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로마로 돌아간 성 베드로

by leo


중고등학생일 때 주말이 되면 TV에서는 ‘MBC 주말의 명화’ ‘KBS 명화극장’ 같은 영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황야의 결투’ 같은 서부영화를 포함해 대개 오래된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틀어주는 경우가 잦았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밤이 되면 누나를 따라 TV 앞에 앉아 영화에 푹 빠지던 기억이 새롭다.


두 프로그램을 통해 본 기억이 나는 영화는 ‘스팅’, ‘태양은 가득히’, ‘빠삐용’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언제였는지, 어느 방송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쿼바디스’를 본 기억도 있다. 솔직히 당시에는 그렇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지겹다고 느꼈다. 사랑이니 종교니 하는 것을 알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던 탓이다.


그때 이후로는 ‘쿼바디스’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2022년 10월 EBS ‘일요시네마’에서 ‘쿼바디스’를 방영한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평소에도 EBS 프로그램을 매우 좋아한다. 학생이 아니어서 국영수 같은 학습 프로그램은 볼 필요가 없지만 다른 교양 프로그램 중에서는 꽤 유익하고 재미있는 게 많기 때문이다.


뜻밖에 30여 년 만에 다시 시청한 ‘쿼바디스’는 꽤 재미있었다. 머리에 남았던 오래 전 기억과는 내용이 상당히 달라 혼자 속으로 웃기도 했지만 왜 당시에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영화 ‘쿼바디스’의 기본 스토리는 로버트 테일러가 연기한 남자 주인공 마르쿠스 비니키우스와 데보라 커가 연기한 여자 주인공 리기아의 사랑이다. 여기에 고대 로마 제정 시대에 가장 격동적이었던 네로 황제의 치세 그리고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 탄압, 성 베드로의 순교가 그들이 사랑을 이어가는 배경으로 깔린다.



1955년에 만들어진 영화의 제목은 ‘쿼바디스’이지만 사실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으로 따지면 ‘쿠오바디스(Quo Vadis)’가 맞는 표현이다. 라틴어인 쿠오바디스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쿠오’는 ‘어디로’이고 ‘바디스’는 ‘가다’라는 뜻의 동사 ‘바도(vādō)’의 2인칭 의문사다. 따라서 쿠오바디스 전체의 뜻은 ‘(당신은)어디로 가십니까?’이다.


쿠오바디스는 전문적인 용어나 고급스러운 표현도 아니고 어려운 단어도 아니다. 그야말로 고대 로마인이라면 매일 같이 어디서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흔히 쓰던 말이었다. 알고 지내던 고대 로마인 두 사람이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한 뒤 ‘쿠오바디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로마 중심지인 포로 로마노에서는 서로에게 ‘쿠오바디스’라고 말하는 로마인을 매일 수십, 수백 명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쿠오바디스는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에게 매우 성스러운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예수의 제자였던 성 베드로가 이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포교를 위해 로마에 갔던 성 베드로는 탄압을 피해 달아나려다 뜻밖에 예수를 만난다. 그는 깜짝 놀라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고대 로마인에게는 ‘주인’을 뜻했고 기독교인에게는 ‘주님’을 뜻했던 ‘도미네’라는 단어를 붙인 문장인 ‘쿠오바디스, 도미네?’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뜻이다. 이런 내용은 4세기에 쓰인 『베드로 행록』 34~36절에 기록됐다. 그 내용을 상세히 한번 읽어보도록 하자.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황제의 친구인 알비누스의 아내 산티페였다. 그녀는 다른 귀부인들과 함께 베드로를 찾아갔고 남편을 멀리했다. 아내를 사랑한 알비누스는 화가 났다. 그래서 베드로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베드로 때문에 아내가 그를 멀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그리파에게 모든 걸 일러바쳤다.

“그자 때문에 아내와 멀어졌소. 나를 위해 복수해 주시오. 아니면 내가 직접 복수하겠소.”

아그리파는 대답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첩들이 나를 멀리하게 됐다오.”

알비누스가 다시 말했다.

