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테온

범신전 또는 용비어천가?

by leo



피렌체 사람인 미켈란젤로는 누구나 다 아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예술가다. 그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조각 피에타, 바티칸의 천장벽화 천지창조,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조각 다비드상 등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연이어 만들었다.


미켈란젤로는 1546년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공사를 맡아달라는 교황 바오로 3세의 부탁을 받았다. 당시 건축가들은 대성당에 돔을 올리는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는 피렌체에 있는 두오모 즉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생각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지인으로부터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의 판테온 돔에 몰래 올라가 벽돌이 서로 완벽하고 견고하게 맞물려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두오모 돔에 적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직접 판테온에 가보기로 했다.


미켈란젤로는 사물을 볼 때는 항상 예술가의 눈으로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던 사람이었다. 어떤 일에 쉽게 감동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판테온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쉽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판테온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가 만든 것이군”이라고 말했다.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판테온은 한마디로 건축의 신비다. 고대 로마를 넘어 이탈리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건축물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콜로세움, 산탄젤로 성, 성 베드로 대성당 등 로마에는 훌륭한 건축물이 적지 않지만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기술적 창의성에서는 판테온을 최고 자리에 올려놓아도 무리는 아니다. 18세기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로마에서 판테온을 보고는 “고대 로마 유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여기에 들어와 있으니 로마 전성기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감탄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판테온에 대해 아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 이처럼 위대한 인류의 건축물을 어떤 천재 건축가가 설계했는지,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했던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비밀을 밝히려면 여러 파편들을 모아 퍼즐처럼 하나씩 맞춰나가며 상상을 보탤 수밖에 없다.



염소의 늪


판테온의 역사는 로물루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판테온과 로물루스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판테온이 건설된 자리는 로물루스가 죽었던 곳이다. 이런 장소에 신전인 판테온을 세운 것은 의도적이었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역사학자였던 티투스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가 쓴 『로마의 유적』 등 여러 역사책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로물루스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을 수 없다.


BC 753년 로마를 세워 초대 왕이 된 로물루스는 여러 전쟁에서 이겨 영토와 백성을 늘려나갔다. 권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 대부분 그렇듯이 세월이 흐르자 그는 변해갔다. 업적을 자랑하면서 교만에 빠졌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싫어하기 시작했다. 귀족으로 이뤄진 원로원이 더 그랬다. 그들은 초창기와 많이 달라진 왕을 신뢰하지 않았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는 『로마사』에서 ‘로물루스는 그의 모험에 동참한 병사에게는 친절했고, 땅과 전리품을 나눠주었다. 하지만 원로원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고 적었다.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38년이 되던 BC 715년 로물루스는 마르스 평원에서 군대를 열병하고 있었다. 당시 이곳은 ‘염소 늪’으로 불렸다.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번개가 몰아쳤고 세찬 소나기가 퍼부었다. 해는 빛을 잃고 캄캄해졌다. 갑자기 짙은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로물루스를 감쌌다. 너무 구름이 짙어 옆에 앉은 사람도 그 장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겨우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힌 뒤 사람들이 정신을 차려 보니 로물루스가 사라지고 없었다. 옥좌는 주인을 잃고 비어 있었다. 곁에 있었던 원로원 의원은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로물루스를 하늘 높이 데려갔다. 그는 땅에서도 어진 임금이었듯이 지금은 자비로운 신이 돼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로마인들은 갑작스럽게 왕을 잃은 슬픔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하늘이 데려갔다’는 원로원 의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궂은 날씨를 틈타 의원들이 왕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로마에 율리우스 프로클루스라는 남자가 있었다. 아주 현명하고 말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평소 중요한 문제에 훌륭한 조언을 잘 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로물루스가 사라져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며칠 뒤 민회에 나타나 로물루스를 만났다고 주장했다.


