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입

거짓 판치는 시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by leo


카피톨리노 언덕의 계단을 내려와 베네치아 광장 반대편인 비아 델 테아트로 디 마르켈로 거리를 걷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짓기 시작했고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완성한 마르켈루스 극장이 나타난다. 정면의 겉모습만 보면 마치 작은 콜로세움처럼 보인다.



마르켈루스 극장을 거쳐 비아 루이기 베트로셀리 거리를 지나가면 작지도 크지도 않은 광장이 보인다. 광장 맞은편에는 이색적인 긴 탑을 가진 고색창연한 교회가 우뚝 서 있다.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다.


많은 관광객이 교회 앞에 줄을 서 있다. 사람 얼굴 모양의 원반 부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것이다. 교회 전랑 왼쪽 끝에 있는 코린트식 기둥머리에 달린 ‘진실의 입’ 즉 보카 델리 베리타다. 진실의 입은 매우 독특한 표정을 하고 있다. 온갖 인상을 다 찌푸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놀란 표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실의 입을 아주 재미있게 표현한 역사학자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열두 시간 동안 계속해서 더러운 오염물질을 퍼내는 일을 맡은 불운한 노예의 슬픈 표정 같구나.’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가 있는 지역은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 사이다. 이곳은 고대 로마 시대에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테베레 강이 범람하면 이곳으로 물이 흘러들어와 포로 로마노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물이 넘치던 이곳을 포룸 보아리움이라고 불렀다. 보아리움(boarium)은 보아리우스(boarius)의 복수로 ‘소’, ‘가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포룸 보아리움은 ‘소 시장’, ‘가축시장’이라는 뜻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포로 로마노에서 테베레 강으로 가려면 두 언덕 사이로 나와야 했다. 이곳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포룸 보아리움을 지나면 왕정 시대에 유일한 다리였던 폰스 수블리키우스로 손쉽게 갈 수 있었다. 제4대 왕이었던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건립한 나무다리였다. 지금 테레베 강에 있는 팔라티노 다리 근처였을 것이다.


포룸 보아리움 남쪽으로 가면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있는 마르키아 평원이, 북쪽으로 가면 마르스 평원이 나왔다. 한마디로 포룸 보아리움은 로마 외곽의 교차로였던 셈이다.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배를 타거나 강을 건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유동인구가 많은 덕분에 신전도 여러 곳 만들어졌다. 그래서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재미있는 전설과 신화도 많이 탄생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가 소떼를 이끌고 포룸 보아리움을 지나갔다는 신화도 남아 있다. 여러 자료를 참조하면 BC 13세기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곳에 지명이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포룸 보아리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곳에서 소 등 가축을 사고팔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 수도 있고, 헤라클레스가 소떼를 몰고 갔다고 해서 특이한 지명을 얻었을 수도 있다. 로마인들은 나중에 그리스를 정복한 뒤 아이기나에서 청동 소뿔 조각을 빼앗아와 포룸 보아리움 한가운데에 설치했다. 그 소뿔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헤라클레스가 지나갔다는 신화 때문에 포룸 보아리움은 헤라클레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이곳에는 헤라클레스에게 바친 신전이 많았다. 아라 막시마, 헤라클레스 인빅투스 신전, 헤라클레스 폼페이아누스 신전 등 3개가 몰려 있었다. 아라 막시마는 헤라클레스가 지나간 신화가 있다고 해서, 헤라클레스 인빅투스는 그가 그리스를 오가며 무역을 하던 상인을 도와줬다고 해서 건설한 신전이다.


두 신전의 건립 이유를 살펴보면 포룸 보아리움의 지역적 특성이 잘 나타난다. 헤라클레스가 지나갔다는 것은 포룸 보아리움이 교통 요지였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다. 무역상을 도와줬다는 것은 테베레 강을 통해 무역이 많이 이뤄졌다는 걸 입증하는 증거다.


포룸 보아리움 일대에는 다른 신전도 여럿 있었다. 행운의 여신인 포르투나에게 바친 포르투나 신전, 새벽 및 항구와 부두의 여신인 마테르 마투타에게 헌정한 마테르 마투타 신전, 항구의 신 포르투누스에게 바친 포르투누스 신전, 귀족계급의 덕성을 상징하는 신인 푸디키티아 파트리키아에게 헌정한 푸디키티아 파트리키아 신전 등도 있었다. 무역상들은 테베레 강에서 배를 타고 티레니아 해로 나가 이오니아 해를 돌아 그리스로 가곤 했다. 당연히 행운의 여신의 도움이 필요했다. 배는 새벽에 부두에서 떠났을 것이니 마테르 마투타와 포르투누스의 도움도 받아야 했다.


