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브라만테의 템피에토

by leo


로물루스가 고대 로마를 건국한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 전망대에서 테베레강 건너편을 바라보면 멀리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보인다. 돔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숲이 꽤 우거진 나지막한 언덕이 나타나고, 언덕 아래에는 고색창연한 각종 건물이 이어진다. 언덕에서 윤곽만 보노라면 로마 시내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선입견을 갖는 바람에 이곳을 둘러보지 않는다면 나중에 꽤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이곳은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빛과 향기를 가진 로마의 숨은 보석이기 때문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명부터 알아보자. 고대 로마 시대에는 ‘테베레강 너머 지역’이라는 뜻인 트란스 티베리움으로 불린 트라스테베레다. 로마 서민 계층이 주로 모여 사는 곳인데 매우 독특하고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지역으로 유명하고 인기가 높다. 한마디로 로마이면서도 로마 같지 않은데, 사실 중세 로마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담은 ‘진짜 로마’인 곳이다. 벼룩시장도 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면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골목길도 있고, 현지인과 관광객이 섞여 야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크고 작은 광장도 있다.


트라스테베레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둘러보고 언덕을 넘어갈 수도 있고, 판테온을 살펴본 뒤 뒷길로 직진해서 가리발리 다리를 건너도 된다. 이 글은 팔라티노 언덕 전망대에서 시작했으니 이곳에서 내려가 포로 로마노를 거쳐 카피톨리노 언덕을 통해 가는 경로를 택하기로 한다.



카피톨리노 언덕의 계단을 내려가 베네치아 광장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짓기 시작했고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완성한 마르켈루스 극장이 나타난다. 극장을 지나면 넓지도 좁지도 않은 광장이 보이고, 맞은편에는 긴 탑을 가진 고색창연한 교회가 우뚝 서 있다.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다. 많은 관광객이 교회 앞에 줄을 서 있다. 사람 얼굴 모양의 원반 부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것이다. 교회 전랑 왼쪽 끝에 있는 보카 델리 베리타, 관광객에게 최고 인기를 자랑하는 ‘진실의 입’이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가 세워진 곳은 고대 로마 시대에는 포룸 보아리움이라고 불렸다. 보아리움은 보아리우스의 복수로 ‘소’, ‘가축’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포룸 보아리움은 ‘소 시장’, ‘가축시장’이라는 뜻이다. 먼 옛날 헤라클레스가 소떼를 몰고 지나갔다는 신화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포룸 보아리움은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 사이인데, 고대 로마 시대에는 시원하게 뚫린 곳이어서 테베레강이 범람하면 이곳으로 물이 흘러들어가 포로 로마노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포룸 보아리움에는 로마에서 최초로 건립된 나무다리가 있었다. 제4대 왕이던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테베레강에 세운 폰스 수블리키우스였다. 물론 지금은 파괴돼서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지금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BC 2세기에 폰스 수블리키우스 바로 위쪽에 돌로 만든 폰테 에밀리오(아이밀리우스 다리)다. 이 다리도 거의 부서져 상판과 교각 일부만 남았다. 폰테 에밀리오 바로 옆에는 19세기에 만든 폰테 팔라티노(팔라티노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통해 테베레강을 건너면 중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트라스테베레에 들어갈 수 있다.


트라스테베레는 로마 시내에서 테베레강 건너편이어서 성벽의 보호를 받지 못해 외적의 침략에 취약했기 때문에 고대 로마 공화정 초기까지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곳이었다. 강을 이용해 무역하던 상선의 선원이나 강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정도만 살았다. 로마가 세력을 확대해 중동까지 정복한 1세기 무렵에는 고향을 등진 유대인이나 시리아인이 많이 살았다. 당시 로마의 기독교인 중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으니 이곳은 당시 로마 기독교의 중심지였다고도 볼 수 있다.