“그럼 왜 기다리는 것이오? 우리가 심문관 자격으로 그자를 붙잡아 와서 죽입시다. 그러면 아내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아내를 빼앗긴 다른 사람들의 복수를 해 주는 셈이 되는 것이오.”

두 사람이 의논할 때 산티페가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녀는 베드로에게 달려가서 로마를 떠나라고 말했다. 마르켈리스는 물론 다른 형제도 로마를 떠나라고 간청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형제들이여, 달아나야 하는 건가요?”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을 모실 수 없기 때문에 잠시 피하는 것일 뿐입니다.”

베드로는 형제들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혼자 가겠다고 했다.

“아무도 나를 따라오지 마시오. 옷을 바꿔 입은 뒤 혼자 갈 것이오.

베드로가 로마 성문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예수가 로마로 걸어오고 있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예수는 그에게 대답했다.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

베드로가 다시 물었다.

“주께서 다시 못 박히신다고요?”

예수는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다시 못 박힐 것이다.”

베드로는 형제들에게 돌아갔다. 그는 방금 봤던 장면을 설명했다. 그들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베드로여.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우리를 보살펴 주소서.”

베드로는 대답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될 것이오. 우리 모두는 아닐지라도. 주님은 믿음으로 여러분을 강하게 하실 것이오. 믿음으로 여러분을 바로 세우실 것이오. 그분은 여러분 안에 심은 믿음을 더 키우실 것이오. 여러분은 주님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심을 것이오. 주 예수가 나를 살아 있게 하신다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 나를 데려가신다면 기꺼이 즐겁게 따라갈 것이오.”

형제들이 울고 있을 때 병사들이 와서 베드로를 붙잡아 아그리파에게 끌고 갔다. 그는 베드로를 무신론자라고 비난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라고 지시했다.’


사실 성 베드로가 말했다는 이 표현이 널리 유명해진 것은 『베드로 행록』 때문이라기보다는 영화 ‘쿼바디스’ 덕분이었는데, 영화는 폴란드 소설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1896년 소설 ‘쿠오바디스’ 덕분에 태어났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이 쿼바디스, 쿼바디스 하게 된 근원은 영화 ‘쿼바디스’와 원작소설 ‘쿠오바디스’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엔키에비치는 로마에 여행을 갔다가 성 베드로가 쿠오바디스라고 말했다는 현장에 건설된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을 방문했다. 그는 성당에 담긴 놀라운 이야기에서 깊은 영감을 얻어 소설을 썼고, 그 덕분에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시엔키에비치는 처음에는 1895년 3월 26일~1896년 2월 29일 ‘가제타 폴스카’ 등 폴란드 잡지 세 곳에 소설을 동시 연재했다. 연재를 마친 소설은 1896년 폴란드어로 출간되자마자 폭발적 인기를 얻었고, 영어는 물론 일본어, 아랍어, 스페인어 등 57개 언어로 번역돼 60개국에 팔려나갔다. 소설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영화도 만들어졌다. 1913년과 1924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무성영화가 제작됐고, 마침내 1951년에는 미국의 머빈 르로이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2001년에는 미니시리즈 드라마도 출시됐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성 베드로는 화려한 건물로 가득 찬 로마를 벗어나 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들어선다. 그는 이곳에서 예수를 만나 부끄러움을 느끼고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한다. 그가 도망가다 예수를 만난 길은 고대 로마의 첫 ‘고속도로’였던 비아 아피아, 즉 아피아 가도였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두 남녀 주인공이 새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로마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이 지나간 길도 아피아 가도였다. 영화에서는 시골의 한적한 외곽 숲길처럼 보이지만 사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영화보다 더 잘 정돈되고 넓었을 것이다.


