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o May 05. 2024

부디커와 킹스크로스역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다리 서쪽 끝부분에는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세 여성이 마차를 타고 달리는 형상을 한 동상이다. 셋 중에서 왕관을 쓴 여성은 한 손에 창을 높이 들었다. 다른 손은 마치 도전을 선언하는 것처럼 높이 올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없고 단호한 의지가 담겼다.


이 동상은 19세기 말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영국 조각가인 토머스 토니크로프트가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의 후원을 받아 만든 것이다. 런던시의회는 런던시청과 협의해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웨스트민스터다리 옆에 있는 빅토리아 임뱅크먼트(둑)에 동상을 세웠다. 동상에는 흥미로운 글이 새겨졌다.


‘카이사르는 몰랐으리라. 그들의 번영이 흔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동상의 주인공은 부디커인데, 보아디카나 부디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녀는 켈트족의 한 부족인 이케니족의 여왕이었다. 나머지 두 여성은 부디커의 딸이었다. 


제정로마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로마군은 브리타니아를 점령했다. 이케니족은 이 무렵 오늘날 서폴크, 노어폴크, 케임브리지셔 등에 살았다. 그들은 첫 50년 동안은 로마군과 평화롭게 공존했다. 로마군이 여러 전투에서 이케니족을 누른 뒤 자치권을 가진 동맹으로 삼은 덕분이었다.


이케니족은 프라스타구스라는 왕이 이끌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네로 황제를 그의 두 딸과 함께 공동 상속인으로 지정했다. 네로 황제에 대한 존경의 뜻을 표시하면서 부족의 자치권과 평화를 지키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프라스타구스가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네로는 프라스타구스 왕의 유언장에 담긴 내용을 읽고 격분했다. 왕이 그를 모욕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네로는 이케니족 영토를 빼앗고, 왕의 가족과 친척에게는 벌을 주라고 지시했다. 로마군은 이케니족의 영토로 진격해 세상을 떠난 왕의 부인인 부디커와 그녀의 두 딸을 사로잡았다. 


부디커는 폭행당했고 고문까지 당했다. 두 딸은 성폭행을 당했다. 부디커의 가족은 땅과 재산을 압수당한 뒤 쫓겨났다. 부족민의 존경을 듬뿍 받은 선왕의 부인과 두 딸이 로마군으로부터 끔찍한 대우를 받은 모습을 본 이케니족은 분노했다. 그들은 로마에 맞서 싸우겠다며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부디커는 선봉에 섰다.


“내가 복수하려는 것은 땅과 재산을 잃어버린 귀족 때문은 아닙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평범한 이케니족의 백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통 받은 내 몸과 더럽혀진 두 딸의 순결 때문입니다.” 


이케니족의 부디커가 로마군에게 모욕을 당했으며, 이에 분개한 이케니족이 로마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어섰다는 소식은 브리타니아 전역에 퍼져나갔다. 이야기를 들은 다른 부족도 부디커 저항군에 합류해 싸우기로 맹세했다. 브리타니아에 들어가 살던 켈트족, 즉 갈리아족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부디커에게 합류한 브리타니아 각 부족의 병사는 10만 명을 넘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로마군을 게르만 땅에서 몰아낸 아르미니우스와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상륙을 저지했던 조상의 자유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부디커는 여성이었지만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다.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키가 커서 갈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찰랑거려 마치 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목소리는 쉰 것 같으면서도 가슴을 찌르는 깊이가 있었다. 그녀는 늘 황금색 목걸이를 차고 상의로 튜닉을 입었으며, 그 위에 브로치로 단단히 죈 외투를 걸쳤다. 이케니족은 이런 부디커를 우러러봤는데, 일부 사람은 그녀를 신의 환생이라고 생각했다.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브리타니아 여러 부족이 부디커의 호소를 따른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타니아를 점령한 뒤 현지 귀족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하사했다. 그런데 당시 징세관이던 데키아누스 카투스가 이 돈을 나눠주지 않고 압수해버렸다. 또 브리타니아 사람들은 로마인의 고금리 대출에 시달렸다. 로마 원로원 의원인 세네카 같은 사람은 브리타니아 사람들에게 필요도 없는 돈을 억지로 빌려준 뒤 고금리를 내라고 강요했다. 


부디커는 어디부터 공격할지를 놓고 브리타니아 반군 지도자들과 논의하지 않았다. 대신 신의 뜻을 물어 결정했다. 그녀가 활용한 방법은 바로 토끼였다. 부디커는 토끼 한 마리를 품에 안았다가 군대가 진군하기 전에 풀어주었다. 토끼가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는지를 보고 진군 방향을 결정했다. 


“신께서 여기로 가라고 하십니다. 모든 일은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 신의 뜻입니다.”


부디커 반군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로마 식민지인 콜체스터였다. 이곳은 브리타니아를 점령한 로마군 퇴역병들이 이주해 만든 도시였는데, 퇴역병들은 켈트족을 학대하고 착취했다. 또 이곳에는 암살당한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신전 건립비와 유지비도 모두 지역 주민들이 내야 했다. 이 때문에 켈트족 주민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당시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는 웨일스 인근 섬에 숨은 브리타니아 반군을 소탕하기 위해 진군 중이었다. 퇴역병들은 수에토니우스가 없는 동안 브리타니아 통치를 책임진 징세관 데키아누스에게 지원병을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보낸 병력은 고작 200명이었다. 그것도 로마군 정규병이 아니라 갈리아에서 데려온 보조병이었다. 


