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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y 15. 2024

비운의 페르디난트와 프라하 성


1.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 왕궁의 접견실에 앉은 안나 마리아의 속은 타들어 갔다. 얼굴에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속이 답답해진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화창한 봄에 걸맞지 않게 바깥 날씨는 우중충했다.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 매우 어두웠다. 


‘어머니는 그분의 나이가 많고 건강이 안 좋다며 걱정하셨지. 주변에서 결혼을 극력 만류한다고도 하셨어. 몸이 얼마나 나쁘기에 그럴까?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해.’


안나 마리아는 곧 결혼식을 올릴 미래의 남편 페르디난트 1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첫 결혼식에 페르디난트 1세는 참석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황궁에서 보낸 대리인이 안나 마리아 옆에 섰을 뿐이었다.


토리노 결혼식을 치르고 곧장 빈에 달려간 안나 마리아는 호프부르크 왕궁에 바로 들어갈 수 없었다. 쇤브룬 궁전에서 이틀을 보낸 뒤에야 겨우 남편이 될 페르디난트 1세를 접견할 기회를 얻었다. 빈의 결혼식은 일부 인사만 참가한 가운데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개 결혼식은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호프부르크 왕궁 인근의 아우구스티너키르헤(아우구스트 교회)에서 치른다고 들었는데 왜 이번 결혼식은 궁전에서 간소하게 거행하는지 모르겠어.’


18~19세기 유럽의 귀족, 왕실 가문에서는 아들이건 딸이건 10대 중반이 되면 결혼을 시키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스물일곱 살인 안나 마리아는 노처녀 중에서도 노처녀였다. 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영부영하다 결혼할 시기를 놓쳐 버린 게 화근이었다.


안나 마리아는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다. 성격은 차분하고 온순했다.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벌게진 얼굴을 식히려면 눈을 감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서는 안 돼. 그분의 건강이 어떠하든 하느님이 정해주신 배필이니 천생의 인연으로 생각하고 평생을 함께 늙어야 해.’ 


“삐걱!”


접견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나 마리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에서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녀는 하마터면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사내는 너무나 이상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해괴하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


안나 마리아는 다소 충격을 받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약간 비틀거리며 접견실로 들어오더니 안나 마리아 앞에 섰다. 그는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불편할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바…반가워요. 내…내가 페…르디난트요. 다…당신의 나…남편이 될 사…람이라오.”

“안녕하세요. 전하. 안나 마리아예요.”


안나 마리아는 눈을 아래로 깔고 무릎을 약간 굽혀 페르디난트에게 인사했다. 페르디난트도 눈을 깔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윽!”


인사를 주고받던 페르디난트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는 접견실 바닥에 드러누워 온몸을 비틀었다. 눈은 뒤집혀 흰자가 보일 정도였고 입에서는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전하!”

안나 마리아는 너무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지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이 접견실 안으로 달려왔다. 그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페르디난트의 윗옷 단추를 두어 개 풀고 그의 몸을 꼭 잡았다. 페르디난트는 한참이나 몸을 떨다 1분 정도 후에 진정을 되찾았다. 그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바닥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만나자마자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페르디난트는 두 눈이 둥그레진 안나 마리아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표정이었다. 남편이 될 사람이라서 처음 만났는데 1분도 안 돼서 발작을 일으켰으니 놀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드…들으셨겠지만 내…내게는 태어날 때부터 병이 있었다오. 저…전두증이라고 해서 하…하루에도 여…여러 차례 발작을 이…일으키는 병이지요. 게…게다가 말도 더…더듬고, 몸도 저…정상이 아니라오. 다다다…당신처럼 우아한 여인과 함께 펴…평생 살기에는 부족한 모모…몸이지만 이해해 주…주시기를 바라오. 태태…태의가 앞으로 며…몇 년 못 살 거라고 했으니 그다지 오래 고생하지 아아…않아도 될 거요.”


안나 마리아는 페르디난트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얼굴에는 홍조가 남았지만 마음은 상당히 진정된 상태였다. 그는 곧 남편이 될 페르디난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고 우아하게 웃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고난을 주신답니다. 그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전하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약간 불편한 일이 많을 것 같지만 하느님이 저에게 주신 임무라고 생각하고 전하를 도와드릴 것입니다.”


페르디난트는 흠칫 놀라며 안나 마리아가 잡은 손을 뺐다. 그는 곧 아내가 될 이 여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단순한 미사여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입발림이라 하더라도 듣기 좋았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새로운 인생에 대한 희망이 조금씩 피어났다.


2. 


