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베드로를 묶은 쇠사슬

by leo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박물관이 있는 바티칸시국과 함께 이탈리아 로마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여행지는 ‘콜로세움 고고학 공원’이다. 콜로세움은 물론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팔라티노 언덕, 포로 로마노를 포괄하는 공원이다. 콜로세움은 대부분 외국 관광객이 ‘로마 최고의 랜드마크’로 생각하는 유적이고, 팔라티노 언덕은 로물루스가 고대 로마를 건국한 장소이고,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 번영의 상징이다. 대부분 관광객은 이곳에서 로마 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콜로세움 고고학 공원은 늘 사람으로 붐빈다.


고대 로마 검투경기장이었던 콜로세움은 기독교인 처형이 이뤄진 장소라고 오해하는 기독교인이 꽤 많다. 18세기 교황 베네딕토 14세(재임 1740~1758년)가 “고대 로마 시대에 많은 기독교도가 콜로세움에서 순교했다. 이곳을 성지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선포한 게 결정적인 오해의 근거였다. 교황은 오해에만 머문 게 아니라 콜로세움을 ‘예수의 수난’에 바치기도 했다. 매년 부활절을 앞두고 예수의 죽음을 기리는 성 금요일이 되면 신도 수천 명과 함께 콜로세움 앞에 모여 촛불 행사를 진행했다. 콜로세움이 기독교인 처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게 거의 기정사실화된 지금도 이 행사는 해마다 열린다.


콜로세움 고고학 공원을 둘러보는 순서는 모든 관광객에게 거의 비슷하다. 사람마다 여행의 목적, 목표가 다르지만 여기에서는 기독교라는 관점에서 여행 순서를 정리해보자. 먼저 ‘기독교인 처형이 이뤄졌다’는 오해를 받는 콜로세움에 들어가 내부를 둘러본 뒤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위해 세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거쳐 팔라티노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곳에서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뒤집어씌워 성 베드로를 포함해 수백 명을 십자가에 못 박거나 맹수에게 집어던져 먹히게 한 네로 황제의 궁전을 둘러보고 다시 포로 로마노로 내려간다.


포로 로마노 입구에는 1세기 후반 유대인 60만~100만 명을 학살하고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뒤 벽 하나만 남기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잿더미로 바꾸었으며, 유대인이 고향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 즉 디아스포라를 하는 계기를 만든 티투스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티투스 개선문이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식을 거행하는 장군이 말에서 내려 걸었던 ‘사크라 비아(성스러운 길)’를 지나면 마지막에는 혼란스러운 로마의 분열을 막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이 등장한다.


이 개선문마저 지나면 고대 로마 최고의 신이었던 유피테르를 모셨던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이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가게 된다. 지금은 관광객이 스쳐 지나가는 여행지에 불과하지만 과거에는 로마의 종교는 물론 패권을 상징하는 장소였고 그야말로 살아 숨 쉬는 로마의 심장이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향하는 계단에 오르면 오른쪽에 정면은 하얗고 측면은 황토색인 작은 성당 하나가 보인다. 성모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양아버지인 목수 성 요셉에게 바친 ‘목수 성 요셉 성당’이다.



성당 정면에는 ‘마메르티눔(Mamertinum)’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졌다. 마메르티눔은 고대 로마 시대에 최초로 만들어진 감옥이었다. 도둑, 살인범 같은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로마에 맞서 전쟁을 벌이다 붙잡힌 외국의 왕이나 장군, 국가에 반역을 일으킨 반역자처럼 매우 중요한 죄수를 쇠사슬에 묶어 가두던 곳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성당으로 쓰이는 건물이 고대에는 로마의 감옥이었다는 것이다.


