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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29. 2024

샤를 5세와 루브르 궁전


“루브르 성채를 확충해서 궁전으로 바꿀 것이오. 그곳에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 가장 큰 도서관도 만들 것이오. 모든 귀족, 신하는 나의 뜻을 잘 받아들여 새 궁전 건설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협조하기를 바라오.”


1364년 7월 프랑스 파리 시테 섬의 시테 궁전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루아 왕조의 3대 국왕 샤를 5세가 진지한 표정을 한 채 궁전 회랑에 도열한 귀족, 신하들에게 내뱉은 명령이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궁전 안은 술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샤를 5세는 즉위한 지 이제 겨우 석 달밖에 안 된 처지인 데다 언제 왕 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 궁정의 재정난이 극심해 심하게 말하면 왕실 가족의 식사비용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들의 걱정처럼 발루아 왕조의 창시자 필립 6세의 손자였던 샤를 5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 왕좌에 올랐다.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 4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그의 사촌인 필립 6세가 왕 자리를 물려받아 발루아 왕조를 개창했지만 국내외에서 새 왕조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샤를 5세가 즉위했을 때에는 발루아 왕조가 개창한 지 36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반군이 들끓었고, 외적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으며, 설상가상으로 재정난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가 왕이 된 이듬해인 1365년 상황을 당시 연대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프랑스는 지난 36년간 끊임없이 고난, 고통, 억압, 위기, 상실, 살인, 강탈, 도시·교회·수도원·성의 파괴, 인구 감소, 역병, 폭력, 강간 그리고 결국에는 동요에 시달렸다. 이 모든 것은 프랑스, 영국, 나바레의 왕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 때문이었다.’


샤를 5세는 심지어 발루아 왕조를 인정하지 않는 귀족, 백성으로부터 직접 생명을 위협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열여덟 살이던 1356년 영국의 침공을 막으러 나섰던 아버지 장 2세가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로 붙잡히는 불상사였다. 


국가의 위기를 막기 위해 샤를 5세는 국왕 대리로 지명됐지만 프랑스 귀족 대부분은 물론 신흥 경제세력이던 부르조아와 파리 시민 그리고 교회는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파리 상인조합 회장인 에티엔 마르셀이 파리 시민을 선동해 시테 궁전에 쳐들어가 샤를 5세가 보는 앞에서 군사령관인 셩빠니으 백작과 노르망디 백작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를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샤를 5세는 키가 작고 비썩 말라 왜소한 데다 체형까지 바르지 못해 백성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정도였다. 국가 간 전쟁이 일상이던 시절이어서 국왕도 늘 전쟁터에 나서 군대를 지휘하고 직접 전투에 참가해 칼을 휘두르는 게 정상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으니 백성들이 왕을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다’고 깔본 것도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 귀족, 신하들은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새 국왕이 권위를 내세워 뻗대기보다는 모든 백성에게 납작 엎드려 매일 읍소해야 겨우 생명이나마 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 국왕은 엉뚱하게도 새 궁전을 짓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궁전에 모인 귀족, 신하들은 샤를 5세의 생각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건축을 통한 통치


스물여섯 살이었던 샤를 5세는 자신의 육체적 단점을 정말 잘 알았다. 백성들의 우려대로 너무 허약해서 전쟁터에서 칼을 휘두르기는커녕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장점도 잘 알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 지식수준이 뛰어난 데다 판단력이 정확하고 빨랐으며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 나는 위기에 빠졌어. 이런 상황에서 소극적으로 움츠리면 머지않아 봉변을 당할 거야. 타개책은 수비가 아니라 적극적인 공격에 있어.’


샤를 5세는 지금 현재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발루아 왕조의 정당성 그리고 사촌지간인 카페 왕조와의 연속성을 백성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외모는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국왕으로서 능력과 권위는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샤를 5세가 고민 끝에 선택한 방법은 바로 건축이었다. 


‘교회는 엄청난 건물과 호화스러운 실내 장식 그리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이용해 신도를 압도해서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거야. 교회는 건축물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홍보수단이자 통치수단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나도 교회처럼 하면 돼. 놀라운 궁전을 지어서 프랑스 백성은 물론 외국 국왕에 이르기까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는 거야.’


