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아말리아와 로젠베르크 궁전

by leo


1.


“어머니와 크리스티나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저는 안 된다는 거죠?


마리아 아말리아는 눈에 쌍심지를 세우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동 황제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몰아세웠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싹 가셔 종잇장처럼 하얘진 상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황해서 얼굴이 주톳빛이 돼 버렸다. 곁에 선 시종장은 난처한 탓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녀는 간곡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얘야! 내가 이러는 건 제국을 위해서란다. 이렇게 해서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제국은 곳곳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어.”


마리아 아말리아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제국의 이익이라고요? 어머니의 욕심은 아니고요? 왜 모든 자식을 어머니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희생시키려고 하시지요? 우리는 장기판의 말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사람!”


마리아 아말리아는 급기야 바닥에 쓰러져 눈물을 펑펑 쏟았다. 너무 억울하고 가슴이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다가온 사랑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게 정말 한스러웠다. 아름다운 대리석이 깔린 쇤브룬 궁전의 바닥은 그녀의 눈물로 얼룩졌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이면서 보헤미아의 여왕,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낳은 16남매 중 여덟 번째 아이이자 딸로서는 여섯 번째였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어릴 때부터 형제자매 중에서 가장 영리하면서 고집이 셌다. 여성이면서 사냥을 좋아해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사냥하러 다녔다.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너그러운 아버지를 매우 좋아했다. 반면 세상사는 물론 가족사마저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어머니와는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순종을 원했지만, 그녀는 옳지 않은 지시는 따르려 하지 않았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스물한 살이던 1767년 빈을 방문한 츠바이브뤼켄 공국의 카를 왕자와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카를 왕자는 고향에 돌아가자마자 부모를 설득해 오스트리아 왕실에 청혼장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 빈의 총리대신이던 카우니초 공작은 이 청혼에 결사반대했다.


“폐하! 츠바이브뤼켄 공국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약한 나라입니다. 그곳과 사돈이 돼 봐야 오스트리아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외교를 위해 딸의 결혼을 활용하려던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도 총리와 똑같이 생각했다. 그녀는 딸이 카를 왕자와 결혼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내 생각도 총리와 같아요. 츠바이브뤼켄의 청혼장은 돌려보내고 다른 혼처를 찾아보도록 해요.”


어머니가 청혼장을 거부했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 아말리아는 눈물을 쏟으며 거칠게 항의했지만 어머니가 정한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마리아 아말리아가 정말 원통했던 것은 어머니의 이중성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깊이 사랑했던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했다. 게다가 모든 자식 중 가장 아꼈던 넷째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는 사랑하는 사이였던 작센 공작 알베르트와 결혼하게 허락했다.


어머니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허락하면서 다른 자식은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마리아 아말리아는 참을 수 없었다. 사랑을 빼앗긴 그녀는 어머니를 원망하게 됐고, 죽을 때까지 어머니와 말도 제대로 섞지 않았다.



2.


마리아 테레지아가 찾아낸 딸의 혼처는 이탈리아 밀라노와 피렌체, 베니스, 제노바의 딱 중간지점에 있는 파르마 공국을 다스리던 페르디난트 공작이었다. 당시 파르마 공국의 총리는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외손자 기욤 두 티요였다. 외할아버지의 권세를 등에 업은 두 티요는 페르디난트 공작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마치 그의 나라인 것처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반목하고 먼 친척 국가인 스페인과 손을 잡은 상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의 힘을 약화시키고 오스트리아, 스페인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곳을 찾다 파르마 공국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미모가 탁월한 딸이 바람둥이로 소문난 페르디난트 공작을 구워삶게 해서 두 티요를 몰아내고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파르마 공국을 친오스트리아 국가로 바꾸려는 게 그녀의 속셈이었다.


페르디난트 공작은 마리아 아말리아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다. 매우 무례하고 고집이 센 데다 방탕하고 무능력하다고 온 유럽에 소문나 있었다. 귀족은 물론 평민 여성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바람둥이였고, 밤새 교회 종을 울리거나 농민과 함께 밤을 구워 먹는 게 취미라고 할 정도로 성격도 특이했다. 이런 정보를 들은 마리아 아말리아는 미칠 지경이었다.