공화정을 뒤엎고 왕정을 회복하려던 카틸리나 반역에 가담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술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뤘다 패한 갈리아의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 티베리우스 황제 밑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황제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처형당한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하누스,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아프리카 누미디아왕국의 왕 유구르타, 유대인의 반란을 주도한 유대아의 왕 겸 사제장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이곳에 갇혔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마메르티눔은 고대 로마 왕정 시대이던 BC 7세기에 물 저장고로 만든 곳이었다. 5대 국왕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나중에 지하를 추가로 파서 감옥으로 사용했다. 그때는 마메르티눔이 아니라 툴리아눔으로 불렸다. 마메르티눔에 갇힌 죄수는 감옥 안에서 굶어죽거나 참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시신은 바로 아래 포로 로마노로 내던져졌다. 포로 로마노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로마에 맞선 사람의 비극적인 최후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독교에서는 ‘성 베드로가 네로 전차경기장에 끌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기 전에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채 마메르티눔에 갇혔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성 베드로는 초대 교황이어서 이곳에 갇힐 만큼 중요성을 인정받기에 충분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나중에는 성 바오로도 이곳에 갇혔다고 전설은 전한다. 기독교는 전설만 만든 게 아니라 기적도 만들었다. 성 베드로가 지하 2층 감옥으로 내려갈 때 계단 천장에 이마를 부딪치는 바람에 천장이 움푹 들어갔는데 그 부분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 또 성 베드로는 감옥의 바닥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만들어 그 물로 함께 갇힌 기독교인은 물론 감옥을 지키던 간수 마르티니아노와 프로케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두 간수는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사실 때문에 체포돼 참수형을 당했고, 나중에는 기독교의 성인으로 숭앙받게 됐다.


마메르티눔 지하는 성 베드로의 투옥을 기리는 다양한 유물로 채워졌다. 쇠사슬에 묶인 성 베드로가 기적으로 만든 샘물로 세례를 주는 장면을 담은 부조가 붙은 제단과 성 베드로를 묶은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는 기둥,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대리석 흉상 등이다.


이 같은 주장은 역사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온당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성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을 때 마메르티눔에 갇힐 정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로마인은 그를 문제만 일으키는 유대인 분파의 지도자 정도로만 여겼거나, 아예 그의 존재 자체를 잘 몰랐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투옥됐다 하더라도 마메르티눔이 아니라 잡범을 가두는 로마시청의 감옥인 프라이토르 우르비스에 갇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기독교도 초기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하 감옥인 마메르티눔의 지상에 있던 건물은 간수들이 지내던 공간이었다. 이 건물이 교회로 바뀐 것은 4세기 교황 실베스테르 1세의 지시 때문이었다. 교회를 새로 지은 것은 아니었고, 기존 건물에 교회라는 간판만 단 것이었다. 성 베드로가 갇힌 감옥이 있던 자리라는 뜻에서 교회 이름은 ‘감옥의 성 베드로 교회’로 지어졌다. 로마의 목수연합회는 1540년 마메르티눔에 있던 ‘감옥의 성 베드로 교회’를 빌려 사무실로 사용했다. 세월이 흐른 탓에 건물이 낡아 사용하기 어렵게 되자 목수연합회는 1663년 건물을 새로 지어 ‘목수 성 요셉의 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새 성당 이름에 성 요셉을 붙인 것은 그가 목수의 수호성인이기 때문이었다.


마메르티눔 지하 감옥에서 나와 성당 지붕에 설치된 십자가를 보면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을 거쳐 산타마리아 아라 코엘리 성당을 지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만든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를 거쳐 다시 콜로세움으로 돌아간다. 콜로세움 길 건너편의 지하철 콜로세오역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비아 데글리 안니발디 거리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큰 성당이 나타난다.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이라는 뜻인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이다. 이곳은 고대 로마 시대에 성 베드로가 갇혔던 곳으로 추정되는 로마 시청의 감옥인 프라이토르 우르비스가 있었던 곳이다. 그야말로 절도범, 사기꾼 같은 잡범이나 살인범 같은 일반 흉악범을 가두던 감옥이었다.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이 처음 생긴 것은 5세기였다. 이곳에 성당을 세운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 기독교인들은 성 베드로가 여기에 여러 달 동안 갇혀 있다 바티카누스의 네로 전차경기장으로 끌려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 보자. 가장 먼저 궁금해지는 것은 왜 성당 이름에 ‘쇠사슬’을 뜻하는 ‘빈콜리’라는 단어가 붙었느냐 하는 점이다. 간단하다. 성 베드로를 묶은 쇠사슬이 이 성당에 모셔졌기 때문이다. ‘2000년 전 감옥의 쇠사슬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라고 놀라거나 의심을 가질 수 있다. 그 속사정을 찬찬히 살펴보자.