빈민 구제시설


대 그레고리오 1세(재임 590~604년)가 교황이던 6세기 말 무렵이었다. 로마가 멸망하고 100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동로마제국이 동고트족 등 이른바 야만족과 로마를 놓고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전쟁으로 수로가 파괴돼 시내에서는 식수를 구하기 힘들어졌다. 식수조차 얻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식량을 구하기는 더 힘들었다.


포룸 보아리움에 스타티오 아노아에라는 시설이 생겼다. 교회가 아니라 빈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거나 질병을 치료해주던 종교 시설이었다. 사람들이 식수 때문에 시내 바깥에서 살았기 때문에 스타티오 아노아에도 로마 외곽이면서 테베레 강 인근인 포룸 보아리움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교통의 요지여서 사람들이 오가기 좋았기 때문에 이곳에 식량을 얻으러 가는 빈민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스타티오 아노아에가 세워진 곳은 원래 아라 막시마가 있던 장소였다. 아라 막시마는 로마 멸망 직전인 4세기 무렵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가 왜 아라 막시마 자리에 자선 시설을 건설했는지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은 교회로 바뀐 이곳 지하에는 아라 막시마로 추정되는 제단 흔적을 볼 수 있다. 교회 뒤쪽에서는 아라 막시마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을 맡은 법무관이 세운 것으로 보이는 명판이 발견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교회 측에서도 “우리 교회는 로마에서 가장 오래 전부터 신에게 예배를 올리던 장소”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헤라클레스는 이교도의 신이었지만 어쨌든 신이었다. 지하묘지의 제단이 아라 막시마라면 교회의 주장은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역사적, 객관적 사실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따지면 아라 막시마는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소가 되는 것이다.


스타티오 아노아에가 교회로 바뀐 것은 8세기 무렵이었다. 교황 하드리아노 1세(재임 772~795년)가 테베레 강 인근 리파 그라카라는 지역에 살던 그리스 수도사들에게 이곳을 예배 장소로 제공한 게 계기였다. 그리스 수도사들은 동로마제국에서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성상 파괴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었다.


그리스 수도사가 많다고 해서 교회는 처음에는 산타 마리아 인 스콜라 그라카라고 불렸다. 스콜라는 학자, 그라카는 그리스라는 뜻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동로마제국 문화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다른 교회와 달리 애프스(교회 안의 반원형 부분)가 세 개나 되고, 여성 전용 회랑인 마트로네움이 설치된 게 바로 그 흔적이다. 로마에서 상업 활동을 하던 그리스 상인이나 그리스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이 교회를 주로 이용했다.


코스메딘이라는 성당 이름이 붙여진 유래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먼저 수도사 중에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유명한 수도원인 코시미디온 출신이 많아서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이 있다. 교회에 아주 예쁜 장식을 많이 달았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물건’이라는 뜻인 코스메딘을 이름으로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교회가 두 곳 더 있었다. 역시 동로마제국에서 쫓겨난 수도사가 살았던 라벤나와 나폴리의 교회였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는 847년 로마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재건을 지시했다. 이때 성구 보관실과 교황 궁전, 성 니콜라오에게 바치는 예배당을 추가했다. 교회는 안타깝게도 1084년 로베르 지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의 로마 약탈 때 큰 피해를 입었다. 다시 교회 재건을 지시한 사람은 12세기 교황 갈리스토 2세(재임 1119~24년)였다. 이때 중건한 교회는 다시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후 새로운 건물이 붙여지고 일부 개축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현재 교회는 기본적으로 당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로마에서 중요한 성소로 여겨졌던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는 16세기 무렵부터 영향력을 잃게 됐다.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위치가 나쁜 이 교회에 다니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로마 시내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시내인 포로 로마노에서 포룸 보아리움으로 금세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중세 시대 로마 시내는 마르스 평원 지역이었다. 지금 판테온, 나보나 광장 등이 있는 곳이다. 이 지역에서 포룸 보아리움까기 걸어가려면 꽤 멀었다. 지금은 도로가 잘 돼 있어 멀다는 느낌을 주지 않지만 당시는 지금과 사정이 매우 달랐다. 수사신부 수업을 받던 성직자들도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에서 공부하기를 꺼려했다.