트라스테베레에는 초기 기독교 가정교회였다는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등 유서 깊은 성당이 여럿 있다.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00년이나 앞선 3세기 초 교황 갈리스토 1세(재임 217~222년)가 처음 만든 유서 깊은 성소다. 물론 처음에는 겉으로 드러난 성당은 아니었고 일부 신자가 모이던 가정교회였다.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은 2세기 초에 순교한 성 체칠리아의 집을 당시 교황 우르바노 1세(재임 222~230년)가 가정교회로 바꿔 비밀리에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5세기에 성당으로 다시 탄생했다.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성당 앞의 늑대 분수다. 15세기 최고 건축가 겸 화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만들었고, 17세기 최고 건축가 겸 조각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와 카를로 폰타나가 수리한 분수다. 한마디로 세 거장의 숨결이 깊이 담긴 최고의 분수인 셈이다. 성모 마리아를 담은 성당 정면의 황금색 모자이크도 인상적이다. 성모 마리아는 맑은 하늘의 햇살 아래에서 따뜻하고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아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인다. 주변에는 등불을 든 여인 10명이 서 있다. 모든 사람에게 엄마의 포근한 품을 생각나게 해주는 작품이다.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시작해 트라스테베레까지 온 것은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때문은 아니다. 이곳 바로 뒤에 성 베드로와 관련해서 얼토당토않은 이유 때문에 세워진 작은 성당을 보기 위해서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근거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이곳에는 ‘로마에 르네상스의 문’을 열고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의 모델이 된 기념비적 건축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황당에 이어 당혹, 충격이 이어지는 현장인 셈이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담겼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뒤에는 그다지 높지 않은 자니콜로 언덕이 있다. 팔라티노 언덕 전망대에서 바라봤을 때 숲이 우거진 그곳이었다. 이 언덕은 고대 로마 시대에는 야누스 신의 이름을 따서 야니쿨룸이라고 불렸다. 그때에는 언덕에 작은 성채가 있었다. 로마인은 이곳에 병력을 배치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중세까지만 해도 자니콜로 언덕에는 해가 뜰 때 황금색으로 빛나는 모래 채취장이 있었다. 매일 아침 그 빛이 얼마나 밝았던지 멀리 로마 시내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빛 때문에 이곳에서 엄청난 분량의 황금이 발견됐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모래든 황금이든 해가 뜰 무렵 얼마나 찬란하게 빛났던지 이곳은 중세까지만 해도 몬테 아우레오, 즉 ‘황금의 언덕’으로 불렸다. 몬테 아우레오는 나중에 변형돼 몬토리오로 바뀌었다.


자니콜로 언덕 언저리에는 15세기에 만들어진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이 있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몬토리오의 성 베드로 성당’이지만 흔히 ‘순교한 사도 성 베드로의 성당’으로 불린다. 이 성당에 ‘순교한 사도 베드로’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정말 엉뚱하다. 한마디로 오해였고 착각이었다. 중세에 일부 지식인은 ‘성 베드로가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 자리에서 순교했다’고 믿었다.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15세기 최고의 라틴어 시인으로 평가받는 마페오 베기오조차 1455년에 쓴 시에서 성 베드로의 순교 장소를 몬토리오라고 썼다.


‘축복받은 베드로는 몬테 아우레오에 발자국을 남겼다.’


심지어 현재 성당 홈페이지에도 ‘전설에 따르면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은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한 곳에 지어졌다. 브라만테가 아름다운 템피에토를 순교 장소 바로 위에 건설했다’라고 적혀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기독교조차 공식적으로 이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성 베드로는 바티카누스의 네로전차경기장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믿음이다.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즉 성 베드로 대성당이 그곳에 세워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중세 사람들은 엉뚱하게 성 베드로가 자니콜로 언덕에서 순교했다고 믿었던 것일까? 왜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조차 홈페이지에 그런 역사를 적은 것일까?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성 베드로의 행적을 담은 2세기 기록 『베드로 행록』 37장을 봐야 한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이다. 『베드로 행록』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사형 집행관이여! 그대에게 바라노니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주시오. 다르게는 매달지 마시오. 그 이유는 듣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것이오”라고 요청했다. 글에는 성 베드로가 머리를 거꾸로 한 채 ‘인테르 두아스 메타스(inter duas metas)’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돼 있다. ‘인테르 두아수 메타스’는 ‘두 메타 사이에’라는 뜻이다. 여기서 메타라는 단어가 중세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다.


