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나 광장

교황 가문의 영광을 위해

by leo


나보나 광장에 어둠이 내리깔린다. 아직 하늘은 푸르스름한데 손톱만한 초승달이 떠올랐다. 이국에서 보는 매우 특이한 풍경이다. 가로등이 하나둘씩 불을 밝힌다. 언제 모였는지 이곳저곳에 거리의 화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려주거나 팔고 있다.


여러 골목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나오고 들어가고를 반복한다. 이곳이 로마여행의 주요 경로임을 입증해주는 장면이다. 테베레 강을 건너 산탄젤로 성을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근처에는 판테온이 있고, 선물로 주기 딱 좋은 화장품 등을 파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도 있기 때문에 로마 여행객들로서는 최고의 행선지다.


광장 주변에는 카페나 식당이 즐비해서 점심이나 저녁을 즐기는 데에도 최적의 장소다. 테이블에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 한 잔을 올려놓는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오가는 현지인들과 얼굴에 웃음을 가득 채우고 돌아다니는 외국 관광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사람 구경을 한다는 것은 이색적인 재미를 준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나보나 광장은 고대 로마 초창기에는 마르스 평원의 왼쪽 귀퉁이에 있던 지역이었다. 평소에는 사람 흔적도 보기 힘든 곳이었다. 마르스 평원은 캄피돌리오 광장이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 이탈리아 정부 건물이 있는 퀴리날레 언덕, 포폴로 광장 자리인 핀키오 언덕과 테베레 강 사이에 놓인 너른 땅을 말한다. 산탄젤로 성 앞에서 ‘ㄷ’자 모양으로 굽이도는 테베레 강 앞으로 툭 튀어나온 땅이다.


마르스 평원은 처음에는 소나 양을 풀어 키우던 목초지였다. 일부에서는 곡식을 심기도 했다. 로마의 젊은이들이 운동을 즐기거나, 군인들이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민회나 백인대 투표 장소나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의 집결지로도 이용됐다. 백인대 투표가 열리던 장소는 오빌레라고 불렸는데, 원래 이 단어의 뜻은 ‘양 우리’였다. 마르스 평원이 소, 양에게 풀을 뜯기던 장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를 알 수 있다.


마르스 평원은 로마의 신성한 경계인 포메리움 바깥이었다. 집정관은 로마 시내를 벗어나 포메리움을 지나 마르스 평원에 가면 아무런 법적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다.


BC 3세기 말에 벌어졌던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마르스 평원에는 건물이 드물었다. 이곳에 가장 먼저 세워진 건물은 곡물창고이자 투표장이었던 빌라 푸블리카로 추정된다. 티투스 리비우스가 쓴 『로마건국사』에 따르면 BC 435년에 만들어진 이 건물은 곡물창고이면서 빈민들에게 밀을 배급하는 곳이었다. 전쟁을 벌이기 위해 병사들을 소집할 때에는 책상과 의자를 놓고 병사들의 신고를 받는 본부 역할을 했다. 인구조사를 실시할 때에도 이곳에서 일을 진행했다. 개선식을 기다리는 장군이나 외국에서 찾아온 사절들이 로마에 들어가기 전에 며칠 기다리는 곳도 여기였다.


BC 221년에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마르스 평원에 공공체육시설이 만들어졌다.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 즉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이었다. 평민 출신 집정관이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과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장군 플라미니우스 네포스가 평민들의 체력 향상을 위해 건설한 시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민이 이용할 수 있는 운동시설은 하나도 없었다.


귀족들은 키르쿠스 막시무스 등에서 운동을 할 수 있었지만 평민에게는 그런 시설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안 플라미니우스가 사비를 들여 지은 곳이었다. 경기장이 완공된 이후 평민들은 항상 이곳에서 집회를 열렸다. 플라미니우스는 경기장 외에 오늘날의 이탈리아 3번 국도에 해당하는 비아 플라미니아 즉 플라미니우스 가도도 건설했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는 루디 플레베이이, 루디 타우리이 등 여러 경기대회가 열렸다. BC 158년에는 루디 사쿨라레스가 펼쳐지기도 했다. 민회도 늘 이곳에서 개최됐다. 행사가 열리지 않을 때에는 시장으로 사용됐다. 개선식 때 일부 행사가 치러지기도 했다. BC 9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의붓아들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죽었을 때 이곳에서 그에게 바치는 추도사를 낭독했다. BC 2년에는 아우구스투스 포럼 봉헌식을 치른 뒤 이곳에 물을 끌어들여 마치 호수처럼 만든 뒤 악어 36마리를 풀어놓고 사냥 대회를 열기도 했다.