기독교를 전 세계로 전파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성 베드로는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세 번 갇힌 적이 있었다. 두 번은 예루살렘에서, 한 번은 로마에서였다. 성 베드로가 마메르티눔이든 프라이토르 우르비스이든 로마에서 갇힌 이야기는 위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자. 그가 예루살렘에서 두 번이나 쇠사슬에 묶여 갇힌 이야기를 알아보자. 그 내용은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나온다. 성 베드로가 처음 감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와서 구해주었다는 것이다.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꺼내 주고는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라고 했다(제5장 17~25절).’


성 베드로가 두 번째 갇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헤롯 왕이 교회 사람들 중에서 여러 명을 해치려고 했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다. 베드로는 옥에 가두었다. 헤롯이 끌어내기 전날 밤 베드로는 쇠사슬에 묶여 두 병사 틈에서 잤다. 파수꾼은 문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때 감옥에 광채가 비치더니 주님의 사자가 다가왔다. 사자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치면서 어서 일어나라고 말했다. 쇠사슬은 저절로 풀렸다. 베드로가 두 파수꾼을 지나 성에서 나가는 쇠문에 이르렀을 때 놀랍게도 문은 저절로 열렸다. 그가 문을 빠져나간 다음 천사는 떠났다(제12장 1~7절).’


성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감옥에 갇혔을 때 묶였던 두 쇠사슬은 원래 예루살렘에 보관됐다. 그곳에서 기독교 순례자들의 숭배를 받았다. 쇠사슬이 이스라엘을 떠나 로마로 건너온 것은 5세기 무렵이었다. 그 이야기는 로마를 찾는 순례자와 여행자를 위해 12세기에 쓰인 안내서 『미라빌리아 우르비스 로마이』에 적혔다.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부인인 아일리아 에우도키아는 438~439년 성지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녀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이던 성 유베르날에게서 성 베드로의 쇠사슬을 선물로 받았다. 에우도키아는 두 쇠사슬 중 하나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무덤이 있는 ‘성 사도들의 교회’에 보관하게 했다. 나중에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에게 점령당하는 바람에 교회는 파괴돼 없어졌고 쇠사슬도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다른 쇠사슬은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에게 맡겼다. 에우독시아는 서로마제국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결혼하기 위해 어머니가 준 쇠사슬을 챙겨 로마로 갔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성 베드로를 묶은 예루살렘 쇠사슬 두 개 중에서 하나는 콘스탄티노플에 남겨졌고 나머지 하나는 로마에 갔다. 여기에 로마의 감옥에서 성 베드로를 묶은 쇠사슬까지 더하면 로마에는 쇠사슬이 두 개가 돼야 한다. 그런데 지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전시된 쇠사슬을 보면 하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하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제 여기서 또다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에우독시아는 로마에서는 매년 8월 1일을 아우구스투스 축일로 기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앙숙이던 안토니우스에게 거둔 최종 승리를 기억하기 위해 8월의 첫날을 축일로 지정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교도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사람이 기독교 세상에서도 여전히 칭송을 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해 관습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축일을 ‘성 베드로의 쇠사슬 축일’로 변경하기로 하고 교황 대 레오 1세와 논의해 “이교도 황제의 축일을 중지하고 성 베드로의 축일을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에우독시아는 성 베드로 축일로 선언한 뒤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쇠사슬을 공개했다. 그리고 성 베드로가 로마의 감옥에서 묶였던 쇠사슬을 가져오라고 했다. 기적은 바로 이 순간에 발생했다. 교황 대 레오 1세가 에우독시아에게서 받은 쇠사슬과 로마의 쇠사슬을 비교해보려고 하자 두 쇠사슬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옆에서 지켜보던 에우독시아는 물론 다른 성직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기적을 보고 감동한 에우독시아는 프라이펙투라 우르비스 일대에 새 성당을 건설해 성 베드로의 쇠사슬을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당시만 해도 성 베드로가 쇠사슬에 묶여 갇혔던 곳이 프라이펙투라 우르비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곳에 성당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성당을 지은 에우독시아의 이름을 붙여 성당을 에우독시아나 또는 티툴루스 에우독시아라고 불렀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즉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합쳐져 하나가 됐다는 성 베드로의 쇠사슬은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의 주 제단 아래에 모셔졌다. 쇠사슬의 길이는 2m 정도다. 한쪽 끝에는 고정용 고리가 달렸다. 성당의 신도석 천장에는 두 쇠사슬이 합쳐져 하나가 된 기적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1706년에 그려졌다.