페르디난트 1세(재임 1835~48년)는 태어날 때부터 불운한 사람이었다. 사촌 사이인 아버지 프란츠 2세와 어머니 나폴리의 마리아 테레사가 근친결혼을 하는 바람에 발생한 부작용을 몽땅 아들인 그가 떠안아야 했다. 뇌척수액이 제대로 순환하지 못해 뇌 이상을 일으키는 수두증, 뇌전증과 언어 발달 장애를 선천적으로 겪게 된 것이었다. 


페르디난트에게는 2년 먼저 태어난 누나 마리 루이즈를 포함해 형제자매 7명이 있었지만 그만 빼고 아무도 장애인이 아니었고 병도 없었다. 부모의 근친결혼 후유증은 오롯이 그에게만 유전됐던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을 심하게 더듬거나 제대로 못 했다. 여섯 살까지 혼자서 걷지도 못해 주변에서 늘 도와줘야 했다. 뇌전증 때문에 하루에 최고 스무 번이나 발작을 일으켰다. 의학 지식이 부족한 시대여서 부모는 아들의 이상이 그들의 근친결혼 때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프란츠 2세는 페르디난트를 숨겨 키우다시피 하면서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았다. 그에게 교육의 길을 열어 준 사람은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자 그에게는 두 번째 새엄마인 모데나의 마리아 루도비카 베아트리체였다. 


페르디난트는 질병 이외에는 아주 유순하고 사교성이 뛰어난 아이였다. 그래서 새엄마와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베아트리체는 그녀의 아이가 아닌 데다 장애까지 가진 페르디난트를 매우 어여삐 여기면서 아끼고 사랑했다. 그녀는 새 아들을 직접 돌보기로 하고 교사진을 제대로 꾸려 가르치기로 했다. 그녀가 채용한 교사 중 한 명은 요제프 칼라산츠 프라이어 폰 에르베르그 부부였다. 폰 에르베르그는 식물학자, 역사학자였으며 문화예술 애호가였다. 또 철학, 법학, 문학, 언어에도 능통했다.  


폰 에르베르그에게 배운 덕분에 페르디난트는 질병 뒤에 숨겨졌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프란츠 2세는 아들을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게 했지만 폰 에르베르그는 달랐다. 그는 발작을 일으키는 한이 있더라도 페르디난트가 많은 사람을 만나게 했다. 그에게 읽기, 쓰기, 승마, 댄싱, 펜싱, 조경, 음악을 가르쳤다. 페르디난트는 사실 다재다능한 소년이어서 배우는 족족 받아들였다. 특히 미술에 소질이 뛰어나 훌륭한 그림을 그려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자라더라도 제대로 걷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었던 페르디난트는 성인이 된 뒤에는 발작을 일으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문제를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조금 나아진 걸 본 프란츠 2세는 뒤늦게 아들을 결혼시키기로 했다. 혹시 아내를 맞아 잠자리를 같이 하면 증세가 더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데다 어찌 됐든 제국의 후계자인 만큼 후사를 봐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아들인 프란츠 칼이 먼저 결혼해 아들을 낳은 것도 황제의 마음에 부담이 됐다. 


페르디난트가 결혼한 것은 유럽의 황태자로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늦은 서른여덟 살 때였다. 질병과 장애 때문에 결혼 상대를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란츠 2세가 고른 며느리는 사르디냐 왕국의 국왕 빅토르 에마누엘레 1세의 딸인 사보이의 안나 마리아였다. 두 사람도 먼 친척이었다. 페르디난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의 증손자였고, 안나 마리아는 외증손녀였다.


아버지가 7년 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안나 마리아는 어머니, 그리고 두 언니, 여동생과 함께 외할아버지에게 얹혀살았다. 1831년에 빈에서 결혼할 때 그녀의 나이도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스물여덟 살이었다. 대부분 귀족, 왕족의 딸이 10대 중‧후반에 결혼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만혼이나 마찬가지였다. 결혼식을 앞두고 주변에서는 걱정이 터져 나왔다.


“황태자 전하는 초야를 제대로 치르지도 못할 거야.”

“초야는커녕 앞으로 평생 단 한 번의 잠자리도 갖지 못할지 몰라.”


프란츠 2세는 결혼을 앞둔 아들이 사내 노릇을 제대로 할지, 후사를 볼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는 황궁의 태의를 몰래 불러 물었다.


“자네도 소문을 들었나?”

“소문이라니요?”

“황태자가 초야를 제대로 치르기 어려울 거라는 소문 말일세.”


태의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태의는 고개를 들고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폐하, 진실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프란츠 2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태의는 부담스러운지 턱을 한 번 만지고 입을 열었다.