콜체스터 퇴역병들은 켈트족 반군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부디커의 반군은 이 도시를 점령해 로마군 기지를 불태웠다. 기지에 살던 로마 민간인을 살해하고 클라우디우스 신전은 파괴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네로 동상이 서 있었는데, 반군은 이 동상에서 목을 잘라내 승리 기념품으로 가져갔다. 


콜체스터 인근에는 퀸투스 페틸루스 케리알리스가 지휘하는 에스파냐 9군단이 주둔 중이었다. 그는 콜체스터를 구하기 위해 군단을 이끌고 달려갔지만 반군의 습격에 휘말려 전멸하고 말았다. 케리알리스와 소수의 기병만이 목숨을 구해 달아날 수 있었다.


기세를 올린 부디커 반군은 이어 오늘날 런던인 론디니움을 공격했다. 당시 브리타니아로 건너간 로마 민간인 대다수는 론디니움에 살았다. 저항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대부분 민간인은 다른 로마군 기지로 달아났다. 저항군은 도망가지 못하고 남은 로마인을 고문하고 학살했다. 이어 인근 도시 알반스도 론디니움과 똑같은 운명을 겪었다. 부디커 반군이 세 도시에서 학살한 로마 민간인과 퇴역병은 무려 7만~8만여 명에 이르렀다.


부디커가 이끄는 이케니족을 중심으로 한 켈트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총독 수에토니우스에게 전해졌다. 그는 웨일스 공략을 포기하고 서둘러 브리타니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론디니움을 구하러 곧바로 달려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의 군단마저 궤멸될 우려가 컸다. 


수에토니우스는 게르마니아 14군단을 정비하고 다른 지역 군단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여러 사정 때문에 병력 지원을 받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14군단 등으로 이뤄진 1만여 병력만으로 30만 명까지 늘어난 부디커 반군과 맞서야 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웨스트 미들랜즈에 진영을 차렸다. 뒤에는 숲이 우거지고 앞에는 좁은 협곡이 있는 지형이었다. 적은 병력으로 수가 많은 반군에 맞서기에 유리한 곳이었다. 부디커의 반군은 우세한 병력 수만 믿고 그곳으로 쳐들어갔다. 


부디커 반군이 쳐들어왔지만 수에토니우스의 14군단 병사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기만 하던 병사들은 반군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일제히 창을 던져 기선을 제압했다. 갑자기 공격을 당한 반군은 깜짝 놀라 당황하면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좁은 협곡에서 도망갈 길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었다. 이 틈을 노린 로마군은 쐐기 모양 대형을 갖춰 전진했다. 보조병들도 같은 대형으로 전진했고, 기병대는 양쪽에서 달려들어 반군을 공격했다. 


제대로 된 전략 없이 병력만 믿고 달려들었던 부디커 반군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수많은 반군 병사가 이날 목숨을 잃었다. 겨우 살아남은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버렸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날 전투에서 죽은 켈트족은 8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반면 로마군 희생자는 겨우 400명이었다고 한다. 


부디커는 달아날 곳은 없다고 판단했으며 달아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마차에 두 딸을 태운 뒤 남은 이케아족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녀는 이케아족 병사들이 마지막 한 명까지 땅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을 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딸이 어떻게 됐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두 딸도 전투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켈트족 반란에 화가 난 수에토니우스는 브리타니아 곳곳에서 보복을 펼쳤다. 수많은 켈트족 주민을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웠고, 재산을 약탈했다. 하지만 이런 보복이 다시 브리타니아의 반란으로 이어질지 모른다고 우려한 네로 황제는 수에토니우스를 본국으로 송환하고 온건한 성격의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를 총독으로 파견했다. 


로마군은 비록 적장이었지만 이케니족의 여왕이었던 부디커의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 브리타니아의 후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부디커를 로마군이라는 침략자에 맞서 싸운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영웅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부디커의 이야기는 살이 붙여지고 피가 더해져 영웅의 스토리로 재탄생하게 됐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과 조지 국왕 및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많은 시인이 그녀의 이야기를 시로 찬양했다. 


영국 ‘텔레그라프 신문’은 2005년 한 기사에서 ‘부디커는 현대 영국인의 ‘어머니-황제’인  빅토리아 여왕의 역사적 원형’이라고 평가했다. 6세기 승려 겸 작가인 길다스는 <영국의 점령과 폐허>라는 책에서 ‘반란을 일으킨 암사자가 로마 통치를 더 강화하기 위해 브리타니아에 왔던 총독들을 학살했다’고 기술했다.


킹스크로스역이 있는 킹스크로스 지역의 원래 이름은 ‘브로드 포스 브리지’였는데 부디커의 반란 이후 ‘배틀 브리지’라고 불리게 됐다. 로마군과 부디커 반군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부디커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주인공 해리 포터가 마법의 나라로 가는 통로로 이용했던 킹스크로스 역 9번과 10번 플랫폼 사이에 묻혔다고 한다. 물론 지금 이곳에는 그녀의 무덤이 없다. 그녀의 무덤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시 앤드 칩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