“로물루스가 오늘 새벽에 하늘에서 내려와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사라졌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인간 세상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이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신의 도리다. 하늘의 뜻에 따라 로마는 세계의 수도가 될 것이다. 로마인들에게 군인이 되는 법을 배우라고 하라. 그들에게 내 뜻을 전하라. 나는 신이 되어 로마를 지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로마인들은 프로클루스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들은 로물루스를 국부로 삼고 신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먼저 그에게 ‘마르스’라는 뜻인 퀴리누스라는 별칭을 선사했다. 당시 로마인들을 퀴리테스라고 불렀는데, 로물루스가 나라를 잘 다스렸기 때문에 퀴리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 창을 퀴리누스라고 부르는데 로물루스가 창을 잘 다뤘기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로마에 있는 퀴리날레 언덕의 이름은 퀴리누스라는 명칭에서 딴 것이다. 로마인들은 로물루스가 승천한 자리에는 작은 신전을 하나 지었다. 해마다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 로마 건국의 영웅에게 희생물을 바쳤다. 이곳이 바로 나중에 판테온이 들어선 장소였다.


로마의 2인자


판테온을 처음 건설한 사람은 마르쿠스 빕사니누스 아그리파였다. 고대 로마 제정의 첫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장군이면서 나중에는 사위가 됐던 사람이었다. 아그리파가 왜 로물루스의 전설이 서린 땅에 판테온을 건설한 것인지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아그리파는 BC 64~62년 사이 로마 외곽의 이탈리아 시골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들은 그의 고향을 다양하게 추정한다. 이탈리아 북부 피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르피노, 이스트리아, 아시시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고향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 별 볼일 없는 가문이었다는 점을 알려주는 방증이었다.


아버지는 공직 경험을 한 적이 없는 평민인 루키우스 빕사니우스였다.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나중에 로마로 이사했고 기사 계급으로 올라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빕사니우스 씨족의 조상이 어떤 내력을 갖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빕사니우스라는 성을 가진 로마인조차 드물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그리파는 이 씨족 이름을 버리고 싶어 했다.


아그리파에게는 같은 이름을 가진 형이 있었다. 형은 내전에서 동생과는 달리 율리우스 카이사르 반대편에 섰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패한 뒤 반 카이사르의 중심인물로 떠오른 소 카토가 아프리카로 달아났을 때 그의 형도 따라갔다. 카이사르가 소 카토 세력을 아프리카에서 격파했을 때에는 포로로 붙잡혀 로마로 끌려왔다. 아그리파가 친구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부탁해 카이사르에게 은전을 호소하지 않았다면 그의 형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한 살 차이 이내로 동년배였다. 둘은 함께 교육을 받았고 청소년기를 함께 보내며 친한 친구가 됐다. 기사계급 아버지를 둬 부자였던 옥타비아누스와 같은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걸 보면 아그리파의 집안도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이사르가 아그리파의 소질을 파악하고 발굴해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교육받게 했는지, 아니면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에게 친구를 소개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삼으면서 부족한 군사적 능력을 메워줄 친구로 아그리파를 붙여주었다. 그는 이후 평생 아우구스투스에게 훌륭한 친구이자 단 하나뿐인 오른팔이면서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장군으로 충성을 다하게 된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그리스 아폴로니아에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로 당장 달려가야 한다고 조언한 사람은 아그리파였다. 또 그는 악티움 해전뿐 아니라 여러 전쟁에서 연전연승함으로써 친구가 황제 자리에 올라 아우구스투스가 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아그리파의 조상은 원로원 계층이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우구스투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군대가 자신의 길이라는 사실을, 절대 로마에서 1인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아그리파는 차선을 선택했다. 황제의 오른팔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선택 덕분에 아그리파는 제국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알고, 황제에 가려져 평생 2인자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흔쾌히 받아들인 ‘고귀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세기 로마 역사학자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로마사』에 ‘아그리파는 분명한 개성을 가진 사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루 종일 잠을 자지 않아도, 어떤 위험에 빠져도 굴복하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 그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늦어지는 법을 알지 못했다. 복종심이 매우 강했지만 단 한 사람에게만 그랬다. 다른 사람에게는 명령하기를 좋아했다’고 기록했다.