당시 로마 의사 4명이 수도신부를 대신해 교황에게 보낸 편지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교황 성하! 이곳의 공기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매우 나쁩니다. 게다가 바람이 늘 많이 불어 수도신부들이 1시간 30분 이상 공부하는 것은 건강에 매우 해롭습니다. 수도신부들이 교회에서 긴 시간 동안 열리는 예배행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 편지에 교황이 어떤 답을 보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교회가 서서히 인기를 잃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는 지금은 로마의 멜카이트 공동체에서 관리한다. 멜카이트 공동체는 비잔틴 예배의식을 따르는 시리아 또는 이라크 가톨릭 신도들로 구성돼 있다. 비잔틴 예배의식은 과거 안티오크 교구에서 유래한 의식이다. 미사는 세 가지 언어로 진행된다. 그리스어와 아랍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다.


진실의 입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앞에는 하루 종일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다들 사람 얼굴 모양의 원반 부조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교회 전랑 왼쪽 끝에 있는 코린트식 기둥머리에 달린 보카 델라 베리타 즉 진실의 입이다. 진실의 입은 지름 175㎝ 두께 19㎝인 원반이다. 무게는 무려 1.3t에 이른다. 보카는 ‘입’, 델라는 ‘~의’, 베리타는 ‘진실’을 뜻한다. 따라서 보카 델라 베리타는 글자 그대로 진실의 입이다.


보카 델라 베리타라는 이름은 1450년 처음 등장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전랑의 바깥벽에 보카 델라 베리타가 설치됐다’는 내용의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실제 로마인들에게 이런 이름이 알려진 것은 조금 더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진실의 입은 원래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에 있었다고 한다. 12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교회의 외부 장식품에 이것과 비슷한 모양의 원반이 보인다. 1590년대 안토니오 템페스타가 그린 로마 지도를 보면 교회 정면 외벽에 큰 원반이 그려져 있다. 원반이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은 1631년으로 추정된다. 진실의 입에는 왼쪽 눈에서 시작해 코와 입 부분까지 금이 있다. 윗입술은 벌써 깨져 다른 대리석으로 땜질을 했다. 진실의 입을 전랑으로 옮길 때 또는 벽에 걸 때 생긴 상처일 가능성이 크다.


‘진실의 입이 도대체 어디에 쓰던 물건인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BC 1세기 무렵에 만든 것이라는 추정이 나올 뿐이다. ‘진실의 입’과 비슷한 물건은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에 있는 폴리냑 성에서 딱 한 번 발견된 바 있다. 고대 로마, 그리스 시대 조각이나 유물 수집에 열광적이었던 당시 귀족이나 교회 측은 진실의 입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런 장식이 흔해서 희귀성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루카스 크라낙 '진실의 입' at 뉘른베리그 국립미술관


전설에 따르면 진실의 입을 만든 사람은 6세기 실존 인물인 문법학자 베르길리우스 바로다. BC 1세기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전설이니 100% 신뢰할 수는 없다.


바로는 어둠의 마법을 할 줄 알았다. 그는 마을을 떠나있을 때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둘러 돌아간 그는 해명을 요구했다. 아내는 헛소문이라며 발뺌했다. 바로는 아내의 잘잘못을 밝혀낼 수 있는 도구를 만들기로 했다. 그가 마법의 힘을 빌려 만든 것이 바로 진실의 입이었다.


바로는 아내에게 진실의 입에 손을 넣으라고 했다. 원반의 입에는 마법의 힘이 담겨 있어 손을 넣은 뒤 거짓말을 하면 입이 손을 잘라버린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말을 믿지 않은 아내는 콧방귀를 뀌면서 당당하게 손을 넣었다. 진실의 입은 그녀의 손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아내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바로가 만든 보카 델라 베리타가 정말 지금의 진실의 입인지는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다른 것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전설이 엉뚱하게 원반 모양의 진실의 입에 달라붙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진실의 입이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시기는 15세기 무렵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진실의 입이 마법의 힘을 발휘해 거짓말쟁이나 위증자의 손목을 잘라버린다고 믿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목격자도 수백 명이나 됐다. 이런 믿음은 18세기까지도 이어졌다. 진실의 입은 부부의 외도 문제를 넘어 진실을 다루는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진실의 입이 어떻게 해서 거짓말쟁이의 손목을 잘랐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현대 학자들은 추정할 뿐이다.