“무능력한 바람둥이이라고 온 유럽에 소문이 자자한 사람에게 저를 보내신다고요? 어머니, 지금 제정신이신 거예요?”


마리아 테레지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딸을 나무라기보다는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파르마로 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파르마로 가면 엄청난 지참금을 챙겨 주마. 스페인 왕실에서도 너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단다. 남편을 구워삶아서 파르마를 마치 네 나라처럼 꾸리면 돼. 남편이 바람을 조금 피운다고 해도 그게 무슨 큰일이겠니? 그냥 두 눈을 꼭 감고 모른 척하면 되지 않겠니?


4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머니와 공동 황제가 된 마리아 아말리아의 큰오빠 요제프 2세도 페르디난트 공작과의 결혼에 찬성했다. 정략결혼에 익숙하던 언니, 여동생도 모두 결혼을 싫어하는 마리아 아말리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궁지에 몰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어쩔 수 없어. 어머니의 마지막 제안을 거부하면 궁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야. 어머니 성격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일이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두고 보라지.’


마리아 아말리아는 1769년 페르디난트 공작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는 남편을 싫어한다는 걸 굳이 숨기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지참금으로 대규모 파티를 열거나 사치를 일삼았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걸 직접 확인한 뒤에는 귀족 여성으로 구성된 시녀를 배제하고 왕실 근위대에서 잘 생긴 병사를 뽑아 시중들게 했다. 밤에는 몰래 시내로 나가 클럽에서 노름을 즐기기도 했다. 남편이 다른 여성과 밀회를 즐기러 가면 궁전 침실에서 근위대 병사들과 놀아났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파르마 귀족들은 마리아 아말리아를 매우 싫어했다. 식사 모임을 갖거나 파티를 열 때면 뒤에서 그녀를 헐뜯기 일쑤였다.


“공작부인의 사치는 우리처럼 작은 나라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야. 그 더러운 행실은 고대 로마 제정 시대 3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내였던 메살리나에 비유할 정도야.”

“자네 말이 맞아. 메실리나는 장애인이었던 남편을 무시하면서 무수한 남자와 놀아났잖아? 그녀와 공작부인 사이에 차이가 뭔지 모르겠군.”


마리아 아밀리아는 거꾸로 귀족을 ‘무능하고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부류’라고 멸시했다. 그녀는 귀족과는 달리 백성에게는 인기가 높았다. 가난한 사람을 후하게 도와준 덕분이었다. 그녀는 수시로 축제형 파티를 열었는데 귀족과 평민 모두 참가해 같은 음식을 즐기게 했다.



3.


2년 동안 파르마 공국에서 지내면서 나라 사정을 완전히 파악한 마리아 아말리아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무능한 남편에게 권력을 내놓으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나라를 이대로 두면 얼마 가지 않아 망할 거예요. 당신은 정치에 소질은커녕 관심도 없으니 앞으로 정치는 내가 맡아서 하겠어요. 당신은 늘 하던 대로 바람이나 피우고 사냥이나 하세요.”


페르디난트 공작은 아내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정치에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재미도 없는 정치에 간여했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손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난 2년 동안 지켜본 바로는 아내는 통이 크고 대담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남자보다 정치를 잘할 것이라는 판단도 들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나는 도장만 찍어 줄 테니까.”


국정을 책임지게 된 마리아 아말리아는 다음날 당장 두 티요를 해임했다. 대신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가 추천한 호세 델 라노를 총리 자리에 앉혔다. 이듬해에는 호세 델 라노마저 해임하고 파르마인 총리를 궁에 들였다. 외국 정부의 비밀 지시를 받는 외국인은 모두 몰아내고 파르마 공국에 충성하는 파르마인으로만 내각을 꾸렸다. 그녀는 첫 파르마인 내각 회의에서 당당하게 속마음을 밝혔다.


“파르마 공국은 오스트리아, 스페인, 프랑스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내외에 천명합니다.”


딸이 스페인, 오스트리아 출신 정치인을 모두 배제했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깜짝 놀라 프란츠 자베르 볼프강 백작을 파르마로 보냈다. 딸을 말리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무척 걱정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시면 오스트리아는 물론 파르마에도 이익이 될 게 없습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어머니의 지시를 들고 온 백작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에게 분명히 전하세요. 더 이상 빈이나 마드리드에서 편지를 받지 않겠다고요. 파르마 공국은 오스트리아,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는 뜻도 전하세요. 백작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이곳에 머무르지 마시고 내일 당장 빈으로 돌아가세요.”