아그리파는 수치스러운 경우가 생겨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BC 33년 아우구스투스가 그를 조영관 자리에 앉혔을 때가 그랬다. 조영관은 로마인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살피거나, 축제 등 각종 행사를 준비하는 직책이었다. 그는 4년 전 집정관 자리를 맡기도 했고, 시칠리아 전쟁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막강 해군을 눌러 아우구스투스에게 로마 정치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사람에게 집정관보다 서너 계단 밑의 자리인 조영관을 맡기는 것은 매우 이색적이었고, 어떻게 보면 모욕적이었다.


아그리파는 전혀 불평하지 않고 전쟁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조영관으로 일하는 동안 아쿠아 율리아를 새로 건설했고, 아쿠아 마르키아를 보수해 고질적인 로마의 물 부족 문제를 완벽하게 해소했다. 또 각종 도로와 하수구를 보수했고, 엄청난 규모의 검투사경기 등 다양한 행사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아그리파의 판테온


옥타비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올라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은 뒤 아그리파는 로마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당시 많은 로마 귀족이 그랬던 것처럼 공공사업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먼저 로마 최초의 대형 공중목욕탕인 아그리파 욕장을 건설했다.


아그리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건축물을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판테온이었다. 1~2세기 로마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는 『로마사』에서 ‘아그리파는 사재를 털어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다. 넵투누스 바실리카를 지었고, 라오코니아 김나지움도 건설했다. 그리고 판테온도 만들었다’고 적었다.


판테온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무찌른 직후인 BC 27~25년 사이였다. 완공한 것은 로마가 에스파냐를 완전 제패한 BC 19년이었다. 물론 이것은 모두 추정일 뿐 실제 언제 착공해서 언제 완공했는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판테온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여러 가지 견해가 엇갈린다. 이름과 건물 모양, 페디먼트 장식을 고려해볼 때 로마의 모든 신을 모신 범신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반면 그곳에서 어떤 신을 모셨는지 전혀 알려진 게 없다는 점에서 다른 목적을 가진 건축물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직까지 다수설은 판테온을 범신전으로 보는 시각이다. 당시 로마는 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 국가였다. 판테온은 로마의 모든 신을 모신 신전이었다는 것이다. 판테온이라는 이름을 분석해보면 ‘모든’이라는 뜻의 ‘판’과 ‘신전’을 뜻하는 ‘테온’이라는 그리스어로 구성돼 있다.


2세기 그리스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우스에 따르면 모든 신을 모시는 범신전은 고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지역 여러 곳에 존재했다. 그리스에 범신전이 다수 존재했다면 그리스문화를 흠모했던 로마인이 따라 건설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판테온 안에는 일곱 개의 제단이 설치돼 있었다. 그래서 태양계에 있는 일곱 개의 별 즉 헬리오스, 셀레네, 베누스, 마르스, 유피테르, 사투르누스에 바친 신전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돔을 막지 않고 구멍인 오쿨루스를 두어 하늘이 보이게 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번째 견해도 있다. 판테온은 카이사르를 낳은 율리우스 가문과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신격화하려고 만든 성소였다는 것이다. 판테온이라는 이름은 별칭이었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정식 명칭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건축의 용비어천가’였던 셈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로마에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주었고 새로운 지도자의 계보를 시작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가족만이 로마에 영원한 평화와 부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각인시키려 애썼다 이를 위해 다양한 선전 또는 홍보 도구를 사용했다. 여기에는 건축물도 있었고 문학도 있었다.