“소문이 사실로 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리적 부담이 커지면 발작으로 변하게 됩니다. 밤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결국 전하는 평생….”


프란츠 2세는 더 이상 듣기 괴로운 듯 손을 가로저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태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겠지.”


소문과 태의의 예상은 현실이 됐다. 페르디난트는 결혼 첫날밤 다섯 번이나 발작을 일으켰다. 초야는 꿈도 못 꾸는 게 현실이었다. 그는 평생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두 사람이 태의의 말대로 평생 성관계를 갖지 못한 것 아니냐고 추측한다.


페르디난트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리아 안나가 그를 잘 이해해 주는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종교적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매우 온화하고 따스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처음에는 남편의 상황을 보고 부담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이 생각보다 현명하고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 남편에 대한 사랑이 커졌다.


3. 


‘내가 죽으면 페르디난트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 이 아이 엄마는 물론 아이를 아껴 주던 마리아 루도비카마저 벌써 세상을 떠나지 않았나? 오스트리아는 어떻게 될까? 이 아이는 도저히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거야. 어떻게 해야 하나?’


프란츠 2세는 죽을 때까지 아들과 나라 걱정만 했다. 주변의 여러 사람과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결심을 내려둔 상태였다. 그는 죽기 직전 아들과 대신들을 모두 불러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오. 하지만 황태자는 건강 때문에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상태요. 그러하니 메테르니히 총리와 나의 동생인 프란츠 카를 대공, 국무장관 콜로브라트 공작이 섭정위원회를 만들어 정부를 운영하도록 하시오. 황태자! 국사를 결정할 때 반드시 섭정위원회의 견해를 듣도록 하거라.”


페르디난트는 1835년 3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화려한 대관식은 치르지 않았다. 다만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간소한 법적 즉위 절차만 진행했다. 이런 일은 오스트리아 역사상 처음이었다.


4. 


엄청난 노랫소리와 함성이 연이어 가며 호프부르크 왕궁을 향해 다가왔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부르는 노랫소리 정도였던 게 나중에는 지축을 흔드는 천둥소리로 커졌다. 함성이 얼마나 거대했던지 왕궁 창이 미세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페르디난트는 영문을 몰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밖에서는 수백, 수천 개의 횃불이 어른거렸다. 그는 불안한 마음에 접견실로 나갔다. 마침 콜로바르트 총리가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제는 늘 그렇듯이 말을 더듬으면서 어눌하게 물었다.


“초…총리, 도…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하…한밤중에 왜 소란이 벌어진 것이지요?”


콜로바르트는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혀…혁명?”


페르디난트는 총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물었다.


“혀…혁명이라니? 그…그게 무…무슨 말이오?”


언제 들어온 것인지 루이 대공이 총리에게서 두어 걸음 뒤에 서 있었다.


“백성은 폐하께서 물러나시기를 요구합니다.”


페르디난트는 루이 대공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나…나더러 무…물러나라니 그…그게 무슨 말입니까?”

“폐하께서 질병 때문에 국정을 제대로 못 꾸려 나라가 어지러워졌다는 게 백성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물러나시고 건강한 다른 황제를 즉위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페르디난트는 뜻하지 않은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접견실 책상 앞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이미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보고를 여러 번 들어 상황을 잘 알았다. 오스트리아만 그런 게 아니라 온 유럽이 난리법석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각종 질병 때문에 몸이 건강하지 못했지만 그는 의식까지 혼미하거나 정신을 놓아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당신들의 새…생각은 어떻소?”


콜로바르트와 루이 대공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메테르니히 공은 모든 관직에서 사퇴한다면서 외국으로 달아났습니다. 폐하께서도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물러나시는 제 나을 것 같습니다. 백성의 원성이 더 높아지면 폐하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폐하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주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페르디난트의 등 뒤에서 들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황후가 침실에서 나와 창가에 서 있었다. 시선은 창밖의 소란을 향하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지금 상황은 협박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콜로바르트는 황후의 반박에 지지 않으려고 강하게 대꾸했다. 페르디난트는 황후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보면 너무 유순하고 나약하지만 달리 보면 정말 강인하고 날카로운 표정이 얼굴에 분명했다.


“밤새 폐하와 잘 상의할 것이니 지금은 돌아가세요. 두 분이 하실 일은 이곳에서 폐하를 협박하는 게 아니라 폭도들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콜로바르트와 루이 대공은 황후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황제 부부가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현명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그들은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한 뒤 접견실 밖으로 나갔다.


