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BBC방송의 존 테일러입니다. 저는 지금 빅토리아 여왕 동상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하이드파크의 켄싱턴 궁전 연못 앞에 있는 그 동상입니다.
최근 찰스 국왕이 암에 걸렸으며 왕위 계승 1위인 그의 아들 윌리엄 왕세자가 국왕 업무를 대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윌리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모두가 머리에 떠올리는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고 다이애나 전 왕세자빈입니다. 윌리엄은 엄마인 다이애나가 이혼하자 “엄마! 걱정하마. 내가 왕이 되면 엄마를 다시 데려올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윌리엄은 왕이 되더라도 엄마를 다시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을 거둬 이제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그녀가 사랑하는 윌리엄 곁을 떠난 지 27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1년생이었으니 살아있다면 올해 예순세 살인 셈입니다.
제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바로 다이애나 때문입니다. 찰스 국왕의 암 투병 소식과 윌리엄 왕세자의 국왕 등극을 앞두고 오래전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다이애나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보기 위해서입니다. 아직도 전 세계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이 만든 ‘다이애나-2013’이라는 영화가 큰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2176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엄청난 흥행작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아직도 사람들에게서 잊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려준 영화였습니다.
저는 오늘 다이애나가 죽기 직전까지 살았던 켄싱턴 궁전을 둘러봄으로써 다이애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켄싱턴 궁전에서 일했던 사람들과 당시 다이애나의 기사를 썼던 기자들을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다이애나가 켄싱턴 궁전에서 살 때 집사 역할을 했던 앨런 피셔 씨를 만나보겠습니다. 그는 다이애나의 인생에서 켄싱턴 궁전이 갖는 의미를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다이애나는 결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 켄싱턴 궁전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서 두 아들도 낳았죠. 장례식 전날 밤에는 그녀의 시체가 이곳에 안치됐고요. 그녀의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입니다. 지금 켄싱턴 궁전에는 그녀의 아들 부부가 삽니다. 이를 통해 그녀와 궁전의 관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켄싱턴 궁전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33년 전 다이애나가 찰스와 결혼할 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시 언론은 그녀를 좋게 표현했습니다.
‘다이애나는 존 스펜서 백작의 넷째 딸이다. 레이디 다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신교도이며 전혀 스캔들이 없는 단정한 아가씨다. 수줍어하면서도 발랄한 성격을 갖고 있다. 똑똑한 척하지 않는 겸손함이 왕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 결혼에까지 이르렀을까요? 당시 그녀를 취재했던 ‘텔레그라프’ 신문의 존슨 기자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찰스는 스물아홉 살이던 1977년 한 모임에서 겨우 열여섯 살이던 그녀를 처음 만났고, 1980년 다시 만났을 때 신붓감으로 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나중에 다른 주장도 나오지 않았나요? 찰스가 다이애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맞습니다. 그런 주장이 결혼 여러 해 뒤에 나왔죠. 찰스가 아버지 필립 공의 독촉에 못 이겨 다이애나와 결혼했다는 겁니다. 필립 공은 다이애나가 과거도 없는 데다 어리면서도 차분해서 왕실 며느리로 제격이라고 판단했다고 해요.”
다이애나는 1981년 2월 24일 찰스와 약혼했고 7월 29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결혼했습니다. 다이애나는 겨우 스무 살, 찰스는 무려 서른세 살이었습니다. 원래 왕실 가족 결혼식은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거행되는 게 관례였는데, 세인트 폴 대성당의 좌석이 더 많았기 때문에 새로운 결혼식 장소로 선택된 것이었습니다.
다이애나는 결혼식 전날 왕궁인 클레런스 궁전에 머물렀습니다. 그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니다. 생각 외로 부담을 느끼지 않고 푹 잘 잤다고 전해집니다. 침대 머리맡에는 다이아몬드 14개가 박힌 3만 파운드짜리 결혼반지가 놓였습니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유리창을 열었는데, 클레런스 궁전 앞에 엄청난 인파가 몰린 장면을 봤습니다. 그때부터는 극도의 긴장상태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그날 다이애나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주러 갔던 의상 디자이너 엘리자베스 엠마누엘 씨로부터 그때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겠습니다.