샤를 5세는 성벽 하나를 짓거나 책 몇 권을 구입하는 정도에서 끝낼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1190~1202년 카페 왕조의 국왕이었던 필립 오귀스트가 파리를 지키는 성벽으로 건설한 루브르 성채를 궁전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지만 그는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필립 오귀스트는 지금까지 프랑스 최고의 국왕으로 평가받았던 위인이지. 카페 왕조의 국왕이었던 그가 프랑스를 수호하고 파리를 지키기 위해 루브르 성채를 만들었다면 발루아 왕조의 국왕인 나는 루브르를 확충하고 개선해 파리를 발전시킴으로써 필립 오귀스트의 후계자라는 인상을 백성들에게 심어줄 거야. 필립 오귀스트는 파리에 머물지 않고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지만 나는 루브르 궁전, 즉 파리에 영원히 머물러 파리 시민과 백성을 끝까지 지킨다는 인상을 심어줄 거야.’


루브르는 필립 오귀스트가 건설한 이래 150년 동안 파리의 방어막 역할을 충실히 했다. 하지만 샤를 5세 시대에는 센강 주변 곳곳에 사람이 퍼져 살아 루브르는 도시의 방어막이 아니라 발전의 방해꾼이 되는 상황이었다. 샤를 5세는 성벽을 보강, 확충해 도시 확장에 도움이 되도록 하면서 그 중앙에 궁전을 만들어 파리의 상징으로 삼으려고 했다. 


샤를 5세가 즉위했을 때 루브르는 가로 78m 세로 72m로 거의 직사각형 성채였다. 가운데에는 높이 30m, 지름 15m의 원통형 ‘루브르 대탑’이 있었다. 또 파리 상인조합 회장인 마르셀이 국왕의 반격에 대비하려고 성벽을 보강하거나 확충하다 중단한 부분이 있었다.


샤를 5세는 성벽 보강, 확충을 마무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여전히 귀족,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시테 궁전이 아니라 루브르 성채로 피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성벽에 ‘바스티드’라는 탑 3개를 건설했는데, 동쪽에 만든 탑은 나중에 바스티유로 불리게 됐다. 프랑스대혁명 때 잿더미가 된 바스티유 감옥이 바로 이곳이었다. 


루브르 궁전이 완공되자 샤를 5세는 시테 궁전을 곧바로 떠나 거처를 옮겼다. 그로서는 마르셀의 반란 등 숱한 아픔이 새겨진 시테 궁전에서 사는 게 불편했을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인 랑부 형제가 1412~1416년 베리 공작의 의뢰를 받아 만든 <베리 공작의 아름다운 시간>이라는 책에 당시 루브르 궁전의 모습이 담겨 있다. 루브르 궁전 주변은 여러 탑이 세워진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옛 루브르 성채의 성벽을 보강한 시설이었다. 궁전은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중세에 일반적인 성처럼 보이는 건물이다. 각 모퉁이에는 원통형 탑이 세워졌고 지붕은 원뿔 모양에 푸른색 지붕이 덮였다. 


루브르 성벽 바깥에는 센강이 흐르고 강 너머는 넓은 평원이었다. 센강에는 배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평언에서는 백성들이 밭에 씨를 뿌리거나 말을 이용해 밭을 갈고 있다. 


샤를 5세는 새로 건설한 루브르 궁전 성벽에 수시로 올라갔다. 그럴 때마다 평원에서 농부가 일하는 모습은 물론 장사하러 다니는 상인의 모습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웅장한 루브르 궁전 성벽에 위압감을 느끼게 된 파리 시민은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왕의 모습까지 발견하게 되자 두려움까지 더하게 돼 더 이상 왕에게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성벽과 궁전에 설치된 총안, 탑, 많은 창은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보면 단순히 장식용이거나 외적 방어용에 불과하지만, 귀족과 백성에게는 국왕이 늘 지켜보면서 감시한다는 상징물로 작용했다.