‘로마 행정관이나 경찰, 재판관은 거짓말쟁이나 위증자의 혐의를 미리 철저하게 조사한다. 범인이 자백을 하지 않고 증거도 찾지 못하면 행정관 등은 그를 진실의 입으로 데리고 간다. 행정관 등은 미리 진실의 입 뒤에 사람을 숨겨둔다. 지름이 175㎝에 이를 만큼 큰 원반인 만큼 적당히 위장하면 뒤에 숨어있어도 들킬 위험은 적었다. 숨은 사람은 칼이나 쇠뭉치, 몽둥이 등을 들고 있다가 거짓말쟁이가 손을 집어넣으면 바로 내리친다.’ 이렇게 되면 진실의 입이 범인을 단죄한 게 된다. 멀찌감치 뒤에서 현장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진상을 알지 못한 채 거짓말쟁이가 손을 잘린 것만 보고 감탄한다.


이처럼 중세 시대에는 진실의 입을 더러 활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후에는 서서히 관심이 식어버렸다. 신뢰를 잃어버린 게 이유였다. 전설은 그 까닭을 이렇게 전한다.


‘중세 시대에 부유한 로마 귀족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이웃이 귀족에게 몰래 일러주었다. 아내는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화가 난 귀족은 아내를 시험하기로 했다. 그는 아내를 진실의 입으로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던 이웃들이 증인으로 나서 그들을 따라 갔다. 귀족과 이웃들은 진실의 입 주변을 둘러쌌다. 그때 한 미친 사내가 나타나더니 귀족의 아내에 입을 맞추고는 깔깔 웃으며 달아나버렸다. 아내는 진실의 입에 손을 집어넣고 소리를 질렀다.


“저는 남편과 방금 저에게 입을 맞춘 불쌍한 미친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하고도 입을 맞춘 적이 없습니다.”


귀족 아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과 방금 나타난 미친 남자 말고는 입을 맞춘 적이 없었다. 다만 미친 남자가 불륜 상대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당연히 진실의 입은 그녀의 손을 자르지 않았다. 아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귀족은 아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지킨 것에 만족해야 했다. 난처해진 것은 진실의 입이었다. 이 일 이후로 진실의 입은 신뢰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가서 손을 넣어보는 일은 없게 됐다.’


로마인들은 20세기까지도 진실의 입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손을 넣었다가 깜짝 놀라는 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이 진실의 입을 잊어먹고 있었다면 그런 스토리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석판의 진실은?


진실의 입은 과연 어디에 쓰던 물건이었을까? 과거에는 ‘하수구 뚜껑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대세를 이뤘다. 18세기 이탈리아 시인 지오반니 크레스킴베니가 가장 먼저 그런 주장을 내놓았다. 포로 로마노에서 테베레 강으로 이어지는 하수도인 클로아카 막시마가 포룸 보아리움 옆을 지나고 있었는데 거기서 가져온 하수구 뚜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BC 1세기 말 로마 시인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가 남긴 시도 진실의 입이 하수구 뚜껑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는 ‘비가 온 후에 트리톤의 입은 빗물을 금세 숨겨버린다’는 구절이 담긴 시를 남겼다. 시를 읽고 진실의 입을 다시 살펴보면 정말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을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실의 입은 너무 무거우면서 깨지기 쉽다는 점에서 하수구 뚜껑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수구 뚜껑이었다면 많은 사람이 밟고 다녔을 것이고, 엄청나게 닳아야하는 게 순리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닳은 흔적은 별로 없다.


게다가 진실의 입은 울퉁불퉁하다. 이런 원반을 하수구 뚜껑으로 썼다면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하수구 뚜껑이라면 비가 왔을 때 물이 많이 흘러갈 수 있도록 구멍이 많아야 하지만 입 부분 말고는 물이 들어가는 구멍도 없다. 그래서 나온 게 진실의 입은 신을 형상화한 장식품이었다는 주장이다. 메르쿠리우스, 파우누스, 포르투누스 등 여러 신의 이름이 거론됐다.