루디 플레베이이는 매년 11월에 열리는 경기대회였다. 플레베이이는 ‘평민’을 뜻하는 단어였다. 평민 출신 조영관이 평민의 권리 신장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이 행사를 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로마에서 경기대회를 의미하는 대부분의 루디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진행됐지만,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은 평민 출신 집정관이 만들었기 때문에 루디 플레베이이가 개최장소로 결정됐다. 로마인들은 종교적, 정치적 행사는 물론 축제에서도 절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BC 216년 루디 플레베이이 때에는 행사 도중 정해진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와 축제를 세 번이나 새로 열어야 했다.


루디 타우리이는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인 디 인페리에게 바치는 축제였다. 디 인페리는 때로는 죽은 자들의 신인 마네스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로마에서는 시신을 시내에 묻지 못하게 돼 있었다. 따라서 디 인페리, 또는 마네스를 모시는 축제를 로마 시내에서 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64년 대화재가 발생해 마르스 평원에 있던 많은 건물이 큰 피해를 입었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도 무너졌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화재로 소실된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을 대체하는 경기장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스타디움 도미티아누스 즉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었다.



콜로세움은 검투사 시합을 위해,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전차 경주를 위해 지었다면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은 육상 경기를 위해 만든 시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로마에서 육상을 위해 지은 첫 상설 경기장이었다. 관중석 규모는 1만 5천~2만 명 정도로 키르쿠스 막시무스보다 작았다. 217년 콜로세움에 화재가 발생해 시설을 사용할 수 없게 됐을 때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에서 검투사 대결이 펼쳐지기도 했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은 3세기 알렉산드로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대대적으로 수리를 했다. 이름은 키르쿠스 알렉산드리누스로 바뀌었다. 이 경기장은 5세기까지도 운동이나 행사를 치르는 장소로 이용됐다. 세월이 흘러 로마가 멸망한 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은 피난민들의 숙소로 바뀌었다. 시내에서 탈출한 로마인들은 경기장 복도에 들어가 살았다. 운동장은 만남의 장소로 활용됐다.

중세에는 교회가 궁전을 짓기 위해 포로 로마노나 콜로세움 등에 있던 건물을 해체해 자재를 뜯어가던 게 유행이었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도 마찬가지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경기장을 이루고 있던 대리석 자재는 모두 뜯겨 사라지고 말았다.


과거에는 테베레 강에서 홍수가 자주 일어났다. 강물이 1년에도 여러 차례 범람하는 바람에 인근 지역을 덮치기 일쑤였다. 홍수가 발생할 때마다 강에서 넘어온 흙이 쌓여 주변 건물을 덮치기도 했다. 교회, 궁전을 지을 자재로 사용하려고 내부의 대리석을 몽땅 뜯어가는 바람에 골격만 남은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은 물론 그 주변 일대도 여러 차례 홍수 때문에 땅 아래에 파묻히고 말았다. 지금 테베레 강 주변 지역의 고도는 고대 로마 시대 때보다 5m 이상 높다고 한다. 잦은 홍수로 토사가 흘러 넘친데다 고대 로마 시대 유적이 그 밑에 깔렸기 때문이었다.


매장되기는 했지만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의 외벽 부분은 고스란히 살아남아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교회는 1511년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예상대로 경기장의 벽이 그대로 드러났다. 옛 성 아그네스 성당 지하에서는 조각 프리즈와 항아리가 다수 발굴됐다. 발굴한 경기장에서 파낸 골재는 교회, 궁전을 짓는 자재로 이용됐다. 교황 비오 4세(재임 1559~65년)는 바티칸의 정원에 오락실을 건설할 자재를 마련하기 위해 나보나 광장 동쪽 지역인 코르소 델 리나시멘토 거리 쪽의 벽을 모두 허물도록 했다. 다른 쪽 벽에서 건진 자재는 성 니콜라 데이 로레네시 성당과 팜필 궁전, 브라치 궁전을 짓는 데 사용됐다.