“다이애나는 아침 일찍 뜨거운 버블 목욕을 했습니다. 차와 토스트, 오렌지 주스가 그녀의 방으로 배달됐답니다. 하지만 주스만 겨우 입에 축였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오래 전부터 애용했던 전속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겼습니다. 화장은 청순한 이미지를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가볍게 했다고 하더군요. 웨딩드레스는 제가 만든 것을 직접 입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세인트 폴 대성당에 자리가 모자라 우리는 대성당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겁니다. 웨딩드레스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진 거죠. 그녀가 마차에서 내려 대성당으로 들어갈 때 웨딩드레스는 다 구겨져 엉망진창이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TV로 결혼식 장면을 봤던 전 세계 7억 시청자들은 잘 알지 못했을 테지만…. 다이애나는 세인트 폴 대성당 입구에서 마차 문을 열고 내렸습니다. 당시 그녀는 동화 속의 공주님 같았죠.”
이제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찰스는 멋진 양복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등 왕실 가족도 기다리고 있었죠. 다이애나의 가족은 왕실 가족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다이애나가 찰스와 결혼식을 올릴 때 여러 가지 해프닝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당시 결혼식 장면을 지켜봤던 존슨 기자로부터 계속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찰스의 본래 이름은 찰스 필립 아더 조지입니다. 그런데 다이애나가 주례에게 남편 이름을 말하면서 ‘필립 찰스 아더 조지’라고 이름 순서를 바꾼 겁니다. 주례와 찰스가 깜짝 놀랐다더군요. 그때 찰스는 ‘다이애나, 당신은 내 아버지와 결혼해야겠군요’라고 농담했다고 합니다. 실수는 다이애나만 한 게 아니었죠. 찰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원래 ‘나의 모든 것을 당신과 함께하겠다’라고 맹세해야 하는데, ‘당신의 모든 것을 당신과 함께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맹세 다음에 신부에게 입맞춤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까먹었어요. 다이애나의 실수에 대한 복수였는지, 아니면 두 사람의 불행한 미래에 대한 전조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죠.”
찰스의 실수에 이어 더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이애나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대담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바로 남편에 대한 복종 서약을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존슨 기자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개 결혼식을 할 때 신부는 ‘남편에게 복종합니다(obey)’라고 맹세하잖아요? 그런데 다이애나는 그 단어를 말하지 않은 거예요. 완고한 왕실에 난리가 났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왜 그랬는지를 놓고 나중에 격론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찰스와 다이애나는 첫날밤을 브로드랜즈에서 보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부부가 첫날밤을 보낸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이어 두 사람은 11일 동안 요트를 타고 지중해에서 신혼여행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두 사람의 신혼여행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두 사람의 신혼여행 기사를 썼던 더 타임스 신문의 에이미 기자로부터 신혼여행에 대해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신혼여행에서 해괴한 일이 있었다죠?”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인데요. ‘데일리 익스프레스’ 신문의 칼럼니스트인 로스 벤슨이 찰스의 쓴 전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혼 첫날밤에 다이애나가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는 겁니다. 찰스가 신방에 들어갔더니 다이애나가 발작적으로 웃으면서 쓰러졌다는 겁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상황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 요트 여행도 그다지 즐겁지 못했다면서요?”
“다이애나는 당시 겨우 스무 살의 젊은 여자였습니다. 당연히 찰스와 요트 뱃머리에 나란히 앉아 바다에서 지는 석양을 보며 입맞춤을 하는 로맨틱한 장면을 생각했겠죠. 그런데 그런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찰스는 요트에서 하루 종일 과학서적을 읽거나 혼자 낚시를 했다고 합니다. 신부는 지루하게 내버려두고요.”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찰스 부부는 켄싱턴 궁전에 신혼집을 차렸습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찰스의 부인이면서 영국 왕실의 왕비이지만 당시 은밀한 애인이었던 카밀라 때문이었습니다. 다이애나는 결혼 전에 이미 카밀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포기할 생각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다 신혼 초에 찰스가 카밀라에게 ‘F & G’라는 글자 이니셜이 적힌 금팔찌를 선물로 보내려다 켄싱턴 궁전에서 다이애나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찰스와 카밀라는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를 다이애나에게 들킬까 싶어 프레드, 글레이디스라는 가명을 썼지만 영리한 다이애나가 그 사실을 알아챈 것입니다.
찰스는 결혼 직후부터 다이애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 신문 에드워드 기자의 증언입니다.