마리아 아말리아는 파르마 공국의 독립을 수호하고 국가정신을 고양하고 문화예술을 증진시켰다. 파르마 공국의 백성은 그녀를 ‘라 마타’ 또는 ‘라 시뇨리아’라고 불렀다.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부인’이라는 뜻이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여왕’이었다.


4.


마리아 아말리아의 통치 아래 성장을 이어 가던 파르마 왕국에 큰 불운이 닥쳤다. 원인은 당시 전 유럽을 휩쓸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였다.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1796년 5월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나폴레옹은 파르마 공국으로 쳐들어가기 전 페르디난트 공작에게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 남부로 내려가도록 길을 내주면 파르마 공국은 건드리지 않겠소.’


무능력했지만 자존심은 강했던 페르디난트 공작은 나폴레옹의 편지에 답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나폴레옹은 다시 편지를 썼다.


‘그렇다면 파르마 공국을 내놓으시오. 사르디냐 섬에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 그곳에서 가족과 여생을 보내시오.’


페르디난트 공작은 이번에는 아예 거절하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더 화가 난 나폴레옹은 주저하지 않고 파르마 공국에 쳐들어갔다. 페르디난트 공작은 파르마 공국의 공작이라는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 군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프랑스 장군이 담당했고, 백성에게서 걷은 세금은 프랑스 군대를 먹여 살리는 데 쓰였다.


나폴레옹은 급기야 1802년에는 파르마 공국을 합병하고 페르디난트 공작을 독살한 뒤 마리아 아말리아를 추방했다. 그녀는 두 딸을 데리고 남편 장례식을 치른 뒤 친정인 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빈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조카인 황제 프란츠 2세는 숨기지 않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고모! 빈에서는 아무도 고모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파르마 공국에 가셔서 오스트리아의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신 걸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치욕스러웠고 당혹스러웠다. 프란츠 2세는 그녀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레오폴트 2세의 장남이었다.


“자네가 빈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네.”

“저는 고모를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싫어하니 아무리 황제라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빈 대신 프라하로 가십시오. 프라하 성의 왕궁을 고모께 빌려드리겠습니다.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황제의 설명을 들은 마리아 아말리아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두 딸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아 카를로타를 데리고 프라하 성에 들어가 로젠베르크 궁전에서 살았다. 이 궁전은 프라하 성의 출구 부분인 유일주스카 거리에 있는 건물이다. 카를교에서 바라보면 길게 늘어선 궁전의 가운데 부분에 있는 아주 연한 초록색 건물이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18세기 중엽 ‘귀족 여성을 위한 왕립 재단’을 설립하고 본부를 프라하 성의 로젠베르크 궁전에 두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난해진 프라하 귀족 여성이 이곳에 모여 살게 했다. 당시 24세 이상 귀족 여성 30명이 궁전 1~2층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 재단의 상징적 이사장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큰딸이자 마리아 아말리아의 큰언니인 마리아 안나였다. 프란츠 2세 황제는 남편을 잃고 재산도 없는 고모가 거처하기에 이곳보다 나은 곳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프라하에 갈 때부터 건강이 나빴던 마리아 아말리아는 프라하 성에서 2년간 외롭게 살다 1804년 58세를 일기로 한 많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죽어서도 다른 왕족처럼 빈에 돌아가지 못했다. 빈 왕실은 그녀의 심장만 떼어내 빈으로 이송해 호프부르크 왕궁 부속 아우구스티너키르헤 교회의 왕족 심장무덤(헤르츠그루프트)에 안치했을 뿐 시신은 프라하성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 묻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마리아 아말리아가 세 살 때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보헤미아 여왕 대관식이 열렸던 곳이었다. 결국 그녀는 죽어서도 평생 미워했던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었다.


마리아 아말리아가 세상을 떠난 뒤 두 딸은 모두 수녀가 됐다. 둘은 한동안 프라하 성에서 지내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파르마로 돌아가 수녀원에서 살며 평생을 기도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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