1936년 이탈리아 정부는 나보나 광장의 북쪽 지역 건물을 부수고 지하를 발굴했다. 이때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의 반원형 관중석 부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경기장 벽은 물론 기둥과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남아 있었다. 지금 나보나 광장 북쪽 끝부분 왼쪽 바깥쪽에 있는 비아 디 토르 상귀그나 거리 쪽에서는 당시 발굴한 유적을 볼 수 있다.


나보나 광장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 잦은 홍수 탓에 파묻혀 버리는 바람에 이 일대는 평원으로 바뀌었다. 10~11세기 무렵에는 캄푸스 아고니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키르쿠스에서 개최하던 각종 경기를 ‘아곤’ 또는 ‘아고니아’라고 불렀다.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에서 벌어진 행사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곤이 ‘아고니아’, ‘인 아고네’ ‘아고니스’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당시 땅 소유권은 파르파 수도원이 갖고 있었다. 13세기에는 로마 행정 당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때부터 캄푸스 아고니스는 축제 등 오락성 행사를 여는 곳으로 사용됐다. 나중에는 기사들이 훈련을 하는 곳으로도 이용됐다. 교황 바오로 2세(재임 1464~71년)는 이곳에서 카니발을 개최했고, 그의 뒤를 이은 식스토 4세(재임 1471~84년)는 성 마르코의 날에 마상 창 겨루기 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1810년과 1839년에는 경마 경기가 펼쳐졌다.


15세기 무렵 캄피돌리오 광장에 있던 시장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 덕분에 축제 같은 행사가 열리지 않더라도 1년 내내 대중들이 모이는 공공장소가 됐다. 당시에는 장방형의 빈 공간에 불과했다. 주변에는 집이 한 채 두 채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500년 전에 캄푸스 아고니스였던 이름은 아고네 광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부분 학자들은 사람들이 광장 이름을 엉터리로 발음하는 바람에 나보네가 됐다가 나보나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고대 로마에는 11개의 수로가 있었다. 시내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로마가 멸망한 뒤 아쿠아 사용은 중지됐고 세월이 지나면서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점점 황폐해졌다. 세월이 한참 흘러 8세기 무렵 교황 하드리아노 1세(재임 772~795년)는 수로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교황 니콜라오 5세(재임 1328~30년) 때인 1453년에야 복원이 겨우 마무리됐다. 이 수로에 연결된 분수 중에는 트레비 분수, 판테온 분수, 콜로나 광장 분수 등이 있다.


사람들이 점점 많이 살기 시작한 캄푸스 마르티우스 지역에도 물을 공급하기 위한 계획이 추진됐다. 아쿠아 비르고에서 시작한 수도관을 나보나 광장에까지 연결했고, 분수도 두 개 만들었다. 두 분수를 설계한 사람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재임 1572~85년)의 지시를 받은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였다. 그는 보르게세 광장, 콜로나 광장, 판테온에도 분수를 만들었고, 특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을 책임지기도 한 건축가였다.


델라 포르타가 대리석을 사용해 수조는 다엽 모양이었다. 아래에는 계단이 두 칸 설치돼 있었다. 계단 주변에는 난간이 둘러 처져 있었다. 마차들이 광장을 지나가다 수조를 들이받아 손상을 입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분수는 광장 양쪽 끝에 하나씩 두 개가 만들어졌다. 수도관이 광장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광장 한가운데에는 분수가 아니라 단순히 말이 물을 마실 수 있는 여물통 모양 수도가 설치됐다.


지금은 분수에 각종 조각이 많이 달려 화려하게 보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한꺼번에 조각상을 설치하지 못하고 500년에 걸쳐 하나씩 둘씩 만든 게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됐다.


델라 포르타는 당시 나보나 광장뿐 아니라 로마 곳곳에서 여러 개의 분수를 동시에 만들고 있었다. 시간뿐 아니라 자금 압박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돌려막기’ 식으로 분수를 제작해야 했다. 그는 포폴로 광장 분수에 사용하려고 만들어놓은 초대형 트리톤 조각상 4개를 남쪽 분수에 설치했다.