“결혼 이후 다이애나의 인기가 급상승했습니다. 반면 찰스의 인기는 급락했고요. 두 사람이 행사에 가면 대부분 사람들은 다이애나에게로 몰렸죠. 사진기자들도 대부분 그녀의 사진만 찍었습니다. 찰스는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더 나빠졌죠. 결혼 이전까지만 해도 국민들과 기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던 찰스는 점점 짜증을 냈다고 합니다. 그러다 곳곳에서 부인을 헐뜯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다이애나는 아직 어려서 덜 성숙했고, 너무 기분에 따라 움직인다, 왕실 규칙을 안 지키고 만족할 줄 모른다’ 같은 말을 한 겁니다. 게다가 다이애나는 에이즈 환자나 병자들을 거리낌 없이 만나 악수를 하거나 입을 맞추기도 했는데, 찰스와 왕실은 여기에 대해서도 입을 댔습니다. 국민들은 그런 다이애나를 여신이니, 영웅이니 했던 판국에 말이죠.”
두 사람은 성격과 취미도 많이 달랐습니다. 좋아하는 분야도 극명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둘이 도저히 대화를 나눌 수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다이애나는 가끔 켄싱턴 궁전으로 어릴 때 친구들을 초청하곤 했죠. 그들을 만나면 영화배우 이야기, 패션의 흐름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관심을 갖는 이야기를 여러 시간 동안 떠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찰스는 서민들이 길거리에서나 하는 이야기를 아내가 궁전에서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며 질색을 했다고 해요. 그는 주로 문학, 건축, 역사, 미술, 철학 같은 이야기만 나누곤 했죠. 한마디로 찰스는 다이애나에 대해 ‘수준이 낮아 같이 못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둘 사이에는 대화가 점점 줄어들게 됐습니다.”
결혼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켄싱턴 궁전에서 이상한 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다이애나의 자살설이었습니다. 당시 자살설 관련 기사를 썼던 ‘선데이 타임스’ 신문의 엘리엇 기자로부터 그 내용을 들어보겠습니다.
“앤드루 모튼이라는 작가가 다이애나의 친구들과 인터뷰를 통해 책을 낸다고 하더군요. 그 책을 미리 구했죠. 책에 다이애나가 다섯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는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첫 번째는 결혼 6개월 만인 1982년 1월이었죠. 그때 다이애나는 계단에서 떨어졌습니다. 켄싱턴 궁전에서는 실족했다고 밝혔지만, 모튼은 그녀가 남편과의 말다툼 끝에 계단으로 몸을 던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다이애나는 임신 3개월 상태였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후에도 켄싱턴 궁전의 유리 진열장에 몸을 던지거나 면도칼로 손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주머니칼로 넓적다리를 베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다이애나는 폭식증 환자이기도 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켄싱턴 궁전에 돌아가면 식당에서 음식을 엄청나게 먹어치워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켰다고 합니다. 그녀는 1995년 켄싱턴 궁전에서 열린 BBC방송 마틴 바쉬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때 인터뷰 내용을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폭식증 환자라고 하던데….”
“맞아요. 사실이에요. 저는 수 년 동안 엄청나게 먹고 또 먹었답니다. 너무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폭식증에 걸렸죠. 저는 폭식하면서 울고 소리를 지르며 도와달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켄싱턴 궁전 직원들과 왕실 가족들은 저의 어려움을 이해하기는커녕 ‘폭식은 왕실 규칙 위반’이라고 말하더군요.”
“왜 폭식증에 걸렸다고 생각하시나요?”
“찰스는 제가 아무 일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기를 원했어요. 저는 그에게 항상 18세 소녀여야 했답니다. 단순히 ‘다 큰 어른 동상’ 같은 존재여야 했죠. 왕실에서는 제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잘했다고 칭찬해주지 않더군요. 그러다 실수하면 온갖 비난이 쏟아졌답니다. 폭식증은 이런 괴로운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한 저의 방법이었어요.”
‘선데이 타임스’ 신문에 따르면, 다이애나는 폭식증 이외에도 만성적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았고, 정신과 의사들로부터 진료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다이애나가 켄싱턴 궁전에서 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행복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바로 첫 아들 윌리엄과 둘째 아들 해리가 태어난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찰스도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아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장 많이 떠올랐던 시기도 바로 그때였습니다.