초기 기독교는 성 베드로의 몸을 묶은 쇠사슬을 ‘성물(聖物)’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의 억압 그리고 구원과 해방을 동시에 보여주는 성스러운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고대 로마 황제들이 초대 교황 성 베드로부터 6대 교황 알렉산데르 1세까지 많은 기독교인을 쇠사슬로 묶었지만 결국 교회가 승리했다는 것이다. 2세기 그리스의 주교였던 폴리파르프는 ‘쇠사슬은 성인의 장식품이다. 하느님과 주 예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의 왕관’이라고 표현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성 베드로의 쇠사슬을 ‘기적을 일으키는 성물’이라고 여겼다. 병자가 쇠사슬을 만지면 병에서 회복하고, 쇠사슬을 꺼내면 로마 곳곳에 숨은 악마가 달아난다고 믿었다. 쇠사슬과 악마를 소재로 다룬 전설도 생겼다. 10세기 오토 황제와 친분이 있던 한 공작이 귀신에 씌었다. 황제는 친구를 교황 요한에게 보냈다. 교황이 성 베드로의 쇠사슬을 공작의 목에 가져다 대었더니 목에서 악령이 튀어나와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이처럼 중요한 유물을 보관하게 된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은 중세에 중요한 순례지로 떠올랐다. 많은 사람이 몰리자 교황 하드리아노 1세(재임 772~795년), 레오 3세(재임 795~816년), 스테파노 4세(재임 816~817년), 그레고리오 4세(재임 827~844년)는 성당을 복구하거나 치장 공사를 거행했다. 당시만 해도 성당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종교회의인 공의회나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자주 개최됐다.


이야기를 여기까지만 읽으면 에우독시아는 정말 성스러운 기독교의 기적을 일으킨 성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에게는 숨겨진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을 상징하는 단어는 바로 ‘반달리즘’이다. 지금은 ‘문화와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를 뜻하지만 처음에는 ‘야만족의 끔찍한 약탈과 파괴’를 의미했다. 놀랍게도 반달리즘이라는 용어가 생기게 된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바로 에우독시아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TV의 막장드라마 소재로 사용하면 딱 좋을 내용이었다.


에우독시아는 열다섯 살이던 437년 로마로 건너가 두 살 많은 사촌이자 서로마제국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결혼했다. 그녀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을 건설한 것은 결혼하고 2년 뒤였다. 물론 성당을 지을 때 남편의 도움이 지대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그녀의 사연은 이제부터 막장으로 치닫는다. 드라마의 시작은 여섯 살 때 황위에 올라 30년간 장기 집권한 남편의 몰락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기독교인들이 ‘대제’라고 부르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외손자였지만 능력과 성정은 외할아버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훈족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충성스러운 장군 아이티우스를 역적으로 몰아붙여 죽이고 말았다. 원로원 의원이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의 귀에 “아이티우스가 역모를 꾸민다”고 속삭인 게 계기였다. 막시무스는 처음에는 충신이었지만 첫 아내 에파르키아가 황제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이후 변심한 인물이었다.


로마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충신 장군을 죽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로마에서 행사를 진행하다 주군의 복수를 하겠다며 난입한 아이티우스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사람은 다름 아닌 막시무스였다. 황제가 된 막시무스는 선황의 부인 에우독시아를 죽이겠다고 협박해 강제로 결혼했다. 선황의 딸 에우도키아는 황제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결혼시켰다. 막시무스로서는 자살한 아내의 복수를 세 배로 통쾌하게 한 셈이었다.


막장드라마의 2막은 졸지에 황후 자리에서 밀려난 에우독시아가 열었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권력도 잃은 데다 강제로 막시무스와 결혼한 상황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복수심에 불탄 그녀는 스페인에서 살다 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로 건너간 반달족에게 “도와줄 테니 로마를 약탈하라”고 부추겼다. 반달족 왕 겐세이리크는 그렇지 않아도 아들 후네릭과 결혼할 예정이었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을 뺏겨 분노한 상태였다. 그는 ‘이게 웬 떡이냐’며 곧바로 로마로 쳐들어갔다. 로마는 410년 서고트족 지도자 알라리크의 첫 ‘로마 침탈’에 이어 35년 만에 다시 반달족의 침탈을 허용하고 말았다.