샤를 5세는 루브르 궁전 외부 공간 두 곳에 그를 형상화한 초대형 조각상 두 개를 만들어 설치했다. 하나는 동쪽에 놓아 시내 쪽을 바라보게 했고 다른 하나는 북쪽에 놓아 센강을 향하게 했다. 궁전 안쪽의 계단에도 조각상 하나를 더 놓아 궁전을 오가는 사람이 꼭 지나가면서 보게 만들었다. 당시 계단은 엄청나게 웅장하고 화려했는데 이곳에 설치된 왕의 조각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궁전에 들어간 귀족이나 백성, 또는 궁전에서 일하는 시종, 시녀는 조각, 그림을 보면서 왕이 그들을 늘 지켜본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샤를 5세는 루브르 궁전에 왕의 조각상을 설치한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전국의 많은 성채, 궁전, 성당 등에는 왕의 그림을 걸었다. 그림이 얼마나 많았던지 당시 프랑스 백성 중에 샤를 5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샤를 5세는 파리를 오가는 상인, 외국에서 온 대사, 유럽 각국을 떠도는 예술가 그리고 여러 종류의 여행객에게 궁전을 마음껏 구경하게 했다. 고향에 돌아간 그들의 입을 통해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궁전이 엄청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궁전, 아비뇽의 교황청, 보헤미아의 카를슈타인 성을 능가하는 공간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 모든 것은 샤를 5세가 의도했던 바였고, 결국 그는 유럽에서 가장 위엄 있는 군주로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도서관을 통한 통치


샤를 5세는 루브르를 궁전으로 바꾸면서 특히 도서관 설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루브르 궁전 안에 유럽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의 도서관을 만들기로 한 것은 궁전처럼 홍보 및 통치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만들어야 해. 이곳에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책은 물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경도 대규모로 보관할 거야. 새 도서관은 국가와 백성에게 지식과 선정을 상징하는 사원이 될 것이고,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의 부흥을 상징하는 공간이 될 것이야.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도서관은 왕의 권위를 지탱하는 성소로서 역할을 하게 될 거야.’


샤를 5세는 도서관과 그곳에 비치된 책을 통해 그의 통치를 성경에 나오는 여러 현인과 비교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고난에 시달렸던 이스라엘인처럼 프랑스 백성에게는 지혜롭고 사려 깊은 국왕이 필요한데, 그가 바로 그런 국왕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자신이야말로 신의 가호를 받는 국왕이며 프랑스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국왕이라는 걸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샤를 5세는 루브르 궁전 북쪽 탑에 3층짜리 ‘책의 탑’이라는 도서관을 설치하고 실내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리고 역대 국왕이 수집해 시테 궁전에 보관하던 각종 서적과 서류를 모두 루브르 궁전으로 옮겼다. 당시 최고의 서지학자였던 질 말레를 도서관 초대 관장으로 앉혔다. 


샤를 5세는 도서관과 서적을 제대로 이용하면 통치에 매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한 프랑스 최초의 국왕이었다. 그에게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모아놓은 곳이 아니라 정치적 도구였다. 그래서 국왕의 권위와 통치에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는 유럽 최초의 정치이론 서적인 <폴리크라티쿠스> 같은 책을 번역하게 했다. 


샤를 5세는 도서관을 짓고 책을 번역하는 일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책을 읽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해 프랑스 곳곳에 퍼뜨렸다. 어디에 가든 책을 들고 다녔고, 루브르 궁전 외에 방셴 등 다른 도시의 궁전에도 늘 책을 갖다 놓았다. 


샤를 5세는 도서관과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백성에게 ‘왕은 지식이 많고 사려 깊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다. 또 역대 왕에 비해 무기력하고 병약하다는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완전히 불식시키고, 싸우지 않더라도 이길 수 있는 지혜로운 국왕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각인시키려고 노력했다. 