아그리파는 이러한 아우구스투스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트로이에서 건너온 베누스의 후손이었으며 제정 시대 초대 황제를 배출한’ 율리우스 씨족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건축물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이런 취지에 어울리는 장소를 고민하던 그는 로물루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염소 늪을 떠올렸다. 이곳에 신전을 지으면 제정 로마의 창시자 율리우스는 물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로마 건국의 영웅 로물루스와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1세기 로마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의 『자연의 역사』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처음에는 판테온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신전 한가운데에는 아우구스투스 동상을 설치하려고 했다. 카시우스 디오도 『로마사』에서 ‘아그리파는 판테온에 아우구스투스의 동상을 세워놓기를 원했다. 황제에게 그의 이름을 붙인 건축물을 가지는 영광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제안을 거절했다. 친한 친구이고 최측근 장군이 헌정하는 건축물에 이름을 내걸었다가는 로마인들로부터 오만하다는 비판을 받을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뜻을 이해한 아그리파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판테온에 베누스와 마르스 신의 동상을 세운 다음 두 동상 사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상을 세웠다. 주변에는 다른 신들의 작은 동상을 세웠다. 이어 로툰다(둥근 내부 홀) 앞의 전실에 아우구스투스 동상을 설치했다. 그 뒤에는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나에게는 황제와 같은 반열에 오르려는 욕심은 없고, 황제를 향한 끝없는 충성만 있다’는 걸 황제와 모든 로마인에게 보여주려는 게 목적이었을 거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측한다.


당시 기록에는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말리거나 책망하는 대신 더 격려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인들에게 들키지 않고 은근히 황제 신격화 홍보활동에 성공한 아그리파가 아주 고마웠을 것이다. 드러내놓고 칭찬하거나 상을 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책망하거나 말릴 이유도 없었다.


아그리파는 판테온에 무대장치를 만든 뒤 주기적으로 황제가 등장하는 행사를 벌여 로마인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신적인 지위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려고 애썼다. 무대 주변에는 베누스 여신 등 많은 신의 동상을 세워 황제가 신과 동격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판테온을 신전으로 보기 어렵게 하는 다른 기록도 있다. 하드리아누스가 새로 지은 판테온에서 재판을 진행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4세기 로마 역사학자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로마사』에서 ‘판테온 홀 벽감 여러 곳에 로마 황제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적기도 했다. 로마 시대에는 신전에 황제라 하더라도 석상을 세우는 것은 신성모독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면 판테온은 신전일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많은 역사학자는 판테온이라는 이름 때문에 판테온을 범신전으로 생각하지만 카시우스 디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판테온을 지었던 땅 인근에 각종 신의 동상이 많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판테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판테온의 돔이 천국을 닮았기 때문에 이름을 판테온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남겼다.


판테온을 정면에서 보면 사각형 건물처럼 보인다. 고대 정통 그리스 신전을 그대로 빼닮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딴판이다. 원통처럼 생긴 둥근 홀이 사각형 건물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마치 고대 로마 곳곳에 있던 목욕탕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새로 지은 판테온의 모양이다. 아그리파가 지은 원래의 판테온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정면은 그리스 식이었고 매우 작은 직사각형 건물이었다는 사실만 전해진다. 당시 포로 로마노 등 로마의 다른 지역에 있던 신전과는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신전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판테온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모양이 어떠했는지를 알 방법이 없다. 기록을 놓고 볼 때 몇 가지 객관적 사실만 알 수 있다. BC 1세기 후반 아그리파가 처음 건설했고 나중에 두 차례 화재로 소실됐다. 처음에는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보수했고, 2세기 초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새로 짓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재건축했는데 이를 ‘복원’이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3세기 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다시 일부를 복원한 다음 정면에 그 사실을 조그맣게 새겨놓았다.


하드리아누스의 판테온


19세기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현재 로마에 서 있는 판테온을 아그리파가 만든 원래 건물이었다고 믿었다. 판테온 정면에 ‘루키우스의 아들 아그리파가 이 신전을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1892년 발굴조사 결과 현재의 판테온은 트라야누스 황제 때 기초를 다지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건설한 새 건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판테온 곳곳에서 발견된 벽돌을 살펴본 결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고대 로마 벽돌에는 제작 연도가 찍혀 있는데, 판테온의 벽돌에 찍힌 연도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시대였다.


오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고 특히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포로 로마노에 있는 로마-베누스 신전을 비롯해 많은 건축물을 지었다. 판테온은 당시 매우 황폐해진 상태였는데, 하드리아누스가 로마의 모든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새로 지은 것이었다. 그는 선황이었던 트라야누스에게 헌정한 신전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지은 어떤 건축물에도 하드리아누스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판테온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19세기까지 오해를 불러온 이유였던 것이다.