고대 로마의 전차경기장에는 스피나라는 공간이 있었다. 마차가 달리던 타원형 트랙의 가운데 빈 공간이었다. 오늘날 육상경기장의 가운데 잔디 부분과 똑같았다. 스피나는 전차경기 진행을 돕는 보조자나 경기 도중 부상당한 선수가 몸을 피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긴 모양이 사람 등뼈처럼 생겼다고 해서 스피나라고 불렸다. 전차경기에 나선 선수가 트랙과 헷갈리지 않도록 스피나에는 뾰족한 기둥이나 동상 등이 세워졌다. 그리고 스피나의 양쪽 끝에는 메타라고 불린 원뿔을 3개씩 세웠다. 전차가 회전하는 지점이었다. 전차를 모는 기수들은 기둥을 보고 반환점에 다 왔다는 걸 인식하고 전차의 방향을 틀었다.


성 베드로가 바티카누스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평범한 사람들은 『베드로 행록』 37장에 나오는 메타를 바티카누스 네로전차경기장의 스피나 양쪽 끝에 세워진 원뿔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었다. 그런데 일부에게는 메타라는 단어가 엉뚱하게 받아들여졌다. 메타는 전차경기장의 원뿔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바티칸은 원래 아게르 바티카누스, 즉 바티카누스 평원으로 불린 로마 외곽 지역이었다. 로마 시내에는 무덤을 만들지 못하는 게 법이어서 로마인은 시 외곽 도로 주변이나 언덕에 무덤이나 묘지를 조성했다. 비아 코르넬리아가 지나갔던 바티카누스에도 무덤이 많았다. 마르스 평원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귀족이나 상류층 인사의 무덤을 만들기 편리했다.


중세에 옛 성 베드로 대성당 인근에는 피라미드처럼 생긴 삼각뿔 모양의 커다란 무덤이 있었다. 메타 로물리 또는 피라미다 바티카나라고 불린 곳이었다. 16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피로 리고리오의 그림을 보면 옛 성 베드로 대성당과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즉 산탄젤로 성 사이에 삼각뿔이 하나 보인다. 그곳이 메타 로물리였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 근처에는 또 테레빈투스 네로니스라는 마우솔레움도 있었다. 메타 로물리처럼 뾰족하게 생긴 무덤이었다. 테레빈투스는 마우솔레움을 만든 재료인 석회암을 뜻하는 라틴어다. 중세까지도 네로전차경기장은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고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바티칸 주변의 여러 유적에는 네로니스라는 이름이 많이 붙었다.


바티칸 주변에서 살았거나, 여러 이유 때문에 바티칸을 수시로 오갔던 사람들은 메타 로물리와 테레빈투스 네로니스를 눈여겨보았다. 그러다 일부가 엉뚱한 소리를 시작했다. “메타 로물리와 테네빈투스 네로니스가 『베드로 행록』 37장에 나오는 메타입니다. 성 베드로가 순교한 곳은 테레빈투스 네로니스와 메타 로물리 사이입니다.”


약간 다르게 추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로마 지하철 B라인 피라미데 역 앞의 오스티엔스 광장 맞은편에 피라미드 모양 건축물이 있다. 바티칸에서 보면 테베레강 건너편이고 직선거리가 5㎞ 정도이니 제법 멀다. 이곳은 고대 로마 시대에 축제를 주관한 사제단 중 한 명이었던 가이우스 세스티우스의 무덤이다. 중세에는 이곳을 메타 레미라고 불렀다. 그런데 일부 지식인은 “메타 로물리와 메타 레미가 『베드로 행록』에 나오는 두 개의 메타”라고 주장했다. 성 베드로는 두 메타 사이의 특정 지점에서 순교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오해가 그냥 오해로 끝났으면 아무런 논란도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문제는 오해한 사람들이 너무 적극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이런 오해 덕분에 뜬금없이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이 태어난 것이었다. 성당의 자리가 바로 두 메타 사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백번 양보해서 메타 로물리와 테레빈투스 네로니스 사이, 또는 메타 로물리와 메타 레미 사이에서 성 베드로가 죽었다고 치더라도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 건설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성당이 세워진 곳은 메타 로물리와 테레빈투스 네로니스 사이도 아니고, 메타 로물리와 메타 레미 사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성당 자리는 완전히 엉뚱한 장소에 불과하다.