샤를 5세는 종교, 역사, 철학, 통치학 외에 점성술과 천문학까지 공부했다. 이처럼 풍부한 왕의 지식과 지혜는 무식한 백성으로 하여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느끼게 한다는 걸 잘 알았다. 귀족, 시민은 물론 궁전 내의 시종으로 하여금 반란할 마음을 절대 가질 수 없게 만드는 공포의 근원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도서관과 책 덕분에 샤를 5세는 생전과 사후에 ‘지혜로운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샤를 5세의 도서관에서 가장 중요했던 도서는 프랑스어로 번역한 라틴어 및 그리스어 성경을 포함해 종교 관련 서적 스무 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성경에 나오는 현자였던 솔로몬 왕과 비교하는 데 새로 번역한 종교서적을 활용했다. 솔로몬은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의 저자이며 궁전, 신전, 예루살렘 성벽을 새로 지은 왕이었다. 파리의 성벽을 확충하고 루브르 궁전을 새로 지었으며, 도서관을 만들고 종교서적을 번역한 자신의 행적은 솔로몬과 일치한다는 걸 널리 알리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샤를 5세가 권좌에 올랐을 때 프랑스 백성 사이에는 ‘우리는 신의 벌을 받고 있다’는 두려움이 강했다. 과거 필립 4세가 교황을 배신하고 템플러 기사단을 억압하는 바람에 내린 신의 저주가 세월이 흘러 후손에게 신의 벌로 나타났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종교서적 번역을 통해 이 같은 종교적 두려움과 좌절감을 해소하려 했으며, 전국의 백성에게 이런 사실을 널리 알렸다.


“짐은 성경과 종교서적을 대거 번역해 루브르 궁전의 도서관에 보관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됐다. 그 덕분에 프랑스는 하느님의 처벌에서 벗어났고 더 이상 저주받은 나라와 백성이 아니다.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친척을 활용한 통치


샤를 5세가 국왕일 때 유럽 최고의 지존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보헤미아 국왕이었던 카를 5세였다. 두 사람은 먼 친척이었다. 카를 4세는 샤를 5세의 할아버지인 필립 6세의 여동생 블랑슈와 결혼했기 때문에 샤를 5세에게는 고모할머니의 남편이었다. 


카를 4세는 어릴 때 아버지의 미움을 사 삼촌인 샤를 4세가 통치하는 파리로 쫓겨나 7년간 살았다. 삼촌이 그를 매우 잘 보살펴준 기억이 있어 그는 프랑스와 파리를 무척 좋아했고, 먼 친척인 샤를 5세에게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프랑스어로는 샤를, 체코어로는 카렐, 독일어로는 카를이라는 이름을 고른 것은 그를 아껴주고 보살펴준 삼촌을 존경하고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카를 4세는 1378년 샤를 5세의 초청을 받아 파리를 방문했다. 이 행사는 두 사람 모두에게 깊은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황제로서는 어릴 때 살았던 ‘정신적 고향’에 돌아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삼촌의 나라가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었고, 샤를 5세로서는 ‘황제는 나의 친척이며 나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프랑스는 물론 온 유럽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카를 4세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먼저 시테 궁전에서 공식만찬이 열렸다. 샤를 5세는 이어 시테 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카를 4세를 센강으로 모시고 가 한창 건설 중이던 루브르 궁전을 보여주었다. 


샤를 5세는 황제에게 루브르를 어떻게 바꿀지 설명해주었다. 또 루브르 궁전을 중심으로 프랑스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포부도 밝혔다. 


카를 4세는 어린 시절 파리에서 살 때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루브르 성채를 잘 알았다. 그는 단순한 방어시설이던 성채가 화려한 궁전으로 바뀌는 현장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조카손주의 담대한 계획과 포부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샤를 5세는 카를 4세와 함께 루브르 궁전 공사현장을 둘러본 다음날 이미 완공된 상태였던 루브르 궁전 대회의장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카를 4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의원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프랑스의 역사, 영토 분쟁을 설명하고 영국이 프랑스 땅을 차지한 게 얼마나 부당한지를 일일이 설명했다. 왕을 무시하던 모든 의원의 코가 납작해지고 기가 꺾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성의 미움과 멸시로 국왕 업무를 시작했던 샤를 5세는 루브르 궁전 및 도서관 건설을 통해 마침내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인생을 마감했다. 샤를 5세 시대에 살았던 시인 유스타시 데샹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랫말을 썼는데 거기에는 왕을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우리는 그를 솔로몬이라고 부른다

백성과 외국인에게서 고통 받았지만

지혜로 영토를 넓히고 부를 쌓았으며

곳곳에 성을 쌓아 올렸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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