Annibale Carracci


흥미로운 사실은 『베드로 행록』에는 성 베드로가 혼자 달아나다 예수를 직접 만나는 것으로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나자리우스라는 소년을 데리고 가는 것으로 연출됐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소년의 입을 통해 성 베드로에게 뜻을 전한다. 나자리우스는 남녀 주인공이 마차를 타고 로마를 떠나 시칠리아로 갈 때에도 동행한다. 나자리우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예수가 30년간 살았다는 나사렛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사렛 예수’라고 불린다. 결국 나자리우스는 ‘나사렛 예수’를 상징하는 등장인물인 셈이다. 나자리우스가 성 베드로는 물론 두 남녀 주인공과 동행했다는 것은 기독교의 박해와 끊임없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성 베드로가 2000년 전 로마에서 달아날 때 걸었다는 아피아 가도는 지금도 로마 외곽에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고대 로마 멸망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길은 좁아지고 상태는 나빠졌을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영화 ‘쿼바디스’에서 베드로가 아피아 가도를 통해 달아나는 장면, 두 주인공 남녀가 그 길을 통해 새 출발하는 장면도 실제 아피아 가도에서 촬영했다는 점이다. 영화를 촬영했던 1950년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라서 아피아 가도는 엉망진창이었는데, 영화사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역사적 유물인 아피아 가도를 깔끔하게 정비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영화를 촬영했을 때보다 도로가 더 깔끔하게 정리됐다.


지금 아피아 가도에 가보면 영화 세트보다 더 영화 같은 분위기에 깜짝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2000년 베드로의 흔적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을 갖고 영화 ‘쿼바디스’를 촬영하던 분위기도 느껴볼 겸 아피아 가도를 한번 걸어보자.


고대 로마 시대에 아피아 가도는 포로 로마노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아피아 가도로 가는 출발점을 로마의 랜드마크인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으로 잡는다. 두 장소 사이로 난 그레고리오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1km 정도 내려가면 카라칼라 욕장이 나온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카라칼라 욕장 근처에 포르타 카페나(카페나 문)가 있었다. 현재 위치로 따져보면 카라칼라 욕장 북쪽의 유엔세계식량기구(FAO)와 치르코 맛시모(대전차경기장)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카페나 문은 오래 전에 부서졌고 다만 피아자 디 포르타 카페나(카페나 문 광장)라는 이름만 남았다.


포로 로마노에서 출발해 포르타 카페나 그리고 카라칼라 욕장 앞을 지나던 아피아 가도는 1950년대 로마 순환도로 건설 공사 때 사라졌고, 지금은 도시 외곽 지역의 구간만 남았다. 이 구간을 비아 아피아 안티카라고 부르는데, ‘안티카’는 ‘고대’나 ‘옛’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비아 아피아 안티카는 옛 아피아 가도라는 뜻이 된다. 처음에는 도로가 단절돼 로마 중심지에서 비아 아피아 안티카로 걸어가는 게 불가능했지만 나중에 지하 터널을 건설하고 횡단보도를 만든 덕분에 도보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 카라칼라 욕장 앞에서 시작할 경우 비아 아피아 안티카의 총 거리는 16km여서 끝까지 걸어가면 4시간 이상 걸린다.


카라칼라 욕장 오른쪽에는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의 성당이 있다. 성당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숲 사이로 너른 산책로처럼 보이는 비아 디 포르타 산 세바스티아노 거리가 나타난다. 각종 유적이 가득한 로마 시내 중심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1년 내내 관광객으로 붐빈다. 하지만 두 성당 사이로 길만 건너 산 세바스티아노 거리에 접어들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작은 숲과 목초지가 보이고, 한적하게 흩어진 소규모 주택들이 등장한다. 고대나 중세 이탈리아의 여유로운 시골이 그대로 남은 것처럼 느껴진다.


산 세비스티아노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다시 10분 정도 가면 정말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유적이 눈앞에 나타난다. BC 3세기 로마에 쳐들어 왔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물리치고 로마를 위기에서 구해 ‘아프리카누스’라는 별명을 얻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의 공동묘지다.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친 로마는 지중해의 지배자로 떠올랐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과 중동 지역에도 진출해 세계의 제국으로 발전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제2의 건국의 아버지’라는 애칭을 얻은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스키피오 공동묘지를 지나면 작은 개선문과 오래된 성벽 그리고 성문이 나타난다. 누가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드루수스 개선문, 3세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과 포르타 산 세바스티아노, 즉 산 세바스티아노 문이다. 문의 원래 이름은 ‘아피아 문’이라는 뜻의 포르타 아피아였다.