직접 기본 설계안을 마련해 포로 로마노에 지은 베누스-로마 신전에서 드러나듯이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창의적인 황제였다. 그의 명령을 받아 판테온을 설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트라야누스가 가장 총애했고, 하드리아누스와는 사이가 나빴지만 당대 최고 건축가로 유명했던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루스가 설계했을 것이라는 게 가장 유력한 추측이다.


카시우스 디오는 『로마사』에서 ‘아폴로도루스가 하드리아누스의 (건축학적) 재능을 헐뜯었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쫓아냈다가 사형시켜 버렸다’고 기록했다. 이 때문에 19세기까지만 해도 ‘아폴로도루스가 판테온을 지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기록에서 하드리아누스가 아폴로도루스를 계속 중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둘의 불화설은 설득력을 잃어 버렸다.


트라야누스는 예술, 특히 건축에 조예가 깊어 여러 가지 공공건축물을 자비로 지었다. 그가 건설한 공공건축물은 트라야누스 욕장, 트라야누스 기둥, 트라야누스 포럼, 도나우 강의 트라야누스 다리, 알칸트라 다리 등이었다. 아폴로도루스는 트라야누스의 이름을 담은 여러 건축물을 설계하고 시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리아계 그리스인이었다. 처음에는 로마의 속주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건축가로 이름을 날렸다. 시리아에 주둔한 로마군에서 일하다 시리아 총독으로 온 트라야누스를 만나 건축가로서 꽃을 활짝 피우게 됐다. 당시 로마뿐 아니라 유럽에서 그만큼 건축 특히 복합건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건축가는 없었다.


최근 들어서는 아그리파의 판테온을 재건한 공로를 차지할 사람은 하드리아누스가 아니라 트라야누스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트라야누스가 설계는 물론 공사 대부분을 진척시켰고, 하드리아누스는 공사를 마무리하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아폴로도로스가 하드리아누스보다는 트라야누스와 더 호흡이 맞는 건축가였다는 점은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볼 만한 사실이다.


판테온의 눈


판테온의 핵심은 완벽한 원형을 이루는 지름 43.30m의 돔이다. 끝에는 지름 7.8m의 구멍인 오쿨루스가 있어 ‘판테온의 눈’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판테온 바닥에서 오쿨루스까지의 높이도 43.30m로 돔의 지름과 똑같다. 홀 바닥의 지름도 돔과 같은 43.30m다. 신원미상의 건축가가 균형미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돔에는 격자 같은 무늬가 붙어 있다. 격자는 모두 28개로 나뉘어 있다. 고대에 28은 이른바 ‘완벽한 숫자’였다. 당시에 알려진 완벽한 숫자는 28 이외에 6, 496, 8128뿐이었다. 원래의 수를 제외한 양의 곱하는 수를 모두 합하면 원래의 그 숫자가 나오는 게 완벽한 숫자다. 28을 예로 들면 1×28, 2×14, 4×7로 곱할 수 있다. 여기에서 28을 빼고 1, 2, 4, 7, 14를 더하면 28이 된다. 피타고라스와 그 추종자들은 완벽한 숫자에 우주와 관련된 신비한 종교적 의미가 숨어있다고 봤다.