겐세이리크가 이끄는 반달족 군대가 로마 인근에 쳐들어오자 막시무스는 달아났다. 대 레오 1세가 로마를 살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도시 밖으로 나가 겐세이리크를 만났다. 교황은 로마를 파괴하거나 로마인을 학살하지 말고 약탈만 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겐세이리크도 사실 기독교로 개종한 상황이어서 로마를 부수거나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교황의 부탁을 ‘통 크게’ 받아들여 ‘비파괴 비살상’에 합의했다. 말이 합의였지 사실상 기독교의 수장인 교황이 이른바 야만족 왕에게 두 손을 모아 비는 굴욕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달족은 열린 성문을 통해 로마 시내에 들어가 어느 누구의 저항도 받지 않고 도시를 약탈했다. 교황과 약속한 대로 로마를 파괴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대신 무려 14일 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신전, 개인 저택, 심지어 황궁까지 뒤져 금은은 물론 각종 보석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가져갔다. 그들은 특히 카피톨리노 언덕에 자리를 잡은 로마의 상징인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카피톨리누스 신전을 철저하게 약탈했다. 반달족이 로마를 얼마나 심하게 벗겨 먹었는지 ‘반달리즘’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였다.


겐세이리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에우독시아와 딸 에우도키아를 아프리카로 데려갔다. 그리고 에우도키아는 당초 약속대로 아들과 결혼시켰다. 비운을 자초한 에우독시아는 아프리카에 7년 동안 붙잡혀 살다 동로마제국이 몸값을 내준 덕분에 겨우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물론 딸은 아프리카에서 평생 살다 눈을 감았다.


이제 다시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성당은 교황의 아비뇽 유수 기간에 매우 황폐해졌다. 성당 관리를 맡은 니콜라우스 추기경은 1448년 사비를 들여 대대적으로 보수 공사를 실시했고, 세상을 떠날 때는 공사에 사용하라며 많은 재산을 남겼다. 그의 유산 덕분에 교황 식스토 4세(재임 1471~1484년)와 율리오 2세(재임 1503~1513년)는 공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현재 성당의 포르티코(기둥을 받쳐 만든 현관 지붕)와 수도원은 이때에 만든 것이다.


사실 이름, 역사와는 달리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성 베드로의 쇠사슬이 아니다. 많은 관광객의 인기를 끄는 것은 미켈란젤로와 여러 조각가가 만든 조각상 7개다. 조각상을 보려고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이 성당 앞에 줄을 설 정도다. 여름에는 너무 많은 관람객이 몰려 들어가기 어렵다. 가장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시기는 11월의 비가 내리는 날 오전이라고 하니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몰리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각상 7개는 성 베드로 대성당 개조를 시작했던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13년) 시대에 만든 것이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히고 싶어 했지만 죽음을 앞뒀을 때까지 공사가 끝나지 않아 곧바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젊었을 때 추기경으로 근무했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묻혔다가 나중에야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교황은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의 무덤을 꾸미려고 미켈란젤로와 여러 조각가에게 조각상 40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감을 때 완성된 조각상은 7개에 불과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모세’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눈 뒤 ‘십계명’을 받아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장면을 담은 조각상이다. 특이하게도 모세의 머리에는 뿔이 달렸다. 미켈란젤로가 뿔을 만든 것은 히브리어를 오역한 탓이라고 한다. 당시 히브리어에서는 ‘빛(karan)’과 ‘뿔(keren)’이라는 단어가 비슷했기 때문에 일부 성경에는 ‘빛’을 ‘뿔’이라고 오역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를 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기독교 최고의 선지자인 모세의 이마에 ‘뿔’을 붙이는데 왜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더 알아보니 이 미켈란젤로의 ‘모세’뿐 아니라 수많은 작품에서 모세의 머리에 뿔이 달렸다. 중세에는 뿔이 모세의 상징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모세가 누구인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내고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선지자 아니었던가? 그런 사람의 머리에 괴물이나 악마에게나 어울릴 ‘뿔’이 달렸다고 생각하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일부 성경에 오역이 있었다면 왜 교회는 물론 성직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미켈란젤로는 아무 말도 없이 뿔 달린 모세를 만든 것일까? 교회에서 한 번 결정을 내리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교회의 결정에 토를 달면 신성 모독으로 내몰리는 게 당시 분위기였기 때문일까?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과연 어떤 '미켈란젤로의 모세’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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