비아 아피아 아티카는 포르타 아피아를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피아 가도가 처음 만들어진 게 BC 312년이니 무려 2천300년 전 도로를 마침내 여기서부터 만나게 되는 셈이다. 아피아 가도를 만든 사람은 당시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가이쿠스였다. 그는 처음에는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이어지는 로마 최초의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나중에는 타렌툼, 최종적으로는 반도 최남단 브린디시움까지 연결했다. 고대 로마에서는 도로나 건물을 지을 경우 자금을 대거나 공사를 진행한 관리의 이름을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로마인은 이 도로에는 아피우스라는 이름을 붙여 ‘아피우스의 길’이라는 비아 아피아, 즉 아피아 가도라고 불렀다.


로마가 이탈리아 남부를 평정하고 이후 아시아 정벌에 나설 때 군대를 행진시키고 군수물자를 운반하던 길이 바로 이곳이었다. 로마에 반기를 든 유대인을 4년 만에 응징하고 예루살렘에 있던 솔로몬의 성전을 불태워버린 티투스가 네로 사후인 71년 군단을 이끌고 개선한 길도 여기였다. BC 1세기 노예 해방을 외치며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노예 장군’ 스파르타쿠스를 따르던 병사 수천 명이 로마군에 패한 뒤 모조리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한 곳도 바로 아피아 가도였다.


아피아 가도에서는 군대만 오간 게 아니었다. 여러 나라를 오가면서 물건을 사고팔던 상인, 외국으로 파견된 사절이나 관리, 주인의 명령을 받고 다른 도시로 달려가던 노예, 여러 이유 때문에 여행을 다니던 나그네, 외교적 문제로 로마로 올라가던 외국인도 모두 아피아 가도를 이용했다.


포르타 아피아를 지나 비아 아피아 안티카를 따라 1㎞ 더 가면 삼거리가 보인다. 왼쪽은 비아 아피아 안티카가 계속 이어지는 길이고, 오른쪽은 비아 아르데아티나다. 가운데 길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는데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로 가는 버스 전용 도로로 사용된다. 고대 로마 시대에 삼거리 일대는 ‘레디쿨루스의 평원’이라는 뜻인 캄푸스 레디쿨리라고 불렸다. 이곳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신전이 있었다. ‘무사 귀향의 신’인 레디쿨루스에게 봉헌한 신전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신전을 건설한 것은 로마로 쳐들어 온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 때문이었다. 한니발 장군은 BC 211년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 4만 5천~6만여 명을 죽였고 이어진 전투에서도 연전연승했다. 그는 급기야 대군을 이끌고 로마 앞에까지 나타났다. 로마는 BC 390년 갈리아족에게 도시를 빼앗긴 이후 170여 년 만에 다시 외적에게 도시를 침탈당할 위기에 몰렸다.


전설에 따르면 이때 레디쿨루스 신이 나타나 “당장 물러가라”고 호통을 쳐서 한니발을 쫓아냈다. 어떤 책에는 레디쿨루스 신이 우박 형태로 하늘에서 떨어져 적장을 몰아냈다고 적혔다. 4세기 로마 역사학자 페스투스가 쓴 『로마사 요약』에도 이 일화가 소개됐다.


‘레디쿨루스 신전은 포르타 카페나 바깥에 있다. 카푸아에서 로마로 쳐들어간 한니발은 이 지점에서 돌아갔다. 불길한 조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니발이 물러가자 로마인은 레디쿨루스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뜻에서 신전을 지어 바쳤다. 그들이 모신 신의 정확한 이름은 ‘적을 물러나게 해서 로마를 보호한’ 레디쿨루스 투타누스 신이었다. 로마인은 같은 신이라도 어떤 효험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다른 별칭을 붙여 불렀다. 예를 들어 유피테르는 무려 50여 개에 이르는 별명을 로마인에게서 얻었다. ‘천상의 신’인 유피테르 카엘레스티스, 신성한 조짐을 가져다주는 유피테르 엘리키우스, 전쟁터에서 병사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유피테르 스타토르 같은 식이었다.