어찌 됐든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은 ‘성 베드로 순교 장소’라고 사람들이 착각한 장소에 건설됐다. 이 성당에 대한 첫 기록은 9세기 역사학자인 안드레아스 아그넬루사가 편집한 『리베르 폰티피칼리스 에클레시아이 라베나티스』에 나온다. 처음에는 수도원으로 등장한다. 정식 명칭은 ‘성 베드로의 이름을 붙인 야니쿨룸 수도원’이었다. 야니쿨룸 수도원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하나도 없다. 8세기 비잔틴 수도사들이 세운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 뿐이다. 당시에는 이런 수도원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성 베드로라는 이름이 붙은 걸 보면 그가 이곳에 순교한 걸 의식해서 작명한 걸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끝났다면 야니쿨룸 수도원, 즉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은 로마의 많은 성당 중 하나, 그저 그런 성당으로 치부되고 말았을 것이다. 성당에 ‘순교한 성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였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성 베드로의 이름을 팔아 성당의 위상을 높이고 기부금을 끌어 모으려는 술책’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성당의 위상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성당의 이름은 틈날 때마다 거론된다. 로마인은 물론 많은 사람에게 잊히지 않는다. 이유는 한 가지다. 아름다운 예배당과 예수회 덕분이다.


속사정을 알려면 수도원 시절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교황 식스토 4세(재임 1471~1484년)는 야니쿨룸 수도원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개혁적 수도사 모임인 아마데우스회에 넘겨주었다. 아마데우스회는 1481년 수도원 재건 작업을 시작했는데, 성 베드로가 순교한 전설이 서린 곳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며 그에게 바치는 성당을 새로 짓기로 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은 덕분에 1494년에 성당을 완공할 수 있었다. 축성식은 6년 뒤인 1500년에 열렸다. 축성식이 미뤄진 것은 실내 장식 작업이 늦어졌거나 공사 과정에서 생긴 빚 청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축성식을 치르면 성당이 진 빚은 모두 없어지는 게 관례였다. 그래서 채권자들이 빚을 모두 돌려받을 때까지 축성식을 치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축성식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가 집전했다. 스페인 출신이었던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페르디난드 국왕과 이사벨 여왕에게 부탁해 성 베드로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곳 위에 예배당을 짓겠다면서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가 공사를 맡긴 사람은 밀라노와 로마에 르네상스 건축을 도입했고, 나중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한 도나토 브라만테였다. 건축의 거장이었던 브라만테가 손을 댄 것이니 만큼 굉장한 결과물이 만들어졌다. 그가 건축한 것은 ‘작은 신전’이라는 뜻을 가진 예배당 템피에토였는데, 당시에는 순례자의 무덤 위에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정식 명칭은 카펠라 델라 크로치피시오네 디 산 피에트로 아포스톨로(사도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예배당)였다.


브라만테는 밀라노에서 초기 시절을 보낸 뒤 로마로 건너갔다. 그는 나중에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년~1513년)가 되는 기울리아노 델라 로벨 추기경의 눈에 띄었다. 그 덕분에 고대 로마의 신전 등 유적을 공부할 수 있었다. 브라만테는 티볼리에 있는 베스타 신전을 둘러보았다. 당시에는 베스타 신전으로 알려졌던 로마 포룸 보아리움의 헤라클레스 인빅투스 신전도 공부했다. 그가 두 신전을 둘러본 것은 템피에토를 건설할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템피에토는 원래 이탈리아 중서부 토스카나에서 유행한 도리아 양식 건축물이었다. 도리아 양식은 헤라클레스처럼 아주 강한 이미지를 주는 남자 신에게 어울리는 양식이었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에게 바치기에는 도리아 양식보다 더 잘 어울리는 걸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브라만테가 만든 템피에토의 제단에는 회색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이 있다. 여기에는 성 베드로로 보이는 작은 조각상이 있다. 예배당 중앙 홀은 중세 사람들이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라고 오해했던 지점이다.

브라만테의 템피에토는 준공되자마자 로마인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성당에 담긴 엉터리 같은 전설을 헐뜯는 종교 학자보다는 훌륭한 건축물을 찾아다니는 건축 순례자들로부터 찬미를 받았다. 당대는 물론 후세의 많은 건축가는 “로마에 르네상스의 문을 연 기념비적 건축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뿐만 아니라 브라만토가 템피에토에서 시도했던 설계는 나중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어떤 건축사학자는 “템피에토야말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선구자였다”고 평가한다.