판테온 건축가는 돔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없도록 매우 신경을 썼다. 그 중 하나는 재료였다. 돔 아랫부분에는 무거운 재료를 썼지만 위로 갈수록 가벼운 재료를 사용했다. 돔의 두께도 달리 했다. 아랫부분의 두께는 6m이지만 가장 윗부분 두께는 2.3m에 불과하다. 구멍 오쿨루스를 낸 것도 돔의 하중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돔은 콜로세움, 수로 등 당시 로마 건축물에 많이 썼던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아주 가볍고 밀도가 낮은 화산암과 화산암재를 섞어 여섯 겹으로 구성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로마 건국기념일인 매년 4월 21일 정오가 되면 거대한 돔의 둥근 구멍인 오쿨루스를 통해 태양빛이 사선으로 내려와 판테온 출입구를 비추게 된다는 점이다. 특이하게도 이날은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날이었다. 역대 황제는 이날 판테온 입구에 서서 로마 탄생을 축하하는 위대하게 의도된 신비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2세기에 살았던 미지의 건축가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돔을 왜 판테온에 올린 것이었을까?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였을까? 16세기의 대 건축가 미켈란젤로조차 부담감을 느꼈던 돔을 그보다 1천400년 전에 어떻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아쉽게도 그 이유를 담은 기록은 남은 게 없어 아무도 알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돔을 만든 이유는 추정만 해볼 수 있다. 19세기 독일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은 『로마사』에서 ‘(초창기 이탈리아 건축물은)바닥에 빗물받이를 두고 천장 구멍을 설치해 집안 연기가 빠져나가고 채광이 되게 했다. 그을린 지붕 아래에서 음식이 준비되고 식사가 이뤄졌다. 이곳에 가족의 신주가 모셔졌고 신방과 망자의 관이 설치됐다’라고 적었다.


로마인들은 신전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도 비슷하게 행동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신전 안에서 동물을 잡아 구웠다. 판테온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제사가 진행됐다. 연기는 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구멍인 돔의 오쿨루스로 빠져 나갔다. 비가 내리더라도 돔 중앙 부분만 피하면 비를 맞지 않았다. 빗물은 초창기 라틴 사람들이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볼록한 바닥에 떨어지면 땅 밑으로 연결된 하수관을 통해 배출됐다.


‘모든 신의 집’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돔은 원래 금으로 도금했다. 지금은 모두 다 벗겨지고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월이 흐르면서 약탈당한 것이다. 7세기 황제 콘스탄스 2세가 로마에 온 길에 모두 뜯어가 지금은 남아 있는 게 없다. 무게가 20t이나 나가는 입구의 청동문도 원래 금으로 도금돼 있었지만 역시 약탈당해 청동만 남았다.


판테온 벽도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두께는 무려 7.5m다. 콘크리트를 사용한 덕분에 벽을 파내 벽감이나 대형 애프스를 만들기에 편리했다. 애프스는 교회 등에 있는 반원형 부분이다. 하드리아누스는 판테온에서 수시로 재판을 열었는데 그때마다 애프스에 앉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판테온에 들어가려면 아주 큰 이집트 대리석으로 만든 코린트식 기둥이 달린 포르티코 (기둥을 받쳐 만든 건물 입구) 회랑만 지나면 된다. 하드리아누스가 판테온을 새로 만들었을 때의 구조는 그렇지 않았다. 판테온에 입장하려면 아주 긴 정원과 앞마당을 지나고 적지 않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지금 정원과 앞마당, 계단은 지하에 파묻혀 있다.


포르티코 기둥은 고대 이집트의 사막 지대에 있던 유명한 채석장인 몬스 클라우디아누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돌을 캐서 기둥으로 만들어 채석장에서 100㎞ 떨어진 나일 강까지 나무 썰매로 옮긴 뒤 강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는 배로 운반했다. 거기서 다시 초대형 배에 실어 로마로 옮겼다. 높이 11.5m인 기둥은 모두 16개인데 각각의 무게는 무려 50t에 이른다.


판테온의 정면 페디먼트는 비어 있다. 과거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타이탄의 전쟁을 묘사한 조각이 붙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1세기 로마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의 『자연의 역사』에는 ‘판테온에 있는 비너스 동상의 귀에는 귀걸이가 달려 있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서 뺏은 진주로 만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지금은 진주 귀걸이는 물론 동상도 사라지고 없다.


전실 벽은 아테네의 디오게네스가 만든 각종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플리니우스는 『자연의 역사』에서 ‘키리타데스 기둥도 있었다’고 적었다. 키리타데스는 그리스 신전에서 기둥 역할을 하는 여성 모습의 동상이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에렉테이온 신전이 대표적이다.