레디쿨루스 신전은 당시에 이집트, 그리스, 아시아로 위험하고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안전을 기원하면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던 곳이었다.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잠시 쉬어가는 장소이기도 했다. 거꾸로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올 경우 제물을 다시 바치면서 “무사히 귀국하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성소였다. 먼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가 캄푸스 레디쿨리에서 뒤로 돌면 멀리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보였다. 이곳을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더 이상 로마를 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이곳은 그야말로 ‘로마의 끝’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쉬면서 마지막으로 안전을 기원하는 신전을 만들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 군대나 상인만 사용하는 전용도로가 아니었다. 로마인이든 외국인이든 로마에 일이 있어 올라가거나 로마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일상적으로 이용했던 도로였다.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탄압을 피해 달아나려면 바다를 건너 그리스로 가야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아피아 가도를 통해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항구도시 브린디시움에 가서 배를 타야 했다. 그가 이 길을 택한 것은 그곳까지 가장 쉽게,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유일한 도로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설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로마에 간 뒤 아피아 가도 인근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아침에 일어나 로마 시내에 가서 기독교를 포교하고 오후에 숙소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피아 가도와 주변 사정을 충분히 숙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 베드로가 달아나다 예수를 만나 깨달음을 얻고 다시 로마로 돌아간 장소는 바로 여기였다. 삼거리인 캄푸스 레디쿨리 인근이었다. 영화 ‘쿼바디스’에는 레디쿨루스 신전이 나타나지 않지만 당시에는 이곳에 신전이 있었다. 성 베드로가 더 이상 로마가 보이지 않는 장소, 특히 이교도 신전 인근에서 예수를 만나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물었다는 사실은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왜 하필이면 여기였을까?


성 베드로가 쿠오바디스를 외친 삼거리 모퉁이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성당이 있다. 공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레 피안티 성당이다. ‘비탄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산타 마리아 인 팔미스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폴란드 작가 시엔키에비치가 방문해 소설 ‘쿠오바디스’의 영감을 얻은 그 장소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이 지어진 곳은 쿠오바디스의 바로 그 현장이다. 성 베드로가 예수를 만난 정확한 장소가 성당 자리라는 것이다. 산탈레시오 알라벤티노 수도원에 있던 9세기 문서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문서에는 라틴어로 ‘도미누스 아파루이트’라는 설명이 붙었는데, ‘주 예수가 나타났던 장소’라는 뜻이다.


전해지는 문서 기록이 없어 이곳에 성당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성 베드로가 순교한 직후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4세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대략 9세기에 처음 건설됐으며 17세기에 중건됐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9세기에 처음 세운 성당은 새로 만든 게 아니라 그때까지 남았던 레디쿨루스 신전을 부수지 않고 단순히 기독교식으로 바꾼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은 16세기 들어 관리 소홀 때문에 매우 황폐해졌다.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추기경 톨레도의 프란치스코가 성당 재건 공사를 진행했다. 1620년에는 한 사제가 기금을 모아 성당을 완벽하게 재건했다. 오늘날 성당의 외관은 이때 만들어졌다.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 중앙의 대리석 평판에는 27.5cm정도 되는 발자국 모양 두 개가 있다. 중세 사람들은 이 발자국을 ‘예수가 남긴 기적의 흔적’이라고 믿었다. 예수가 성 베드로를 만난 뒤 하늘로 올라갈 때 땅바닥에 남긴 발자국이라는 것이었다. 도미노 쿠오바디스 성당은 발자국 때문에 과거에는 산타 마리아 인 팔미스라고 불렸다. 팔미스는 ‘손바닥’ 또는 ‘종려나무’를 뜻하는 ‘팔마(palma)’의 복수 형태다. 옛 성당 이름에서 팔미스는 ‘예수의 발자국’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가야불교와 관련이 있는 경남 김해시의 초선대에는 ‘부처의 발자국’이라는 거대한 ‘불족’이 있다는 점이다. 발자국처럼 생긴 형상을 두고 먼 거리로 떨어진 두 지점에서 예수의 발자국이니 부처의 발자국이니 한다는 게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의 흔적이 정말 예수가 남긴 발자국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전문가들은 발자국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봉헌물인 ’엑스 보토’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로마인이 여행을 떠날 때 무사히 잘 다녀오게 해 달라고 레디쿨루스 신에게 바친 봉헌물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중세의 기독교인이 모양이 발자국처럼 보이는 것에서 착안해 예수 발자국으로 둔갑시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이들은 설명한다. 비슷한 모양의 봉헌물이 로마의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보관된 게 그 증거로 제시된다.


