회는 키츠와 셸리의 무덤도 관리하고 있다. 매년 6월에는 키츠와 셸리의 문학적 업적을 널리 홍보하자는 취지에서 ‘키츠-셸리 프라이즈’라는 문학상 공모 행사도 열고 있다.


카페 그레코


스페인 광장으로 들어가는 콘도티 거리에는 유명한 카페가 하나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카페 그레코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 됐고, 이탈리아 전체를 통틀어서는 베니스의 카페 플로리안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카페다. 카페 그레코는 그리스 출신이었던 니콜라 델라 마달레나가 1760년에 만든 가게다. 그리스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그레코’라는 이름이 붙었다.


카페 그레코는 스탕달, 괴테, 쇼펜하우어, 바이런, 리스트, 키츠, 입센, 안데르센, 멘델스존 등 유명 예술인, 학자들이 단골로 드나들면서 유명해졌다. 유명 배우들도 단골이었다. 오드리 헵번, 소피아 로렌,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었다. 지금은 작고한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도 로마에 가면 늘 이곳을 찾았다. 지금도 명사들이 자주 들르는 장소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에는 유명 예술인뿐만 아니라 돈이 없던 가난한 예술인들도 드나들었다. 그들은 돈이 없어 카페 그레코에서 아무 것도 사먹거나 마시지 못했다. 데 곤코츠라는 사람은 “그들이 소비했던 것은 시나몬 물과 난로뿐이었다”고 말했다. 예술가들은 카페를 공짜로 사용한 대신 가끔 그림 등을 남겼다. 또 다른 예술인에게 남기는 메시지나 고향 주소를 적어 놓기도 했다. 작품과 메시지는 아직도 카페 실내를 장식하고 있다. 카페 그레코는 그들이 남긴 그림, 드로잉, 조각 등을 1980년대 후반에 사진으로 찍어 카탈로그로 만들었다. 작품은 무려 150여 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술인들의 집결지로 유명해지자 카페 그레코는 1800년대 각종 로마여행 안내서적에도 단골로 등장했다. 1869년에 발간된 로마를 소개하는 책 『머레이의 핸드북』이 대표적이다. ‘카페 그레코는 콘도티 거리에 있는 카페다. 모든 나라의 예술인들이 모이는 장소다. 로마에 있는 모든 예술인이 매일 이 집에 모이는 것 같다. 대개 오전 7시 아침식사 때나 저녁에 그들은 모인다.’


화가 제임스 에드워드 프리먼은 1877년 펴낸 여행기에서 카페 그레코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 커피숍은 여행서적, 편지, 신문에 너무 자주 소개돼 유럽이나 미국에서 어지간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1909년 로마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카페 그레코 단골이었던 대학교수 조바니 스감바티는 피사에 있었다.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마의 친구에게 바로 편지를 썼다. 친구 페데리코 구비넬리는 답장을 보냈다. ‘카페 그레코는 여전히 튼튼하다네. 이정도 지진으로는 이곳을 부술 수 없지.’


카페 그레코에 가본 예술인이 모두 그곳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을 아주 가끔 갔던 작곡자 멘델스존은 이곳을 매우 싫어했다. ‘카페 그레코에 가는 사람들은 구역질난다. 만나면 저질스러운 농담이나 나눈다. 그들이 데리고 오는 개는 온갖 해충들을 이곳저곳에 옮기고 다니느라 바쁘다. 방은 작고 어둡다. 한쪽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있어 연기가 실내를 가득 메워 숨 쉬기도 곤란하다.’


카페 그레코는 250년 이상 영업하면서 많은 위기를 겪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은 물론 다양한 정치적 격변도 경험했다. 최근에는 가게 문을 닫을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시작은 2017년 9월이었다. 카페 그레코는 남의 건물에서 임대로 영업을 해 왔다. 임대 기간이 2년 전에 끝났는데 건물 주인이 임대료를 크게 올리겠다고 통고한 것이었다.


건물 주인은 민간 병원인 ‘이스라엘 병원’이다. 카페 그레코는 당시까지만 해도 월 임대료로 1만 8천 유로를 냈다. 그런데 병원 측은 12만 유로로 인상하겠다고 통고했다. 카페 그레코는 그렇게 엄청난 돈을 낼 수는 없다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건물 주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스라엘 병원은 80년 전 카페 그레코 건물을 물려받았다. 이 회사는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콘도티 거리에서 가장 비싼 건물에 자리 잡은 카페 그레코를 쫓아내고 이탈리아 고급 브랜드를 입점 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카페 그레코가 문을 닫을 위기에 몰리자 시민 단체가 나섰다. 문화유산 보호단체인 ‘이탈리아 노스트라’가 카페 그레코 지원 사격에 나선 것이다. 누가 돈을 얼마나 버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카페 그레코라는 문화유산이 사라지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카페 그레코의 가구와 각종 실내 장식품은 1953년 이후 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카페 그레코를 누가 운영하더라도 가구, 실내 장식품을 고치거나 뜯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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