판테온 앞의 너른 광장은 피아자 델라 로툰다다. 로툰다는 판테온을 의미한다. 따라서 피아자 델라 로톤다는 판테온 광장인 셈이다. 광장에는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원래는 이집트 헬리오폴리스의 라 신전 앞에 있던 것이었다. 높이는 6m에 이르며 여러 상형문자로 덮여 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코르소 거리와 판테온 사이에 있는 산 마쿠토 광장에 세워져 있었는데, 교황 클레멘스 11세(재임 1700~21년)가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


광장 주변에는 식당, 바, 카페 등이 많다.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인 지올리토도 인근이다. 돈이 없는 배낭여행객은 오벨리스크 앞 분수에 앉아 빵과 물로 배를 채운다. 여름에 판테온을 여행하는 사람은 분수 앞에서 쉬면서 시원하게 목을 축인다. 물이 나오는 수도가 있기 때문이다. 분수는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재임 1572~85년)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교회로 변한 판테온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한 뒤인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지시에 따라 이교도 제례 의식은 금지됐다. 대부분의 이교도 신전은 폐쇄됐다. 판테온도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후 7세기 초까지 판테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찾아가는 사람이 없어 기록도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에 판테온 주변이 매우 황폐해졌을 거라고 추측한다. 판테온의 정원과 앞마당, 계단 그리고 주변 건물이 무너져 땅에 묻힌 것도 이 때였을 것이라고 본다.


7세기 초 비잔틴제국 황제 포카스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교황 보니파시오 4세(재임 608~615년)의 요청을 받아들여 판테온을 교회에 선물했다. 교황이 왜 판테온을 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새로 교회를 지을 돈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교황이 판테온의 웅장하고 성스러운 모습에 매혹 당했을지도 모른다.


판테온은 곧바로 교회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이름이 ‘산타 마리아의 로툰다’였다. 나중에는 ‘성모 마리아와 모든 순교자를 위한 교회’로 바뀌었다. 안쪽에는 제단이 설치됐고 성모 마리아와 예수 조각상도 세워졌다. 교황은 사순절 기간에 이곳에서 특별 미사를 개최했다. 고대 로마의 대다수 신전이 파괴돼 사라졌지만 판테온이 부서지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봉헌식이 마무리돼 갈 무렵 판테온 곳곳에 숨어 있던 많은 악마가 뛰쳐나왔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악마였지만 고대 로마인이 보기에는 신이었다. 악마들은 판테온 밖으로 달아나려고 머리에 달린 뿔로 건물 곳곳을 들이받았다. 원래 판테온 꼭대기는 돔이 아니었고, 황금으로 만든 솔방울이 덮여 있었다. 악마들이 난리를 피우는 와중에 지붕에 있던 솔방울이 부서져 떨어지는 바람에 큰 구멍이 생겼다. 오쿨루스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설은 전한다. 판테온이 있는 로마의 행정구역은 피그나 9구다. 피그나는 이탈리아어로 ‘솔방울’을 뜻한다. 피그나 9구의 상징도 솔방울이다.


보니파시오 4세가 봉헌식을 거행할 때 마차 28대 분량의 순교자 유해를 판테온으로 옮겼다는 전설도 생겼다. 로마의 카타콤베에 묻혀 있던 초기 기독교 순교자의 유해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당시까지도 숨진 사람을 시내에 묻는 것은 로마에서는 금기시되는 전통이었기 때문에 잘못된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유해가 로마 시내에 안치됐다는 첫 역사적 기록은 640년 무렵에 나오지만, 이런 일이 일반화된 것은 8세기 이후부터였다. 물론 앞으로 판테온 지하 등에서 발굴 작업 등이 추가로 이뤄질 경우 이 전설이 사실로 밝혀질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판테온은 건설한 지 2천 년이나 됐는데 전혀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신기했던 중세시대 기독교도는 고민 끝에 ‘판테온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있어 튼튼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현대 학자들은 과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하자면 고대 로마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그렇다고 본다. 논리적으로 판단하자면 과학을 믿어야 하지만, 그래도 신이 보호해준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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