브라만토가 르네상스 건축의 문을 연 템피에토를 건설한 일뿐이었다면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의 명성이 오늘날처럼 높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성당의 위상을 더 높인 또 다른 사건이 우연처럼 발생했다. 1534년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을 받은 수도사들과 함께 예수회를 창립한 로욜라의 성 이그나티우스가 바로 그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성 이그나티우스가 살던 16세기 유럽에서는 종교혁명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갈등이 극심했다.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의 부패, 타락을 비판하면서 교세를 키웠다. 가톨릭의 교세는 갈수록 위축돼 위기를 맞았다. 예수회는 가톨릭이 반성하고 혁신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회는 설립 6년 뒤인 1540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수도사들은 이듬해 초대 총장을 선출하기 위해 선거를 실시했다.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사람은 창립자인 성 이그나티우스였다. 하지만 그는 초대 총장 자리를 거부했다. 수도사들은 다시 선거를 실시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성 이그나티우스는 이번에도 그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되자 예수회 창립에 참여한 수도사들은 깊은 걱정에 빠졌다. 그를 빼고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 예수회를 이끌고 나갈 인물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성 이그나티우스를 설득했다.



“당신이 계속 거절하면 예수회는 이대로 무너지고 말 겁니다.”


당시 성 이그나티우스의 고해신부는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의 테오도시오 다 로디 신부였다. 성 이그나티우스는 성당을 찾아가 혼자 트리디움을 시작했다. 트리디움은 사흘간 기도하고 명상하는 의식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성당이 자리를 잡은 곳은 자니콜로 언덕 언저리여서 테베레강은 물론 멀리 로마 시내가 보였다. 당시 트라스테베레에는 지금과는 달리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생각했다.


‘내 나이는 벌써 쉰 살이야. 적지 않은 나이지. 교회의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개혁운동을 시작했지만 앞으로 나조차 어떻게 될지 몰라. 일을 후배 수도사에게 맡기고 수도원에서 조용히 하느님을 모시는 일에만 열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야.’


늦은 밤에 테베레강과 멀리 불빛이 반짝이는 로마 시내를 바라보는 그의 머리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이웃에 살던 대장장이 집에서 자라던 기억이 떠올랐다. 군인으로 성공하려고 전쟁에 나섰다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장애인이 된 생각도 났다. 병원에 누웠을 때 성경을 읽어주던 엄마 같은 형수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가 사제의 길로 접어든 것은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를 거둬준 형수 덕분이었다.


트리디움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날이었다. 테오도시우스 신부는 성 이그나티우스를 방으로 불러 마지막 조언을 건넸다.


“하느님이 맡긴 운명입니다. 총장 자리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바꾸십시오.”


성 이그나티우스는 테오도시우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직접 선택한 것이든 하느님이 맡긴 것이든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총장으로 취임하기로 했다. 그가 지도자 자리를 맡은 덕분에 예수회는 성장할 수 있었고 유럽의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조금 엉뚱하게 해석하면 성 이그나티우스가 마음을 바꾼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은 예수회를 살리고 가톨릭을 회생시킨 성소인 셈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마데우스회가 성당을 새로 만들 때에는 물론이거니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도나토 브라만테에게 의뢰해 템피에토를 만들 때에도 자니콜로 언덕 너머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4세기에 만든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었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성 베드로 대성당 자리에서 성 베드로가 순교하고 묻혔다고 굳건하게 믿고 수많은 순례자가 대성당으로 몰려드는 시대에 왜 아마데우스회와 알렉산데르 6세는 단순히 전설에 불과해서 기독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니콜로 언덕의 성 베드로 순교 추정 장소에 성당을 짓고 템피에토를 건설한 것일까? 다른 일에는 그렇게 깐깐하고 까다롭던 교황청이 왜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은 부수지 않고 그대로 놔둔 것일까? 그리고 성당은 왜 지금도 ‘성 베드로 순교의 전설이 있는 곳’이라는 황당한 설명을 내건 것일까?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점에 엉뚱한 생각이 든다. 만약에 성 베드로가 바티카누스에 있던 네로 전차경기장에서 순교한 게 아니었다면, 정말 전설대로 자니콜로 언덕 언저리에서 순교한 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든 게 뒤죽박죽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때로는 진실을 모른 채 묻어두는 게 낫기도 하지만 성 베드로의 순교 및 무덤과 관련해서는 정말 진실을 할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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