이번에는 북쪽에 있는 분수에 사용할 트리톤 조각상 4개를 만들 차례였다. 그런데 공사비가 다 떨어져 남은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남쪽 분수를 장식하는 데 사용하려고 만든 다른 조각상은 이미 판테온 앞의 분수에 설치한 뒤였다. 결국 북쪽 분수에는 조각상을 달 수 없게 됐다. 이 문제는 100년 동안이나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새로운 성년인 1650년을 앞두고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임 1644~55년)는 나보나 광장에 새 분수 하나를 더 짓기로 했다. 광장 한가운데에 있던 말 여물통 수도를 철거하고 더 웅장한 분수를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당대 최고 건축가로 평가받는 사람은 베르니니였지만 교황이 일을 맡기고 싶어 했던 건축가는 보로미니였다.


인노첸시오 10세는 팜필 가문 출신이었다. 바로 앞 교황인 우르바노 8세(재임 1623~ 44년)는 바르베리니 가문 출신이었다. 두 가문은 사실상 원수지간이었다. 우르바노 8세가 사망하고 인노첸시오 10세가 교황으로 당선되자 바르베리니 가문 사람 중 일부가 처형당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처형을 피해 로마에서 달아나야 했다.


베르니니는 우르바노 8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건축가였다. 교황은 베르니니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는 물론 많은 작품을 의뢰했다. 또 로마 시내 곳곳에 많은 분수를 만들게 했다. 인노첸시오 10세가 원수 가문을 빛내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던 베르니니를 싫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보나 광장 중앙 분수 건설을 앞두고 교황은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공모전 형식을 빌려 보로미니에게 합법적으로 분수 건설을 맡길 생각이었다. 많은 건축가가 설계안을 제출했다. 보로미니는 사실 분수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로마의 분수에 그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그가 낸 분수 설계안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베르니니는 분수 공모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설계안을 내봐야 교향이 선택하지 않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신 다른 기회를 이용했다. 교황은 그에게 아쿠아 비르고의 트레비 분수에서 나온 물을 수송할 새 수도관을 나보나 광장까지 연결하는 공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기존에 있던 수도관으로는 새로 만들 중앙 분수에까지 물을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니니는 이 요청에 교활하게 대응했다. 인노첸시오 10세의 형수인 핌파를 활용한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동생인 교황의 결정에 아주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알려졌다. 문제는 아주 욕심이 많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그녀를 매우 싫어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핌파의 욕심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커졌다.


베르니니는 중앙 분수 공모전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아주 훌륭한 설계도를 만들었다. 그는 은으로 모형을 제작해 핌파에게 보냈다. 당연히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음은 물론이다. 그때 인노첸시오 10세는 보로미니를 포함해 다른 건축가들의 작품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게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핌파가 베르니니의 은 모델을 보여주면서 이걸 고르라고 부추겼다. 교황이 봐도 엄청나게 훌륭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베르니니에게 중앙 분수 사업을 맡겨야 했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중앙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다. 인노첸시오 10세는 형수를 만족시키기 위해 할 수 없이 ‘빵 세금’을 신설해야 했다. 로마인들이 핌파를 더 미워했음은 불문가지다.


베르니니가 생각한 중앙 분수는 당시까지 로마에 건설된 모든 분수 중에서 가장 복잡했고 가장 창조적이었다. 그는 교황이 교황의 권력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분수에 오벨리스크를 세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최근 막센티우스 키르쿠스에서 발굴한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이집트의 이시스 신에게 바치기 위해 주문 제작한 것이었다. 나중에 아피아 가도에 건설된 키르쿠스 막센티우스의 스피나에 세우기 위해 황제의 명령으로 로마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오벨리스크 기단 부분에 새겨져 있었지만 로마로 올 때 지워졌다. 막센티우스 경기장이 폐허로 변한 뒤에도 오벨리스크는 그곳에 계속 서 있었다.


베르니니는 여러 개의 바위 위에 오벨리스크를 세워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꼭대기에는 팜필 가문의 상징인 비둘기를 달았다. 아래에는 동굴의 모양처럼 움푹 들어간 공간을 조성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런 형태의 분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오벨리스크 같은 무거운 자재를 사용하는 건축물에 빈 공간을 설치하는 것은 금기시돼 있었다.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르니니는 아무런 안전상의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동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오벨리스크 주변에는 17세기 지도에 따라 4개 대륙을 상징하는 4대강 조각을 장식했다. 유럽을 상징하는 다뉴브 강은 안토니아 라기, 아시아를 상징하는 갠지스 강은 클라우드 포신,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라플라타 강은 프란체크소 바라타,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나일 강은 안토니오 판첼리가 각각 조각했다.