그리스신화에서는 헤르메스인 메르쿠리우스는 상업, 여행자, 의사소통, 국경, 행운의 신이었다. 도둑과 사기꾼의 신이었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지하세계로 데려가는 신이었다. 대 로마 시절 아라 막시마 인근에 폰테 카페나라는 샘이 있었다. 메르쿠리우스에게 바친 신성한 샘이었다. 로마인은 폰테 카페나 샘에 신기한 마법의 힘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샘에 가서 거짓말을 털어놓고 진실을 밝히면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직업의 특성상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도둑, 사기꾼, 상인이 이 샘을 자주 이용했다.


파우누스는 고대 로마에서 숲과 평원의 신이었다. 그리스신화에서는 반인간 반염소인 판이다. 진실의 입 원반의 얼굴에는 뿔이 있고 수염에는 고환이 달려있다. 이것이야말로 파우누스가 상징하는 ‘수컷의 힘’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포르투누스 신은 부두의 신이면서 열쇠, 문, 가축의 신이기도 했다. 로마인은 포룸 보아리움이 있는 마르스 평원에 대규모 곡물창고를 만들어 곡식을 보관했고, 목초지인 이곳에 가축을 풀어 사육했다. 그래서 포룸 보아리움 근처에는 포르투누스 신전이 만들어졌다. 이 신전은 지금도 남아 있다. 테베레 강은 로마인이 교역의 통로로 활용한 곳이었다. 부두의 신을 위한 신전을 세우는 것은 당연했다.


진실의 입은 정원의 벽에 붙인 분수 조각이었을 거라는 주장도 나왔다. 진실의 입 양쪽 끝에는 구멍이 두 개 있다. 두 구멍은 원반을 분수의 벽에 붙일 수 있게 하려고 만든 것이라는 게 주장의 요지였다. 진실의 입이 원래 직각으로 세워진 구조물의 표면에 세워졌을 거라는 점을 보여주는 여러 징후도 이 주장의 근거다.


엉뚱한 주장도 나왔다. 진실의 입은 아주 신성한 용도로 사용되던 우물의 뚜껑이었다는 이야기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여러 신전에 신성한 물을 제공하는 우물이 있었다. 수질을 보호하기 위해 우물에는 뚜껑이 필요했을 것이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근처에 있는 티베리나 섬에 성 바르톨로미오 교회가 있다. 그 자리에는 원래 그리스에서 건너온 의술의 신인 아에스쿨라피우스에게 헌정한 아에스쿨라피우스 신전이 있었다. 신전에는 우물이 있어 환자를 치료하는 데 사용됐다. 고대 로마가 멸망한 뒤 아무도 신전을 돌보지 않는 바람에 우물은 심각하게 오염됐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는 우물을 사용하지 않게 됐다. 지금도 성 바르톨로미오 교회에 가면 우물을 볼 수 있다. 진실의 입은 그 우물의 뚜껑이었던 것일까?


우물 뚜껑으로 사용하기에는 진실의 입이 너무 작다면서 우물 뚜껑이 아니라 우물에서 떠온 물을 담아놓는 통의 뚜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실의 입에 있는 구멍 근처에는 부식 흔적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의 입이 물통 뚜껑이었다는 증거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진실의 입은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의 얼굴을 형상화한 물통 뚜껑이었으며, 측면에 있는 구멍 두 개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뚫은 것이었다고 이들은 말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실의 입은 티베리나 섬에 있었던 유피테르 유라리우스 신전에서 사용하던 물통 뚜껑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유피테르 유라리우스 신전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곳에는 산 지오반니 칼리비타 교회가 생겼다. 고대 로마인은 유피테르 유라리우스 신전에서 신성한 맹세를 했다. 여기서 한 맹세를 어기면 법을 위반한 것처럼 엄청난 처벌을 받았다. 진실의 입은 맹세를 하던 신전에서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진실과 관련한 전설이 만들어진 거라는 게 이들의 추정이다.


전설과 신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이야기다. 진실의 입이 로마인들 사이에 회자됐다는 것은 진실이 필요한 시대였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베르길리우스 바로가 진실을 가려내는 도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창조한 것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밝힐 방법을 사람들이 갈구했다는 뜻이었다. 진실의 입이 거짓과 진실을 제대로 가려냈다는 것은 그나마 그 시대에는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양심이 존재했고, 나중에 진실의 입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은 이제 온 세상에 거짓이 가득 찼거나 사람들이 세상을 불신한다는 걸 상징한다.


진실의 입 앞에는 늘 관광객이 줄지어 서 있다. 그들은 진실의 입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고, 때로는 입으로 손을 넣어보기도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을 알아보려는 것일까, 아니면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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