우스운 일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발자국이 유명해지자 성당이 돈을 벌기 위한 장사에 이용했다는 점이다. 성당은 정면 현관문 위에 장삿속을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명문을 새겼다.


‘여행자여! 걸음을 멈추고 신전에 들어오라. 예수 그리스도가 감옥에서 달아난 성 베드로를 만났을 때 남긴 발자국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곳을 갈고 닦는 데 사용하는 왁스와 오일을 살 기부금을 내기 바란다.’


이때까지만 해도 돈만 내면 누구든지 ‘예수의 발자국’ 위를 걸어볼 수 있었다. 발자국 위를 걸으면 만복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그럴 듯한 소문도 퍼졌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걸어 다녀 훼손 위기에 몰리는 바람에 지금은 금속판을 덮어 보호한다.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처럼 기독교와 관련된 황당한 전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불문한다. 체코 프라하의 명물인 카를다리에는 고해성사 내용을 비밀로 지키다 순교한 성 네포무츠키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의 기단에는 성 네포무츠키가 강물로 떨어지는 모습을 새긴 부조가 있다. 병사가 개를 만지는 장면을 담은 청동 부조도 보인다. 사람들은 두 부조에는 놀라운 힘이 담겼다고 말한다. 부조의 개와 성 네포무츠키를 만지면 어떤 비밀이라도 영원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부조를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전설은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 공산정권 시절까지만 해도 프라하 시민 중에서 부조를 만지는 사람은 없었다. 1990년대 벨벳 혁명 이후 개방시대를 맞아 프라하에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을 때 일부 여행사가 상술로 퍼뜨린 엉터리 해설에 불과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부조를 만지는 외국인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이를 본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것은 여행사가 만들어낸 엉터리 유행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개는 중세에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상징이 아니라 악마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개를 만지면 비밀을 지킬 수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은 것이다.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이 돈벌이에 혈안이 됐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나갔다. 성당의 장삿속이 얼마나 심했던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임 1831~46년)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다. 소문을 들은 교황은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명문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는 ‘성당이 제대로 관리되고 않는다’는 이유를 붙여 명문을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여기에서 의아한 부분이 하나 있다.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 자리는 성 베드로가 부활한 예수를 다시 만난 곳인데 역대 교황을 포함해 교회 지도자들은 이곳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증거는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이 정말 작고 초라하다는 점이다.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 내부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2년 3월 22일 성당을 방문했다’는 기록을 담은 명판이 부착됐는데, 이것 말고는 다른 기독교 지도자가 이곳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증거는 없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베드로 행록』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면 성 베드로와 예수가 재회한 장소를 이렇게까지 허술하게 취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예수에게서 쓴소리를 듣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래서 로마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성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역사에서 로마가 차지하는 비중은 떨어지게 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만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교황청과 바티칸시국이 로마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 내부는 단출해서 둘러볼 게 별로 없다. 신도석은 달랑 한 줄이다. 제단에는 성모 마리아 그림이 새겨졌고, 벽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성 베드로가 그려진 게 전부다. 이런 것보다 이 성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식물은 입구에 세워진 시엔키에비츠 청동 흉상이다. 그들로서는 소설 ‘쿠오바디스’를 써서 성당의 명성을 높여준 시엔키에비츠가 정작 성 베드로나 예수보다 더 고마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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