갠지스 강은 긴 노를 가진 조각이다. 긴 노는 배가 다닐 수 있다는 가항성을 상징한다. 나일 강은 머리에 느슨한 헝겊을 두른 조각이다. 헝겊은 당시만 해도 나일 강의 원천이 어딘지 몰랐다는 것을 뜻한다. 다뉴브 강은 교황의 문양을 갖고 있다. 이 강은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의 강이기 때문이다. 라플라타 강은 동전 더미 위에 서 있다. 황금의 대륙 아메리카가 유럽에 가져다줄 부를 상징한다. 라플라타 강은 뱀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하고 있다. 부자가 돈을 도둑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있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 분수 공사비가 약간 남게 되자 교황은 그 돈으로 남쪽에 이미 설치돼 있던 분수를 확장하라고 지시했다. 남쪽 분수 바로 앞에는 인노첸시오 10세 가문의 저택인 팜필 궁전이 있었다. 그는 남쪽 분수에 델라 포르타가 만든 것보다 더 큰 수조를 새로 설치했다. 옛 수조는 없애지 않았고, 새 수로로 옛 수조를 에워싼 형태였다. 이 덕분에 분수의 모양이 훨씬 나아져 보이게 됐다.


베르니니는 이어 남쪽 분수에 달려 있던 바위를 떼어내고 소라고둥 껍질을 들고 있는 돌고래 세 마리를 설치했다. 이 조각상을 본 로마인들은 당장 ‘달팽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인노첸시오 10세는 돌고래 무리가 너무 작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돌고래를 뜯어내 형수에게 선물로 주었다. 베르니니에게는 더 크고 더 아름다운 조각을 새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베르니니는 건축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트집을 잡는 교황에게 화가 났다. 그는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조개껍질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벌거벗은 사내 조각상을 만들었다. 사내가 돌고래 꼬리를 꽉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돌고래는 사내의 두 다리 사이에서 입으로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내는 마치 거인처럼, 돌고래는 난쟁이처럼 보이는 조각이었다. 사내의 얼굴은 다소 애매모호하지만 아프리카의 아랍인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조각상을 무어인이라고 불렀다. 분수의 이름도 ‘무어인의 분수’가 됐다.


미술사학자들은 베르니니가 ‘파스퀼루스의 말하는 조각상’에서 영감을 얻어 무어인의 분수에 설치한 사내의 조각상을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파스퀼루스의 말하는 조각상은 나보나 광장에서 50m 떨어진 장소에 서 있다. 이 조각상은 왕처럼 행세하는 교황은 물론 당시 집권세력을 비난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조각상의 목에 교황 등을 비난하는 문구를 담은 포스터를 걸어놓는 일이 수시로 벌어지기도 했다. 베르니니가 파스퀼루스의 말하는 조각상을 참조한 것은 인노첸시오 10세를 겨냥한 것이었다. 미술사학자들은 베르니니가 이 조각상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교황에 대한 간접적 항의의 표시로 이 조각상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본다. 무어인의 조각은 1874년 분수를 재건할 때 빌라 보르게세로 옮겨졌다. 지금 있는 무어인의 조각은 모조품이다.


베르니니는 북쪽 분수에는 여전히 아무런 장식도 설치할 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분수를 ‘구리세공인의 분수’라고 불렀다. 그 무렵 북쪽 분수 인근에는 가마솥이나 냄비는 물론 금속으로 만든 부엌용품을 파는 가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북쪽 분수에 장식용 조각상이 생긴 것은 19세기였다. 당시는 이탈리아에 통일 운동이 벌어지던 때였고, 로마가 이탈리아 수도로 결정된 시기였다. 게다가 상수도가 보급되면서 음용수를 분수에 의존하는 비율이 점점 줄어들었다. 정치인들은 사람이 모이는 분수에 정치적 의미를 담은 조각품을 달아놓으면 선전선동에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그 덕분에 나보나 광장의 분수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1873년 로마 시청은 북쪽 수조를 개선하기 위한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안토니오 델라 비타가 이끄는 단체가 당선됐다. 큰 창 트라이던트로 거대한 문어를 찌르는 자세를 한 넵튠(그리스신화에서는 포세이돈) 조각상이었다. 넵툰 주변에는 그레고리아 자팔라가 신화에 근거해 제작한 큐피드와 네레이드(바다의 여신), 그리고 바다코끼리 같은 조각들을 설치했다.