다이애나는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두 아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켄싱턴 궁전 복도에서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도록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두 아들과 함께 젤리 먹기 내기를 했고, 무서운 옷으로 분장한 채 귀신놀이를 했습니다. 다이애나가 아이들을 부추겨 물건을 몰래 숨겨놓고 켄싱턴 궁전 시녀와 시종들을 놀라게 했죠. 여기서 켄싱턴 궁전에서 다이애나 가족을 위해 집사로 일했던 앨런 피셔 씨를 만나보겠습니다.
“당시 다이애나와 두 아들의 관계는 어땠나요?”
“다이애나는 나이가 어렸지만 정말 헌신적인 엄마였어요. 남편이 채워주지 못한 사랑의 감정을 아이들에게서 메우려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들에게 집착했죠. 켄싱턴 궁전에는 보모들도 있었답니다. 그래도 다이애나는 보모들의 역할을 최대한 줄이고, 자신이 엄마로서 더 많은 노릇을 하려고 노력했죠.”
“찰스도 아이들과 함께 잘 놀았나요?”
“찰스도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어요. 하지만 양육 방식에서는 다이애나와 큰 차이를 보였죠. 다이애나가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는 놀이를 해도 찰스는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았어요. 그때 찰스의 머리에는 ‘장차 왕이 될 아이들을 엄격한 왕실 규정대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애들이 네 살 때부터 가정교사를 여러 명 두고 각종 교육을 시켰답니다. 때문에 다이애나와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두 아들을 평범한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키우기를 원했거든요.”
“윌리암이 사고로 수술을 받았을 때도 다이애나가 분노했다죠?”
“윌리엄이 학교 골프 수업 때 친구가 휘두른 골프채에 맞아 두개골 골절상을 당한 일이 벌어졌답니다. 다이애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일을 중단하고 병원으로 달려갔죠. 그녀는 아들이 수술을 받고 깨어날 때까지 침대 곁에 앉아 밤을 지새웠답니다. 반면 찰스는 병원에 와서 설명을 한 번 듣고는 그냥 가버렸어요. 다이애나가 정말 화를 많이 냈어요. 어떻게 아빠란 사람이 그럴 수 있냐고요.”
다이애나와 찰스의 사이는 회복불가능 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녀는 1991년 30세 생일을 남편 없이 혼자서 보냈습니다. 그해 결혼 10주년 행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 기념 이벤트를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다이애나가 그토록 의지했던 아버지 스펜서 백작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더 이상 참고 견딜 이유는 존재하지 않게 됐습니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결혼생활 11년 만에 별거하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은 공공행사 참여 등 왕실가족으로서의 의무는 계속할 것이며, 두 아들 윌리엄과 헨리의 양육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1992년 11월 존 메이저 총리는 찰스와 다이애나가 별거에 들어간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별거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막상 별거 발표가 나오자 영국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별거 발표 이후 켄싱턴 궁전에서는 다이애나와 두 아들만이 살게 됐습니다. 찰스는 짐을 꾸려 나갔습니다.
다이애나와 찰스는 별거 3년여 만인 1996년 2월 이혼에 합의했습니다. 다이애나는 재혼할 때까지 켄싱턴 궁전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찰스는 다이애나에게 런던과 시골에 집과 별장을 구하라며 700만 파운드를 주고, 위자료로 1500만 파운드를 더 주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혼을 발표하기 며칠 전에 제임스궁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혼합의서에 서명만 했을 뿐 차 한 잔 마시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제 다이애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이애나가 어떻게 죽었고, 어떻게 묻혔는지는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 뒤로는 켄싱턴 궁전 벽에 걸린 다이애나의 생전 사진이 보입니다. 궁전 내부 곳곳에는 그녀의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앞에는 궁전의 출입문이 보입니다. 다이애나가 파리에서 주검으로 돌아와 궁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뒤 장례식을 위해 웨스터민스터 사원으로 떠날 때 지났던 문입니다. 문을 나가면 왼쪽으로는 오랑제리가 보입니다. 지금은 일반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차를 파는 찻집이 됐지만, 다이애나가 생전에 외로울 때면 혼자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던 장소입니다.
지금도 다이애나가 세상을 떠났던 날이 돌아오면 켄싱턴 궁전 앞에는 수많은 꽃다발이 놓인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했으며 가장 인간적이었던 왕세자비. 그녀는 영국 국민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왕세자비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켄싱턴 궁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