페르디난트 부부는 다음날 아침 일찍 체코의 올로무츠로 피신했다. 일단 시간을 벌어 보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콜로바르트와 루이 대공은 그곳까지 쫓아가 황제에게 물러나야 한다고 강요했다. 페르디난트는 끝까지 퇴위를 거부했다. 그는 아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퇴위하면 당신도 나를 버리고 떠날 것 아니오? 그러면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긴 채 혼자 외롭게 살다 죽게 되겠지요?”


안나 마리아는 남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물러나서 편안하게 함께 여생을 보내자고 설득했다.


“제가 달아나려고 했으면 벌써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폐하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보다 폐하를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모르지만 폐하는 누구보다 명민하고 재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병만 아니라면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명군이 되실 분입니다. 게다가 저는 모든 걸 떠나서 폐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아끼고 사랑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아이는 없지만, 서로 아끼고 돌보면서 평생을 함께 살 겁니다.”


페르디난트는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물러난 뒤에도 황제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는 조건으로 퇴위하기로 했다. 그날은 1848년 12월 2일이었다. 그는 올로무츠의 대주교 궁전에서 퇴위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 조카 프란츠 요제프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 


5. 


의기소침한 황제 부부는 곧바로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갔다. 기차가 역에 도착했을 때 프라하 사람들은 두 사람이 인스부르크로 가는 중에 잠시 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제 부부는 뜻밖에도 기차에서 내리더니 바로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 버렸다. 


19세기에 프라하성은 합스부르크 왕실이 갖고 있던 19개 궁전 가운데 하나였다. 왕실 가족이 해외에 소유한 궁전은 다양한 용도로 이용됐다. 휴가 삼아 놀러갈 때 이용하던 숙소이기도 했고, 역병이나 전쟁이 발생했을 때 백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프라하는 당시에는 꽤 큰 도시였다. 프라하 성은 빈의 쇤브룬 궁전과 비교할 만한 규모를 자랑했다. 갓 퇴위한 황제가 자존심을 구기지 않고 지내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또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자쿠피와 플로스코비체에 영지를 갖고 있었다. 여름철에 피서하러 가기에 그곳보다 좋은 곳은 찾기 힘들었다.


페르디난트는 다행히 오래 전부터 프라하에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황제 자리에 오르고 다음해인 1836년 프라하 성의 성 비투스(체코어로는 비타) 대성당에서 열린 보헤미아 왕 대관식 때문이었다. 프라하 시민들은 대관식을 치르러 온 황제를 진심으로 뜨겁게 환영했다. 황제가 구시가지의 시민회관에서 시작해 성 비투스 대성당까지 ‘황제 행차길’을 따라 행진할 때에는 수만 명이 연도에 늘어서 열렬하게 박수를 보냈다. 


프라하에 정착한 페르디난트는 오늘날 시내 중심가인 나로드니 거리에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 어린이를 만나면 사탕을, 빈민을 보면 돈을 나눠주기도 했다. 프라하 시청에 여러 차례에 걸쳐 금화 45만 개에 이르는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프라하 사람들은 보헤미아를 진심으로 아끼는 인자한 황제를 무척 사랑했다. 그래서 그에게 체코어로 ‘페르디난트 도보르티비’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선한 왕 페르디난트’라는 뜻이었다. 합스부르크 황가는 거의 4세기 동안 체코를 통치했지만 여러 황제 중에서 체코 사람들의 호의를 사서 ‘선한 왕’이라는 호칭을 받은 인물은 루돌프 2세와 페르디난트 둘 뿐이었다.


페르디난트는 국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와 아내는 프라하에서 조용하면서도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넉넉한 연금을 받은 덕분에 돈에 전혀 쪼들리지 않고 매우 풍족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인기가 높았던 마리아 안나는 남편을 무척 존경하고 아꼈다. 남편이 수시로 발작을 일으킬 때에는 거리낌 없이 간호사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프라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각종 자선행사에 자주 참석해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음악에 꽤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다. 피아노와 트럼펫을 수준급으로 연주했다. 수시로 아내와 함께 프라하 시내에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다. 때로는 황제가 피아노나 트럼펫을 연주해 주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는 식물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정원사 일을 직접 몸으로 배운 덕분이었다. 과수원예학 공부도 해서 지식이 꽤 풍부했다. 지금도 자쿠피와 플로스코비체의 옛 페르디난트 영지를 방문하면 아주 오래 된 배나무와 사과나무가 늘어선 거리를 지나갈 수 있다. 황제가 몸소 만든 과수원이었다. 


궁정 의사는 프라하에 은거한 페르디난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1875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 동안 프라하 성에서 여생을 보냈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보다 보헤미아에 있을 때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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