성 아그네스 성당


나보나 광장이 지금처럼 분수 외에 여러 건물로 이뤄진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7~18세기 무렵이었다. 교황으로 취임한 인노첸시오 10세의 가문은 당시 나보나 광장에 대저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높아진 명성에 걸맞은 건물을 짓고 싶어 했다. 그래서 주변 땅을 더 사들여 팜필 궁전을 건설했다. 그가 4대강 분수를 만든 것은 궁전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였다.


인노첸시오 10세는 한걸음 더 나아가 교황 가족이 사용할 성당을 짓기로 했다. 처음에는 공사를 지롤라모 라이날디에게 맡겼지만 그가 죽는 바람에 보로미니에게 일을 넘겨주었다. 최종 완공은 지롤라모 아들의 손으로 이뤄졌지만 건축사학자들은 사실상 이 성당을 만든 사람을 보로미니라고 생각한다.


새 성당이 완성되자 교황은 고대 로마 제정 시대 때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에서 성 아그네스가 순교했다는 전설을 떠올리고 그녀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성 아그네스는 순결, 양치기, 소녀, 약혼한 커플, 처녀, 성폭행 피해자의 수호성인이다.


3세기 말~4세기 초 제정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귀족의 딸이었던 아그네스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집정관 샘프로니우스로부터 아들과 결혼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한마디로 거절했다.


화가 난 샘프로니우스는 아그네스를 기독교 신도라는 이유로 처형시키려고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은 로마에서 기독교 탄압이 가장 심하던 때였다. 고대 로마법에 따르면 처녀를 처형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샘프로니우스는 아그네스를 매춘굴로 보내 부랑자들에게 성폭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면 처녀가 아니기 때문에 처형해도 합법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그네스는 천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탈출했다. 여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남자들이 덮치려 하자 갑자기 아그네스의 머리가 길어져 그녀의 온 몸을 덮었다고 한다. 아그네스의 몸에 손을 대려던 남자들의 눈이 멀어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샘프로니우스는 다른 사람에게 아그네스를 재판하라고 지시했다. 아그네스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처형장은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었다. 처음에는 화형을 시키기로 했다. 관리들이 아무리 시도해도 아그네스 발밑에 쌓인 나무에 불이 붙지 않았다. 겨우 불을 붙였나 했더니 이번에는 불길이 그녀의 몸을 피해 엉뚱한 나무들만 태웠다. 짜증이 난 한 병사가 그녀의 목을 칼로 베어 겨우 처형할 수 있었다. 아그네스의 피는 경기장에 흘러넘쳐 다른 기독교도들의 옷을 적셨다고 전해진다.



로마가 기독교 세상으로 변한 뒤인 9세기 무렵 아그네스가 목숨을 잃었던 경기장 인근에 작은 성당이 하나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성당을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라고 불렀다. 이 성당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인노첸시오 10세는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라이날디 부자는 물론 보로미니와 베르니니를 끌어들여 성당을 새로 짓게 했다. 성당은 그가 죽은 뒤에 완공됐고, 그가 원한 대로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성당은 교황 가족의 개인 기도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팜필 궁전 바로 옆에 붙어있어 팜필 가문 사람들이 손쉽게 성당으로 드나들 수 있었다.


4대강 분수 뒤에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하얀 건물이 있다. 이곳이 바로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이다. 성당 기도실에는 아그네스 해골이 모셔져 있다. 그녀의 뼈는 카타콤베 위에 지어진 다른 ‘성 아그네스 교회’의 제단 밑에 모셔져 있다. 성당 지하에는 콘크리트 벽과 벽돌, 석회 기둥 등 과거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다른 건물들의 지하에도 비슷한 흔적들이 보인다.


아그네스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당연히 그녀가 순교했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믿음은 역사적 사실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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